*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마흔 여덟 번째 과외 - 너의 웃음 고마워 1
[내 거친 생각과아아아-, 불안한 눈빛과아아-.]
최근 예능프로그램 중에선 가장 승승장구하고 있는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는 임재범의 경연곡이었다. 비록 나이를 조금 먹은 곡이긴 하지만, 명곡의 힘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 각종 음원차트와 함께 노래방 차트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지금 '너를 위해'가 들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누군가 내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겠지. 하이라이트를 몇 초 정도만 들어주고 곧바로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그렇지만 풀기 전에 나는 이미 짜증이 나 있는 상태. 이유는 깊은 수면 도중 각성했기 때문이랄까(그냥 자다가 깬 거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대며 말했다.
"…여보세요?"
[히히, 민식아. 나야, 유리. 뭐해?]
유리에게 말을 하기 전,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흘겨보았다. 시침이 숫자 6과 7 사이에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쳐다보는 바깥의 해는 지는 것이 아닌, 분명히 뜨는 해였다. 해가 동쪽에서 질 이유는 없었으니까. 대충 시간이 어떻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의도치않게 모닝콜을 한 유리가 원망스러웠다.
"…자, 끊어."
신경질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투에서 시크함인 지, 귀찮음인 지 잘 구별이 되지 않는 이상한 감정이 섞여들어갔을 뿐이었다. 다 뜨지 못한 실눈인 채로 핸드폰을 나지막히 쳐다보았다. 통화시간은 내가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잘 흘러가고 있었다. 허무하게 5초가 지나갔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갖다댔다.
[…응? 야, 너 끊으면 죽어!]
"…왜?"
통화를 끊는 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니. 세상 참 살기 어려워졌고 느꼈다. 아니, 통화를 끊으면 문자메세지도 있고, 카카오톡도 있고 여러가지 토크 어플들이 물밀듯이 넘치는 데 뭣하러 통화비 아깝게 이 짓을 해야되냐 말이다. 커플 요금제도 안 했고, 내 돈 내고 쓰는 핸드폰인데. 그래도 인간관계가 나에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들 중 하나니까 패스.
[우리 벚꽃 놀이 가자.]
"…음? 벌써?"
[벌써는 무슨! 지금 4월이야, 4월! 끝물이라구!]
아, 가기 싫은 데 말이다. 아파트를 나오면 사람이 다니는 길가 위로 펼쳐진 것이 벚꽃나무고, 가을에 우수수 쌓이는 낙엽마냥 봄길 위로 소복히 쌓이는 것이 바로 벚꽃의 나풀나풀한 꽃잎이었다. 그런 걸 굳이 여의도공원이라거나, 이런 데 가서 봐야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 지 의심이 간다.
"…그런데?"
[히잉…벚꽃 다 지기전에 나 벚꽃이 떨어지는 거 보고 싶다구우…]
더 이상의 수면을 취하는 것을 포기한 나는 방 밖으로 엉기적거리며 나와서 급히 토스트기 안에 부드럽지만 퍽퍽한 식빵을 넣고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잼을 꺼냈다. 일단 유리와의 통화를 끊고 계란을 얹든, 햄을 얹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알았어, 갈게. 근데 다른 애들은? 너 스케쥴 없어?"
[다른 애들은 다 스케줄 하느라 바빠, 그래서 나 심심하단 말이야아…]
통화로 들려오는 잔인한 유리의 애교를 듣느니, 차라리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극복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알겠다고 말하고 유리와의 통화를 끊고 토스트가 올라오는 경쾌한 소리에 난 접시를 꺼내서 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올려놓았다.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둔 달걀을 납작한 주걱으로 깨트리고 프라이팬에 둘렀다. 아차, 구운 소금 뿌리는 걸 깜빡했네. 급히 수납장을 열어 소금통을 꺼내서 아직 덜 익은 후라이 위로 솔솔 눈이 떨어지듯이 소금을 뿌렸다.
"아침엔 역시 모닝커피지."
나는 아침에 마시는 커피, 아침에 보는 볼 일, 아침에 하는 생산적 행위를 감히 아름다운 아침의 삼중주라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이 정의는 이 세상 어디에도 내리지 않은 나만의 정의이며, 다른 사람에게 으스대며 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 쪽팔린 정의이다. 그 중 제일 달콤하다는 모닝커피를 먹기 위해, 미리 뎁혀놓은 뜨거운 물 안으로 커피 분말을 타서 잘 섞었다. 희미하게 가루를 흩날리며 연기를 날리던 커피가루는 물 안에서 갈색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아오씨, 앞머리 보소. 조만간 실명 되겠네."
화장실에 가서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정리했다. 앞머리가 눈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 얼핏 보면 '패션왕'의 우기명을 연상시켰다. 머리스타일에 차이가 있다면 머리색깔과 머리길이가 다르달까. 장님처럼 보이는 건 그 캐릭터나 나나 똑같았다.
[카카오~토그~]
[여의도공원에서 11시~ 알았지? -유리]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면 알겠지만 열한 시에 나오라는 유리의 말이였다. 지금 시간을 손목시계로 확인하니 시침이 이제서야 7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집에서 여의도까지라면 어림잡아도 한 시간 내였다. 고로, 시간이 남아돈다. 아무래도 유리는 자신이 준비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잡은 듯 했다.
"아오…망할 유리냔."
오토바이 열쇠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무심하게 리모컨을 집어 전원버튼을 누른다. '팟'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어두웠던 텔레비젼의 액정은 어지러운 색들로 어지럽게 칠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인지라, 예능방송이 나오기 보다는 교양프로그램이라거나, 뉴스가 공중파 채널을 장식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벚꽃놀이 나오시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이번주가 벚꽃축제 하는 마지막주라서 서둘러 왔는데 참 다행이에요. 지는 벚꽃들이 참 예뻐요.]
리포터가 스스로 상황을 설명하며 향한 곳은 인적이 많은 지방의 어느 공원이었다.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는 일행 뒤로 벚꽃이 찬란하게 지고 있었다. 아름답다, 그 이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구가 있을까. 조금은 그녀를 만나기로 한 시간을 기다릴 맛이 생겼다. 버튼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오늘은 놀러가기 딱 좋은 날입니다. 서울, 경기도는 아침에 구름이 많지만 점심 이후에는 갤 예정이며, 영남, 호남, 관동지방은 하루종일 내내 맑을 예정입니다. 서울, 경기도의 최저와 최고기온은 14도, 19도이며 남부지방의 최저와 최고기온은 16, 21도입니다.]
익숙한 한반도 그림 앞으로 기상캐스터가 나와 일기예보를 해주고 있었다. 전 채널에서 보왔던 날씨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하늘은 맑다고 한다.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침이 7과 8사이에서 밍기적거리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도대체 11은 언제 되려나. 아침을 토스트로만 때우려고 했지만, 지난 저녁이 공복이었던터라 그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후라이팬을 꺼냈다. 그리고 냉장고의 문을 열어서 달걀을 꺼내 후라이팬 위에서 깨트렸다. 미리 달궈져있는 상태라서 표면에 닿자마자 새하얗게 익어갔다. 맛있어보이는 소리가 내 귀에 담겼다. 나는 밥그릇을 꺼내 밥솥의 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뚜껑에 맺혀서 주르륵 밥통 바깥으로 흘러 내려갔다. 하얗고 매끄러운 밥주걱에 밥을 퍼서 소담스럽게 그릇에 담았다. 밥을 담고 몇 가지 반찬을 더 꺼내서 식탁에 올려놓으니, 소금을 자그맣게 뿌려놓은 계란 프라이는 맛있게 후라이팬에서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아직 윗부분은 덜 익어서 주걱으로 계란 후라이를 뒤집었다. 뒷면은 참 잘 익었다. 몇 분 후, 수저를 꺼내서 밥그릇 옆에 얹어놓고 반찬의 뚜껑을 열었다. 먹음직한 냄새가 내 코를 헤집었다. 나는 후라이팬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놀고있는 나머지 손으로는 냄비 받침을 식탁 위에 올렸다. 다 만들어진 계란 프라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밥 위에 조심스럽게 얹혀졌다. 그리고 숟가락을 이용해 잘게 부셨다. 맛있게 만들어진 만큼, 잘 으스러졌다. 잘 으스러진 계란과 밥을 입에 넣고,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마찬가지로 입 안에 넣었다. 아침의 식단으로써는 다행히 합격점이다.
[카카오~토그~]
[오늘부터 신동오빠 해외 콘서트 일정 때문에 일주일 빠진대. 니가 와서 좀 채워줘야겠다 -규리]
[ㅇㅇ 알았어]
밥공기를 반 정도 비워냈을까, 경쾌한 알림음이 귀에 들렸다 금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누군가의 메세지가 남겨져 있었다. 신동형이 오늘부터 약 일주일 간 스케쥴이 있으니 내가 대신 대타로 나가달라는 말, 어차피 돈도 버는 일이고 오래 해봤자 두 시간만 정신 차리고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깐 흔쾌히 수락했다. 다시 숟가락을 집어 밥을 퍼먹었고, 젓가락으로는 여러가지 반찬을 집어먹는 데 집중했다.
+
"아, 앞이 왜 이렇게 막혀."
여의도로 향하는 남향 도로. 오토바이를 타서 그런 지, 너비가 넓직한 다른 차들과는 다르게 요리조리 길을 갈아타며 여유롭게 질주하다 여의도 공원 앞에서 발이 꽁꽁 묶힌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맨 앞에 있는 차들과 거리가 떨어져있는 뒤쪽인터라,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자세히 알 지는 모르겠다. 허나, 중요한 건 초록불인데도 차들이 조그만 동요도 하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다. 하는 수 없이 옆옆차선으로 가서 길가에 오토바이를 대고 걷는 수 밖에 방도가 없는 듯 싶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조용히 오토바이를 '주차금지'라고 표시되지 않은 길가에 대고는 멀리서 아까 그 도로의 상황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가 정장을 입은 채, 상대방 운전자와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다. 다른 남자는 키가 월등하고, 대머리 남자와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충돌사고가 난 듯 했다. 그렇다고 해도, 뒤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은 안 하는 건가? 뒤에 있는 사람들도 각기 나름대로 할 일이 있어서 운전을 해야되는데 저기서 싸우고 있는 사람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니 말이다. 문뜩 그 사람들 뒤로 예전에 지붕이 갈라져서 태권브이가 나온다던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정장을 입은 두 남자를 보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두 남자 모두 경찰을 부르지 않고 저러는 것을 보니 짜증났다. 나는 핸드폰의 화면을 열고 어딘가로 통화했다.
[반갑습니다, 여의도 경찰서 이진호 경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 국회의사당 앞 사거리인데요. 제 차는 아니고, 차 두 대가 충돌사고 난 것 같은데, 운전자들이 도로를 막으며 싸우고 있어서 다른 운전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거든요. 와서 조치 부탁드립니다."
[신고받았습니다, 근처에 있는 저희 순찰차가 출동해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고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네."
통화를 끊고 다시 천천히 걸었다. 여의도공원은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나올 듯 싶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커피 두 병을 샀다. 유리와 함께 나눠먹을 생각이었다. 편의점에서 계산을 마치고 커피 두 병을 안주머니 안에 넣고 편의점의 문을 열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내 앞에서 지나가더니 사거리에서 멈춰섰다. 이윽고 교통정리경찰이 와서 막혔던 도로를 조금씩 풀고 있었다. 오늘 8시 뉴스에서는 국회의원 두 명이 국회의사당 사거리 앞에서 진상을 부렸다고 뉴스 하나가 나올 듯 싶었다. 조금은 우스워보일 듯 했다. 유리와의 문자를 조금 더 하고 어느새 여의도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공원에 다다르기가 무섭게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보았던 그 벚꽃이 눈 앞에 마주했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하늬바람에 나풀나풀 춤을 추던 꽃잎들은 스스로의 연약한 줄기를 끊으며 햇빛에 아릅답게 그늘진 길 위로 낙화했다. 아름다운 벚꽃이 만발한 모습을 넋놓고 감상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어둡고 따뜻한 손길이 내 시야를 막았다.
"누구게에?"
유리가 장난치나 했다. 목소리가 조금 바뀌어져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내 귀는 속일 수 없지. 나름 변조한다고 하는 게 그 정도라니. 유리도 목소리 변조 연습을 더 해야할 듯 싶었다. 서현이하고 태연이가 그렇게 성대모사를 잘 한다던데, 가서 일주일 정도는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고 싶었다.
"훗…유치하긴."
"아잉…한 번 맞춰봐아!"
어차피 유리라는 것은 저명한 사실이니, 손을 치우고 그녀를 껴안기로 했다. 하지만 손을 치우려고 하자 눈 위로 손을 비비며 아양을 떠는 그녀의 목소리에 더욱 더 껴안고 싶어졌다.
"히힛, 그만 장난쳐 유리야!…응?"
"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아서 나보다 키가 작은 그녀를 확 껴안았다. 분명히 나를 올려다 볼 그녀를 위해 고개를 아래로 돌리자, 한 여자가 있었다. 근데 유리는 아니었다?
"…누구세요?"
"…다, 당신은요?"
하하, 이렇게 난처하고 뻘줌할 수가. 나와 나와 전혀 친하지 않은 그녀는 서로 껴안은 것을 금새 풀고 그 자리에서 조금 뒤로 걸으면서 머쓱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서로를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