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마흔 세 번째 과외 - 라디오 스타 2
'이건 미리 사전에 계획한 일종의 작전이야.'
현재의 나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동안의 방송경험을 생각해봤자, 웬만해선 사전에 미리 통보해서 촬영을 한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는 경우였다. 아무리 녹화방송이라지만, 모든 진행이 어색한 내가 어떻게 2시간을 생으로 버텨가며 라디오를 할 수 있냐는거다. 게스트의 입장에서도 아니고, 더블 DJ의 입장에서 보면 더더욱 그렇다.
"…누나, 이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괜찮아, 나만 믿고 따라와. 어차피 보이는 라디오도 아니고 그냥 라디오잖아?"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판자에 모든 것을 의지한 채, 난파되어 가라앉고 있는 배를 생생하게 목격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이상한 비유지만 현재 규리누나의 존재는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판자였다. 이 판자가 없으면 난 '라디오 방송' 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아, 알았어."
어차피 보이는 라디오도 아니고, 목소리만 나오는 방송이라고 하니 지금 상기된 얼굴을 볼 수 있는 청취자라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일 것이다.
'저기, 피디님. 저 이거 해도 되는거에요? 문제 없어요?'
'응, 없어. 난 민식씨 진행 믿고 하는 거니까 잘해줘.'
진짜 더럽게 무책임하네. 믿고 쓰는 김민식에게 발등 한 번 찍히고, 경위서 한 번 써봐야. 다시는 이런 모험을 하지 않겠다고 교훈을 새기게 되려나.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던 와중,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방송이 시작되기 전 규리누나에게 급히 질문했다.
"누나, 페이 어느정도 돼?"
"페이? 일당 20~30 정도? 한 달에 600 받으니까, 맞을거야."
"아, 그래?"
열심히 해야지. 신동형한테는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피디님 눈에 띄어야 할 것 같았다. 곧 라디오국계의 핫 아이콘이 되어주마. 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해보고나서 결정할 일이었다.
[신동~ 규리~의 심심타파!]
라디오의 1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듯, 꺼져있던 'ON AIR' 등이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 있던 물병을 잡아, 몇 모금을 들이키고는 다시 헤드셋에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심타 패밀리 여러분 반가워요,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하세요. 심타 패밀리 분들은 새벽 두 시가 될 때까지 주무시지 마시라고, 특별히 첫 노래는 잠이 확 깨는 노래로 가볼게요. 걸스데이의 '잘해줘봐야' 한 곡 듣고 조금 있다 만나요."
규리누나의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처음 들어보는 시끄러운 인스트루먼트가 귀를 찔러댔다. 규리누나는 헤드셋을 벗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규리누나가 나에게 오늘 계속 녹화하는 날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긴장될 수 있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심환이라도 챙겨먹을 걸. 청심환 대신 소화를 위해 사이다를 쳐마셨으니, 이미지 깨게 트림으로 라디오부스를 포격할 기세였다.
"내가 너 소개해주면 너 그 때부터 멘트 치면 되는거야. 라디오는 5초 이상 침묵이면, 거의 방송사고니까 분위기 보면서 말 던져."
"아, 알았어."
누나가 나의 어깨를 툭 손으로 치고는, 나보고 헤드셋을 벗으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그녀의 손짓을 보고 씌웠던 헤드셋을 잠시 내리고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끊임없이 조언을 해주었다. 이렇게 그녀가 감사하게 느껴질 줄이야.
누나는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헤드셋을 끼었다. 때 마침 흐르고 있었던 첫 선곡이 끝났다.
"네, 반전돌 걸스데이의 '잘해줘봐야'였습니다. 패밀리 여러분, 오늘은 신동DJ의 목소리가 안 들리셔서 조금은 당황하셨을거에요. 신동DJ는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당분간 못 나오실 것 같구요, 그 대신 그 자리를 새로운 임시 DJ가 잠깐 메꾸어 주실 거에요. 소개할게요, 이름 석 자보다는 아직까지 티아라 효민씨의 사촌지간으로 유명한 분이시죠. 김민식씨 오셨습니다,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티아라 효민의 사촌오빠인 김민식입니다. 심심타파 청취자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나를 소개하는 규리누나의 말은 굉장히 기분이 좋은 듯 방방 뜨고 있었다. 규리누나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멘트가 나한테 넘겨지자 아슬아슬하게 긴장한 모습을 감추고는 겨우 합격점일듯하게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 청취자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정말 베일에 쌓이신 분이 이렇게 표현하려도 되려나…제 발로 찾아와주셨는데, 민식씨의 진짜 모습은 뭐에요?"
"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재학 중입니다. 어쩌다보니, 효민이 덕분에 방송하시는 분들께서 감사하게도 많이 찾아주시네요."
"그러고보니, 티아라 효민씨 가족 분들 유전자가 우월한가봐요. 민식씨나, 효민씨나 다 예쁘고 멋지게들 생기셨네요. 좀 있다가 라디오 끝나고 사진 같이 찍으실거죠?"
"네, 그럴게요."
"그럼 일단 인터뷰는 여기서 끝내고, 민식씨 다음 선곡 리스트를 읽어주실래요?"
"이거죠? 아, 제가 좋아하는 뮤지컬 노래 중 하나네요. Rose Jang이 부른 All that jazz 듣고 좀 있다가 뵐게요."
오랜만에 다시 듣는 반가운 비트가 헤드셋을 통해 쿵쿵 울려퍼졌다. 이 노래를 들으니까,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아지는 데. 지은이랑 보러갈까? 오랜만에 교양적인 소양을 기르면서 나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거야! 는 개꿈이겠지.
+
"이제 막을 내릴 시간이네요. 마지막으로 임시DJ 민식씨가 추천해주는 노래로 심심타파 여기서 끝내보도록 할게요."
"벌써요? 이제 끝나면 언제 다시 볼 지 아쉬워서 어떡하나요. 다시 보자는 의미에서 한 곡 띄워드릴게요. 2pm의 어게인어게인."
방송 끝.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던 압박감 같은 존재의 헤드셋을 드디어 벗겨냈다. 투명 유리창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내 눌린 머리에 손을 머리카락 안으로 집어넣어 붕붕 뜨게 했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수고했어, 민식아. 생각한 것보단 잘 하던데?"
"…으아, 몰라…."
이제 완전히 끝났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피디님의 오케이 사인을 봤을 때는 확실히 끝이었다. 규리누나의 칭찬을 뒤로 하고, 나는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고 생각했다. 덜컹했던 가슴도 제 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재빨리 긴장의 근원이었던 라디오 부스를 빠져나왔다.
"근데, 신동형한테 무슨 일 있어요? 라디오도 펑크 낼 정도로?"
"아, 신동씨 병원 가셨어요. 장염 있대요, 한 일주일동안 회복해야한다네요."
그럼 내일부터는 규리누나 혼자서 라디오DJ를 하면서 진행하는 건가? 둘이 하다가, 혼자 하니까 조금 벅찬 감이 있긴 하겠지만, 잘 해내겠지. 오늘 라디오방송 하는 내내 나한테 조언을 해줄정도로 라디오 진행에 익숙한 규리누나이니 믿고 할 수 있겠지.
"아, 어떻게 하지…누구를 섭외해야하는 데, 갑자기 이러면…"
규리누나 혼자서 진행을 하면 이 문제는 해결하는 데, 저 피디님은 무조건 더블DJ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나보다. 저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않다. 어서 이 라디오 부스에서 빠져나가야겠어, 이런 젠장, 빠져나갈 수가 없잖아! 다 끝이야, 끝이라구…흑흑…
"민식아, 어디 가게?"
"하핫, 요 앞 화장실좀."
"알았어, 갔다와…흠, 피디언니. 그러면 민식이를 임시로 쓰죠?"
"…!?"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 찰나에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화장실을 가려는 발길을 돌려 다시 라디오부스 안으로 걸어갔다. 아, 망했다. 이미 날 임시로 반드시 캐스팅하겠다는 분위기였다. 아, 방송하고 싶지 않았던 민식의 연예계 첫 진출이 라디오란 말인가. 인기만 있으면 안정적인 직업이 되서 괜찮을 듯 싶은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수 만명의 무명연예인들을 생각하면 전혀 괜찮지 않기도 했다.
"저기, 누나?"
"민식아, 뭐 어때. 오늘 잘 했잖아, 내일도 잘 할거야, 모레도 잘 할거고. 그리고 니 목소리 새벽에 잘 어울려."
"듣다보니, 그렇더라구."
앞으로의 미래를 그렇게 쉽게 확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미래에 잘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조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듯 싶었다. 학업에 취중해서 좋은 학점으로 졸업을 해야되는 것도 그렇고. 이 라디오를 한다면 내 인생의 두 번째 터닝포인트가 될 지도 모른다. 첫 번째 터닝포인트는 이미 1년 전에 벌어졌지만.
"…저기…저, 생각할 시간 좀…"
"…시간 되죠?"
너무나도 간절한 피디님의 표정(동의를 안 하면 혀 깨물 기세였다)에 승복한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이 선택이 옳은 선택인 지 아직 확신이 안 선다. 몇 일뒤, 몇 주뒤, 몇 달뒤, 아니면 몇 년뒤에 그것이 옳은 선택인 지 조금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민식아, 그리고 사과할 게 있어."
"…응? 뭐가?"
"사실 오늘 녹방이 아니라, 생방이였어. 이거 봐봐."
"…!?"
젠장, 규리누나 은근히 낚시 쩌네.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규리누나가 내미는 노트북의 화면을 쳐다보았다. 이런 말 하면 무리일 지도 모르겠지만, 믿기지않게도 네이버 인기검색어 1위를 '효민 사촌오빠'가 장식하고 있었다. 그 검색어를 누르면 효민이의 사진이 70%, 내가 예전에 출연한 방송을 캡쳐한 사진이 30% 정도를 차지했다. 요즘은 카메라 성능도 좋아져서 사진 화질도 모공이 보일 정도로 꽤나 좋아졌다. 다행인 것은, 내가 그런 카메라로 찍힌 일이 없어서 모공까지 보이는 사진은 없었다.
"…민식아, 고마워."
"응?"
밴에서 내리고 아파트 단지로 같이 걸어가고 있을 때 쯤, 규리누나가 여태껏과 다른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거지. 아직까진 규리누나가 무엇을 고마워하는 지, 딱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더 걸었다. 엘레베이터 앞에서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너 때문에 살았어. 사실 네가 안 한다고 하면 어쩌나하고 맘 졸였었는데, 해주니까 다행이야."
"…그 정도야…"
규리누나의 진심어린 미소에 괜히 멋쩍여 머리를 긁적거렸다. 얼굴은 달아오르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갑작스럽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참아내며 엘레베이터를 타다, 문이 열리자 규리누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뭘 하려고?
'쪽.'
볼에 닿는 입술의 촉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눈은 갑작스레 커졌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해보자?"
+
"오빠, 왜 이렇게 늦게왔어!"
"아, 미안. 일 때문에 바빠서?"
시간이 늦어서 집에서 가서 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지은이는 내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 채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무슨 요리를 하려고 했는 지, 주방이 난장판이다. 아, 피곤한데 저거 다 치워야하나.
"아, 맞다. 오빠, 오늘 라디오 잘 들었어."
"뭐야? 뭘 했는 지 알면서 이렇게 나무란거야?"
"치이…일찍 온다고 했으면서 늦게 왔잖아. 새벽 세 시야, 세 시. 계속 기다렸다구."
그러고보니 지은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라디오를 보다가 가려고 했는데, 내가 오히려 지은이의 약속을 잊은 채 라디오를 진행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뾰루퉁한 표정을 짓다가 금새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런 표정을 보니, 뭔가 불안했다.
"…뭐, 뭐야? 그 표정은?"
"무슨 표정? 히히, 오빠 그거 알아? 설리가 말해준건데에-."
설리? 설리!? 지은이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니, 자연스레 몸이 벽 쪽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지은이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남자들이 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벽에다 탁 짚고,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설리가 무슨 말을?"
"새벽 세 시가 제일 야릇해지는 시간이래."
-라디오 스타는 알바 에피소드처럼 연작 에피소드여요. 여기서 끝나지 않슴다. 임시로 라디오 진행하는 것이 끝나면, 그 때 끝납니다. 죄송하지만 아이유 출연은 다음을 기약해주뗌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