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마흔 여섯 번째 과외 - 거짓말 3
"너가 그걸 어떻게…후릅…"
입술 근처에 튄 커피방울들을 손으로 대충 닦아냈다. 효영이는 나를 충분히 엿먹일만한 질문을 했다. 태연히 캔커피를 들어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화영이한테 들었는데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난 뒤, 나는 목에 힘을 주고 옆으로 틀었다. 뻐근했던 감이 조금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아할 지 감을 못 잡은 채 그녀의 시선을 잠시 피했다.
"음…어디부터 말해야 할 지…"
"대쉬의 철학에 대해 그렇게 할 말이 많은가봐요?"
"…어…음…그건 아니고."
음, 그래. 내가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일 년사이에 벌어진 관계가 한 두개가 얽힌 게 아니지. 근데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아이가 어째서 내 복잡한 연애사를 한 눈에 꿰뚫어보는거지. 장래희망이 증권회사 애널리스트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됬든 미안…"
"왜 미안해하세요?"
내가 미안해하는 이유를 자세히 알면 무턱대고 효영이한테 사과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안 좋은 것이 분위기가 자꾸만 내가 효영이에게 사과하라고 재촉하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하는 것이랄까.
"…미안해, 근데…나 화영이는 안 건드렸어…"
"그 의미심장한 말을 뭐에요? 조만간 화영이를 건드리시겠다는 이야기같은데."
"…아, 아니 무슨 큰일 날 소리를!"
내가 미쳤다고, 화영의 언니의 앞에서 화영이를 건드리겠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용기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나와 얽힌 여자들의 수는 그야말로 과포화 상태. 지금도 힘들지만,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워지는게 지금 내게 닥친 현실이었다.
"왜요?"
"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고 부정을 하자, 효영이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내게 다시 물었다. 왜냐니, 언니된 도리로서 자신의 동생이 걸그룹 내에선 널리 퍼진 바람둥이에게 어장관리를 당하는 꼴을 보겠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난 잠시 할 말이 없었다.
"은정언니, 효민언니, 보람언니, 소연언니, 지연이, 큐리언니…들이랑 죄다 하셨으면서 화영이는 왜 아니에요? 화영이는 다른 언니들에 비해 매력이 없나요?"
효영이는 애뜻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물어보았다. 막상 생각없이는 대답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질문만 골라서 하는 것도 능력인데, 효영이는 그런 능력이 출중한가보다.
"음…그게…사실 난, 오는 여자들을 안 막는 거지…막 달려들거나 들이대는 건 아냐."
"…왜 그럴까요?"
잠깐 고민한 끝에 그녀의 당황스러운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을 했다. 이렇게 대답하는 건 아쉬운 감도 없진 않다. 가슴에 응어리 질 것처럼 찝찝하달까.
"…어?"
"왜 다들 오빠를 좋아하는 걸까요."
병원에 갔다오기 전까지는 다들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 지 몰랐지만, 그 후로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분명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능적 감정이 한 몫을 하긴 했지만, 촉매처럼 그것을 도와준 건 내 몸에서 배어나오는 페로몬이라는 특이한 물질 때문이라는 걸. 그것을 알게 된 후로부터, 그녀들의 눈빛이 갑작스레 바뀔 때마다 페로몬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하아…효영아…사실 나…"
"…네?"
"너만 알고 있어야 돼."
"네."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 어차피 얽힐 이유가 별로 없는 효영이에게 털어놓는 게, 다른 아이들에게 털어놓는 것보단 마음이 놓일 듯 보였다. 효영이는 내가 말하는 게 그저 궁금한 감정과 기대감만 드는 지 눈빛이 호수에 비친 햇빛처럼 흩어지며 초롱거렸다.
"사실, 나 특이체질이야."
말해놓고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햇살이 아른거렸다.
"…네?"
"음…그 몸에 페로몬이라는 성호르몬이 분비되는 정도가 정상인보다 몇 배는 더 높다고 병원에서 말해줬어."
"…엥? 그게 뭐에요?"
효영이의 얼굴을 보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처럼 보였다. 오히려 알려주면 죄책감 들 것 같은 모습이랄까. 그래도, 모른다고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 말해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나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이어나갔다.
"…그러니깐, 이성에게 자신을 매력있게 어필해주는 사랑의 묘약 같은 거야."
"…아하."
효영이의 얼굴에 검은 커텐이라도 친 마냥 어두운 기운이 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밝았던 표정였던 것 같은 데 말이다.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감정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하니 조금은 놀라웠다. 얼핏 희푸른 기운도 느껴진다.
"나는 좀 유별난 게 많아서 그런 걸 꺼야…"
"…그랬구나."
효영이는 들고있던 커피캔을 다시 입에 갖다대고 몇 모금 더 마셨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동생에 대한 언니로서의 걱정인걸까. 그런 것이라면, 화영이는 참 좋은 자매를 두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저런 걱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을 걱정했다면 모를까.
"그러면 여태까지 다 진정한 사랑이 아닌거에요?"
"음?"
"오빠가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면 그렇잖아요, 정말 단순히 페로몬 때문에 끌린 거라면 언니들은 오빠를 사랑하는 감정이 있다고 확실할 순 없는 거잖아요."
"…으음…그런건가…."
효영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말들을 듣고 보니, 페로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걱정했다가 잊고 있었던 것들이 새록새록 수면 위에 나타난 거품들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효영이의 말에 어느새 경청하며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재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그, 그럼…화영이도 그런 걸까요…"
효영이는 다 먹어서 비어버린 커피캔을 손으로 흔든 채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 보았을 때에 그녀의 표정은 알쏭달쏭하게 슬픔이 어려있는 듯 보였다. 아까보단 덜 어둡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게 그녀의 목소리로 젖어나오는 슬픔은 아까보다 더 진동하고 있었다.
"…화영이도 오빠 좋아하거든요."
"그…"
"근데요, 오빠 말이 사실이면…화영이의 마음은 진실이 아닌 걸까요?"
아직 진짜로 성인이 되지 않은 효영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말하는 태도는 얼핏 사랑으로 기쁘고 슬픈 경험을 모두 다 한 것마냥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깊은 이야기까지는 꺼내본 적이 없는 데 말이다. 다시 한 번 나에게 되묻는 효영이의 질문에 나는 아까처럼 고개를 숙이고 고민했다.
"근데…사람이 사랑을 한다는 게 정말 답을 내릴 수가 없는 거라서…"
"그럼…오빠는요?"
"…어?"
고민 끝에 내놓은 대답을 말하면, 그녀는 다시 내게 되묻는다.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그녀가 던지는 질문은 그렇게 돌고 돌았다.
"오빠는 언니들이 좋아서 받아주는 거에요? 아니면 그냥 받아주는 거에요!?"
"…글쎄…"
어느 누구도 안 좋다고 느껴본 적이 있다. 받아준다는 자체가 내가 호감이 있어서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녀에게는 절대적으로 잘못이 없다.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단지 그 상황만 생각하고 늘리기만 한 내 잘못이 있는거지. 악순환 같지 않은 악순환의 반복이다. 효영이는 이에 대해 약간은 화가 나는 지 어느새 격정적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하아…오빠는 카사노바네요."
"…그런가, 아니 카사노바 맞아."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지워질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내가 바람둥이라는 것. 이 인생이 어디까지 막장으로 치닫아야 이런 위험한 질주도 멈출 수 있을까, 라고 내 자신에게 의심된다.
"…효영아, 그래도 말이야. 난 애들이 싫어했다면 거부했을거야."
"…그래요?"
"응, 일단 연애라는 게 마음을 맞춰야하는 거잖아."
내가 보기에도 그저 허울만 좋은 변명 같아보인다. 하지만 효영이의 표정은 아까보단 흰 기운이 어렸다.
"…음, 그럼요. 오빠는 화영이가 만약 좋다고 오빠한테 고백하면 받아줄거에요? 다른 언니들처럼?"
"……어음…"
"화영이가 매력이 없나요…?"
효영이의 목소리는 어느샌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근데, 이해가 안 되는게 아무리 동생의 입장을 대변해서 말한다고 하지만 너무 동생의 입장에 감정을 몰입한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는 너무 지나친데, 그렇다고 뭐라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녀의 말에 대꾸나 계속 하기로 했다.
"아니지, 화영이가 매력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나만 바라보면 그 애가 너무 안타까워서…"
"왜요? 화영이도 오빠가 좋다고 하는 데, 그러면 된 거 잖아요."
효영이는 슬픔을 거둔 채, 화영이의 입장을 계속해서 대신해주며 화영이를 옹호해주고 있었다. 어느샌가 앞뒤 상관없이 '그녀가 너를 좋아하면 그걸로 된거다.'라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논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그녀였다.
"…화영이가 아깝잖아. 도대체 내가 뭐라고, 바람둥이에다가 능력도 없는데, 화영이는 잘 나가는 여자 아이돌 중 하나잖아. 그리고 어느 누군가의 이상형이기도 하고."
"화영이도 오빠가 이상형인가보죠."
어째, 내 말이 자꾸 효영이의 말에 밀리는 모양새다. 그저 쉬어가기 위해, 힘든 다리를 달래기 위해 앉았던 자리는 마음을 불편하고 찝찝하게 만들어갔다. 원래는 이럴려고 여기 앉아서, 커피를 사온 게 아닌 데 말이다. 다 먹은 커피캔을 움켜쥔 채, 건너편에 있는 쓰레기통에 살짝 띄워서 던졌다. 쏘옥, 잘도 들어간다. 나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서…오빠는 그 애가 싫어요?"
자전거를 세우기 위해 걸어두었던 지지대를 위로 올리고 안장에 다리를 걸치는 순간, 뒤에서 효영이의 잔잔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뒤 나지막히 가로등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그 애만 괜찮다면…힘들어도 견딜 수 있어…"
"………."
효영이는 자전거에 타기 전 혼자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리는 듯한 입모양을 만들긴 했지만, 워낙 작게 말한터라 이미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져버린 뒤였다. 그녀는 다 먹은 캔커피를 나처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내 뒤에 타고는 나의 허리춤을 껴안았다. 단풍을 연상케하는 불그스름한 노을이 질 때쯤, 우리는 자전거를 반납하고 오토바이를 타면서 그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 때까지 효영이는 고개를 못 올렸다.
"그럼 잘 들어가, 효영아."
그녀의 숙소까지 바래다 준 뒤, 다시 오토바이에 타려는 순간. 효영이는 '저기…'라고 말하면서 나를 불러세웠다.
"저, 저희 숙소말고…티아라 숙소 가야되는데…"
"어? 왜?"
"거기서 화영이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아…그럼 거기까지 바래다줄게."
"네."
그녀는 다시 오토바이 위로 헬멧을 쓴 채 올라탔다.
+
"그럼 잘 들어가."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응."
효영이는 자연스럽게 티아라 숙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뒤돌아 복도를 걸으려고 했다. 그 때였다. 내 팔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나는 숙소의 바닥에 눕혀졌고, 그 위엔 효영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