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마흔 다섯 번째 과외 - 거짓말 2
"……?"
"뭘 그렇게 놀라요?"
진짜로 놀란 건 아니고, 예의상 놀란 척을 한 것이다. 수 개월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얻은 경험을 여기서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사실…저…"
"…?"
"오늘 연습 말고 할게 없었거든요…헤헷."
효영이가 이렇게 김 빠지는 소리를 잘 하는 줄 알았다면, 놀 생각을 안 하는 건데. 는 실없는 소리이고, 어차피 썸씽따위는 없겠다. 오랜만에 매우 편안하게 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그럼 뭐 할까?"
"…흠, 일단…"
"일단?"
이것이 일일드라마의 폐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일일드라마를 자주 접하게 되는 많은 작가들이 어디서 배운 건 지, 못되쳐먹은 절단신공을 사용하는 바람에 나까지 피해를 입어야하다니. 물론 이것도 실없는 멍멍이 소리지만.
"…배가 고파요!"
아? 배가 고파? 뭐, 든든하게 위장 채우고 에너자이저마냥 활개하고 다니는 것도 괜찮게 미치는 방법이지. 흠, 효영이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근거로 삼는다면, 그녀는 분명히 예삿 식당은 안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디 갈래?"
"오빠, 오토바이 가지고 왔죠?"
"응, 가지고 왔지."
"그럼…오토바이 타면서 식당 한 번 물색해봐요."
효영이까지 내 애마의 종류가 무엇인 지 알고 있다니. 내 애마의 종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지 쉽게 상상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제일 먼저 그 사실을 꼬바른 년은 이순규가 100%일테고. 그 옆에서 소문을 터트린 뇨석들은 필히 그녀가 소속한 그룹의 멤버들일 것이다. 물론, 입 무거운 서현이를 제외한다면…크으…8명이나 있네.
"그럴까? 근처에 아는 맛집 있어?"
"몰라요, 일단 오토바이 타면서 봐요!"
조금은 효영이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게, 분명히 오토바이를 타면 차가 정체하지 않는 이상 서행은 보장이 안 될텐데, 그녀의 순간포착이 백분 발휘 되지 않는다면 맛집 찾기는 커녕 일반 식당마저도 못 찾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칠칠맞게 햄버거 소스나 묻히면서 배때기에 영양보충 대신 지방보충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런 음식 좋아해?"
"자주는 아니어도…가끔은 먹어요. 아부지가 외식으로 제일 먼저 사주시던게 요거라서…히힛."
화영이만 순대국밥을 잘 먹을 줄 알았더만, 역시 자매는 자매고 쌍둥이는 쌍둥이인가보다.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진 순대국밥의 간을 맞추면서 꼬맹이마냥 희희낙낙 미소가 떠나갈 줄 몰랐다. 나는 저런 거 잘 못 먹겠던데. 나는 순대국밥집에서 순대국밥 대신 비지찌개나 시키면서 물 한 잔을 홀짝 마셨다.
"그래? 먹을 때 마다 반갑겠네."
"그럼 오빠한테 제일 반가운 외식은 뭐에요?"
"나? 짜장면. 어린이집 다니면서 받아쓰기 백점 맞았을 때마다 사주시던게 짜장면이였거든. 짜장면 먹고 싶어서 일부러 백점 맞고 그랬어."
"호오…일부러 백점 맞을 정도면 얼마나 머리가 좋은거에요?"
"그냥…그럭저럭. 부모님 등쌀에 유치원 때 애들이랑 노는 것 대신 영어학원 다니고 그랬거든. 그래서 중학교까진 여태까지 연락하는 친구가 아예 없지. 하핫."
효영이가 순대국밥을 숟가락으로 퍼먹는 속도가 잠깐 느려졌다. 은근히 아련한 내 경험담에 연민이라도 느꼈나보다. 실제로 중학교 동창과 연락한 경험은 고등학교 입학 전 단체로 놀러간 것 빼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금까지 연락하는 일반인 친구들도 대개 고등학교나 대학교 친구 혹은 전우가 전부였으니까.
"…히이, 오빠 보기보다 불쌍해."
"괜찮아, 그래봤자 예전 일이고, 고등학교 친구랑 대학교 친구랑은 핸드폰에 불 떨어진 것처럼 쉴 틈없이 연락하고 지내니까 그리 불쌍한 것도 아냐. 그냥, 중학교 때 동창까지만 연락한 적이 거의 없을 뿐이니까."
"…그래두, 난 중학교 친구들이랑 아직 연락하는데, 오빠는 그런 적 없다고 하니까요. 중학교 때 보냈던 재밌는 경험을 함께 공감할 수 없는 친구랑 연락을 못하는 게 얼마나 슬픈건데…"
순대국밥집까지 와서 효영이에게 연민을 느껴야하다니. 추억을 곱씹어보다가, 은근슬쩍 씁쓸함을 곱씹게 되었다. 집에 가면 오랜만에 중학교 때 졸업앨범이나 꺼내서 추억이나 되살려야겠다. 지금쯤이면 많이들 군대 가거나 취업하고 있겠지. 아니면 학업에 취중하고 있다거나.
"알았으니, 이제 연민은 그만 느끼고 먹던 거나 마저 먹어. 따뜻할 때 먹는 게 제일 든든하고 포만감이 차니까."
효영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뚝배기에 얼굴을 박을 기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숟가락을 깨알같이 움직였다. 비록 조금씩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초당 잡수시는 속도는 4G LTE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벌써부터 숟가락으로 뚝배기를 긁어내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참 빨리도 먹는다고 생각했다.
"…히히, 다 먹었다아…"
보는 내가 배부를 정도로 맛있게 먹은 효영이는 순대국밥으로 차서 부풀어오른 자신의 배때기를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화영이도 저러던데 너도 그러네?"
"쌍둥이잖아요, 비슷한 버릇 몇 가지는 있겠죠."
마치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동이 화영과 얼핏 비슷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효영이였다. 나는 그렇구나,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제 뭐할래? 쇼핑이나 영화나 볼래?"
"그런 건 지루해요, 요즘 누가 그렇게 놀아요?"
너 말고 전부 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같은 자매류 중 하나인 정자매양들이 분노를 한 움큼 잡수고 그녀를 쫓으로 올 것 같아서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스스로 단정짓고 그럼 그녀는 어떻게 대답할 지 궁금해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순서를 바꾸고 말하는 그런 예상 가능한 개드립을 치는 건 아니겠지.
"으음…운동해요!"
"…푸훕! 응?"
"엥, 왜 그래요? 공원에서 운동하자는건데."
나도 많이 썩었구나. 내년이 되서야 갓 스무살 되는 여자애의 말에 이렇게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게 다 강용석 때문이다. 라고 하고 싶지만, 이렇게 발언했다가는 국회의원을 모욕했다며 나까지 고소를 먹일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러고보니, 갑자기 개그콘서트를 현장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벌컥 들었다. 나도 감수성 게스트로 출연해서 개그 잘 칠 수 있는데…한 번만 시켜주면 안 되나?
"뭐해요? 안 가고?"
"아, 미안."
개그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집념이 너무 큰 탓일까. 효영이가 등을 야무지게 손바닥으로 두드려서야, 그제서야 이승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계산을 마치고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 수 있었다.
+
"너 자전거 탈 줄 알아?"
"아뇨."
"…아, 그래? 아저씨…일반 자전거 한 대 주세요."
오토바이에서 자전거로 체인지. 모터에서 발로 체인지. 그것도 효영이의 발이 아니라, 내 발 말이다. 시발. 오토바이 탈 때는 그저 자전거의 페달이 있을만한 위치에 발만 대고 달리면 게임 셋인데, 요건 내 다리를 혹사시켜야 한다니. 더군다나, 효영이는 안타깝게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고 해서, 내 무게와 함께 효영이의 무게가 추가된 상태에서 힘들게 내달려야 했다.
"…에게? 남자가 왜 이렇게 비실비실해요?"
"…야, 니가 페달 돌려봐. 아마도 빡칠거다."
효영이는 나에게 비난같은 농담을 날리며 실실 쪼개고 있었다. 젠장, 이러면 효영이나 티아라 애들이나 소녀시대 애들이나 다를 게 없다. 세 보기 모두 생각만 해도 빡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페달을 열심히 돌리며 바지 안으로 땀이 꾸준히 차오르는 것을 느끼지만, 효영이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양팔을 쭉 벌려 자전거를 타면서 갈라지는 시원한 바람을 그대로 받아내며 머릿결을 휘날리고 있었다. 와, 저 휘날리는 머리카락 가위로 다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네.
"…효영아, 잠깐 쉴래?"
"벌써요? 뭐, 알았어요."
그리고 잠깐 쉬고나서, 어떻게든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자. 그래야, 이번엔 내가 역으로 널 고생시킬 수 있지 않겠니. 후후-.
"어? 저기 자판기 있다."
"근데?"
"근데라뇨, 가서 한 캔만 사다줘요."
허허? 이 년 보게? 이런 행동이라면 흡사 인터넷에서 안 좋게 불릴 수도 있겠다 치지만, 점점 불안한 것이 효영이의 행동이 화영이랑 많이 비슷해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너 화영이지!'라고 근거없이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화영이처럼 보이긴 하지만 엄연히 효영이는 효영이니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렇게 추측을 하거나 말거나, 내 발은 어느새 자판기 앞으로 와있었다. 아아, 내가 셔틀부심이 아직 남아있나보다. 이게 소녀시대 아해들한테 세뇌받은 덕분인건가.
"자, 여기. 커피는 가리지마라."
"캔커피는 안 가려요. 비싼 거 빼고 맛이 다 그게 그거니까. 그래도, 캔커피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레쓰비 사오셨네요."
"응. 난 레쓰비밖에 안 마셔서."
우리 둘은 동시에 알루미늄 뚜껑을 따서 시원한 커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아직 봄이긴 하지만, 날씨는 벌써 초여름같이 후덥지근했달까. 지구온난화가 이제 미래의 소리가 아니란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안 이랬는데.
"…후릅, …아, 오빠. 궁금한게 있어요? 오빠에 관해서?"
"…후릅, 응? 뭔데?"
효영이는 커피를 마시다가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지, 내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고 있었다. 인생의 개똥철학을 묻는 것도 아닌데, 나한테 물을 게 뭐가 있는 지 별 생각이 안 났다. 그저 아까 말했던 추억의 연장선이 되는 주제 쯤을 물어보려고 하나…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그녀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엇일까 하면서 절로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그게 있잖아요…그…그…아, 뭐였더라…"
"에이, 뭐야. 긴장감 떨어지게."
"생각났는데…까먹었ㄷ…아, 다시 생각났다!"
효영이는 그제서야 커피캔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질문을 까먹은 줄 알고 귀엽게 머리를 치며 자책하던 효영이를 보며 조금씩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다시 났다는 그녀의 말에 미소가 싹 사라진 채 긴장은 보톡스처럼 나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이건 남자의 직감인데, 그녀가 날 충분히 당황스럽게 할 만한 질문을 할 것만 같았다.
"…뭐, 뭔데?"
"오빠는 있잖아요…"
아, 진짜 뜸 들이기 쩌네. 은근히 긴장이 되면서 궁금해지는 것을 잘 다룰 줄 알다니. 남자 다루는 솜씨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여자의 몸이 좋은거에요? 아니면 여자들이 들이대면 받아주는거에요?"
"…푸후훕!"
이건 웃음소리가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삼키려고 하던 캔커피의 농축액이 침과 섞여서 스프링쿨러마냥 분사되는 소리다. 불투명한 유리창을 마른 헝겊으로 깨끗이 닦아놓은 듯한 맑은 하늘 위로 갈빛의 물방울들이 아름답게 수놓였다가 땅으로 곧장 떨어진 채로 터졌다. 다행히 옆에 앉아있던 효영이에게 분비물은 전혀 묻지 않아있었다. 그저, 태연히 자신이 질문한 것에 대해 대답을 들으려는 속셈이었다. 글쎄…어떻게 말해야 되나. 머리 속으로 정리를 하고 말해야겠다. 무턱대고 말했다간 어떤 말실수를 신선하게 할 지 몰라서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