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마흔 두 번째 과외 - 라디오 스타 1
"라디오부스는 처음 구경해보네."
"라디오에선 부스만 안 들어오면 구경하는 건 자유로워."
학창시절, 야간자율학습에 지쳤던 내게 비타민이 되어주었던 라디오.
비록 몸과 마음은 피곤에 쩔어 제멋대로 움직였지만, 귀 안에 담기는 디제이들의 편안한 목소리만큼은 힘없는 하교길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근데, 그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새롭고 새로웠다.
"자, 여기가 심심타파 스튜디오."
"아, 잠깐만."
나는 내 가슴팍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사람의 관심이 잠깐이라도 내게 쏠리는 곳이라면 떨리기 마련.
라디오부스 문 앞에서 긴장하는 내 모습을 뒤돌아 쳐다보고 있던 규리누나는 미소를 지었다.
"왜, 긴장 돼?"
"응. 진짜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인데, 기회가 없었잖아. 승연누나하고 지영이가 나 납치할 때도 사실 라디오 가고 싶었거든."
"…그래?"
규리누나는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하는 지, 평소 예능방송에 나갔다 하면 잡는 도도한 여신컨셉으로 찰랑찰랑 머리를 찬란히 휘날리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규리누나의 뜬금없는 개그에, 나는 이미 웃음이 터진 상태였고 그런 규리누나의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스텝들은 뒤늦게 일제히 웃음이 터졌다.
"역시 규리가 심심타파 활력소야, 귤느님, 짱!"
"호홋!"
저 모습은 내가 평소에 보던 점잖은 규리누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완전히 예능용 컨셉을 온 몸에 씌우고 나온 방송인의 모습 그 이상이었다. 은근히 규리누나를 보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친절한 매력과 재치가 있는 듯 보였다.
"안녕하셨어요?"
"어, 규리야, 안녕. 오늘 너 스케쥴 있다길래 우리가 일부러 녹방하는 거 알지?"
"당연히 알죠, 지금 들어가면 돼요?"
"아니, 좀 있다가 스탠바이 할 거니까, 그 때 들어가. 어? 근데 옆엔 많이 보진 않았지만 낯익은 마스크인데? 나랑 먼 친척사인가?"
라디오 피디분께서 나를 알아보시다니, 의도치 않은 상황이라서 뭐라고 건넬 말이 없었다.
처음 와본 곳에, 처음 대면하는 라디오 피디. 거기다가 처음 맞이하는 낯설은 상황까지. 어찌할 줄 모르고 손만 매만지면서 입술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 얘는 김민식이에요. 전에 승연이 위로 낡은 방송장비 떨어졌을 때 다치면서 까지 구해준 애."
"아, 맞다. 그 때 난 말로만 듣고,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아,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낯 부끄럽게 꼭 그런 이야기를 말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규리누나가 대신 나에 대해서 설명해주자, 그제서야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생각난 게 있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피디님이 날 꼭 보고 싶었던 말에, 알게 모르게 영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서 어색한 악수를 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와요. 난 남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맘에 들어하거든. 이렇게 적은 보수에도 열심히 일하는 신동이랑 규리 봐봐. 감동이라니깐?"
"…하핫…."
그래도 페이(출연료)는 꼭 주셔야합니다. 아무리 내가 아낌없이 희생하는 핫 아이콘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서도, 무보수로 일한다면 눈가가 짬쪼름해질 것 같았으니까.
다행히 피디님은 나와 친해지기 위해 농담으로 건네는 말이었으니까, 웃어서 간단히 넘길 수 있었다.
"신동형, 안녕하세요."
"어엉, 민식이네. 여긴 웬 일?"
윤호형과 마찬가지로, 소녀시대랑 놀아주는 잡일 덕분에 자주 마주쳐서 친해지게 된 형 중 하나인 신동형을 오랜만에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어 먼저 가서 인사를 했다.
신동형은 몸집에 실망하지 않게, 역시나 손에는 항상 간식 같은 것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건 뭐에요?"
"아, 이거? 팬들이 선물해 준 도넛인데, 너도 먹을래?"
신동형이 내게 도넛 하나를 팔로 뻗어 내밀었다. 흠, 먹음직스럽고 때깔이 좋은 게 입으로 베어물면 달달한 도넛 부스러기들이 혀 안에서 생동감있게 춤을 출 듯 싶었다.
마침,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암울한 공백의 시간이다보니, 먹고싶은 건 당연지사.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자고로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하나 쯤은 괜찮게 먹을 수 있을 듯 싶었다.
"히히, 잘 먹을게요."
"그래, 많이많이 먹어. 형이 너 소녀시대, 에프엑스 애들이랑 놀아주느라 고생하는 거 보면 막 가슴이 미어지려고 그래."
"…흑, 역시 형은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오랜만에 소울이 통하는 형제같은 사람을 만나는 듯 싶었지만, 아직까진 그렇게 친목을 쌓았다고는 느끼진 못했다.
흔히 읽었던 시구 중 하나가 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어찌 그 맛을 알겠는가.'
전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직므 고생하는 사람의 심정을 안다고 신동형과 나는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하나만 더 먹고, 녹음해야겠다."
"네, 전 그럼 부스 밖으로 갈게요."
"응, 구경 잘 해."
앞으로 신동형과는 친목을 더 많이 쌓아야지. 신동형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친해지는 거였는데.
나중에 연예인 절친 시리즈를 자랑해보라고 하라면, 용화와 권이 그리고 신동형을 넣어야겠다. 앞으로 술자리 좀 자주 마련할까?
마지막으로 신동형에게 손을 흔들며 나가보려고 하면서, 신동형이 입에 대는 도넛을 곁눈질하며 보았다.
'…흠, 저 도넛 색깔 이상한데?'
도너츠 전문 카페에서 최근에 아르바이트를 세 달 이상 했던 나로서는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색깔이었다.
저런 색깔은 흡사, 도넛츠를 만들었던 유진누나가 '이건 중생대 때 만들었던 도넛츠 화석이다' 라고 하면서 보여줬던 곰팡이 핀 도넛츠랑 매우 흡사했다. 물론 색깔이 비슷했다.
기분 탓인가? 근데, 내가 도넛츠 색깔을 저렇게 안 좋게 볼만큼 기분이 잡칠 정도는 아닌데?
"사랑해요오-. 그대애-. 사랑해요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오-."
"오, 민식씨, 크리스탈 팬?"
"아, 아니요. 지인이 이렇게 벨소리 설정해놔서."
수정이의 진면모를 봐야, '아-. 수정이 팬짓 하다간 내가 고생하겠구나-.' 할 듯 싶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설리의 상반신 누드를 카톡으로 과감히 뿌린 수정이를 생각하면 눈 앞이 아찔했다.
싴을 이기기 위해, 영화를 보다가 내 손을 자신의 은밀한 그 곳으로 이끌고 절정에 갔다왔던 수정이를 생각해도 눈 앞이 아찔했다.
그렇다고, 수신자가 꼭 수정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난 쉽지않은 여자이지은 - 010-xxxx-xxx]라는 센스없는 발신자명으로 봐선 지은이가 백타(100%)였으니까.
"여보세요."
[스케쥴 뛰다가, 시간 나서 전화했어. 오빠 뭐행?]
방방 뜨는 목소리에다가, 요즘 들어 애교가 부쩍 는 지은이였다.
어디서 근본없는 애교를 배워오는 지 모르겠지만, 소속사를 이전했으니 대충 어딜 지 답이 나왔다.
순규의 소행이 아니면 수영이의 소행이겠지. 언니가 되가지고, 에스엠에 적응해야 할 지은이에게 충고를 해주지 못할 망정, 몹쓸 애교나 가르치고 있다니.
조만간 면담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면 백타(100%) 내가 의도치 않은 면담을 갖게 될 수 있었으므로 그런 개인 면담은 참도록 해야할 듯 싶었다.
"나? 라디오 구경."
[라디오? 전파사에 있는거야? 용산에 있어? 나 용산에서 행사 뛰고 있는데, 조금 있다 같이 만나서 놀래?]
"뭔 소리야. 라디오 구경한다니까, 용산 말고 여의도에 있다."
[에이, 여의도가 멀면 얼마나 멀다고. 그럼 내가 여의도로 갈게.]
지은이 오늘 약 빨았나. 왜 이렇게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지 모르겠다.
이렇게 나를 만나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지은이의 모습은 참 오랜만에 보는데, 그 때도 의지 뿐만 아니라 열정도 몸도 불태웠지.
이번에는 그럴 수 없도록, 해도 건전한 데이트를 해야겠다.
"지은아, 여의도 오지말고, 오빠 집에 가 있어. 비번 알지?"
[집? 왜? 설마? 어머?]
"이상한 생각 말고, 어쨌든 내 집에 가고나서 문자나 카톡 날려?"
역시 지은이의 발상 자체가 음탕했다.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다가 끝에 가서 혼자서 딴 생각을 하고 부끄러워 하다니.
[알았송-. 오늘 기대할게 오빠, 오늘 나 많이 힘들거든. 오빠가 위로 좀 해야겠당.]
"…그, 그래."
폭풍과 같은 지은이와의 잠깐동안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갑작스럽게 느껴진 갈증에 매점이라도 갔다와야 할 듯 싶었다.
전에 왔었던 기억을 헤집어보면, 1층에 매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근데, 거기 갔다오면 완전 '나갈 땐 자유지만, 들어갈 땐 아니란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한데. 어떡하지.
"…민식아, 왜?"
때마침 규리누나가 라디오부스 안에서 대본을 리딩하고 시간이 남았는 지 밖에 나오더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아, 웬지 모르게 규리누나가 나를 사내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해줄 구원자가 될 수 있을 듯 보였다.
"아, 내려가서 매점에서 뭐 좀 사먹으려고 했는데, 나갔다 오면 다시 못 들어가잖아."
"그 정도야, 우리 라디오 스텝 언니오빠한테 말해서 잠깐 스텝증 빌리면 되지, 뭔 걱정이야. 피디언니, 얘 스텝증좀 빌려주세요."
"…아, 그렇게 쉬운 방법이?"
역시 규리누나가 생각하는 사고력은 이미 나의 사고력을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우월했다.
저 누나가 장난을 안 쳐서 그렇지, 장난을 한 번 치면 진짜 사고 날 정도로 크게 칠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알게 모르게 느껴졌다.
"잘 쓰고 돌려줘요?"
"그건 걱정마세요, 금방 갔다올게요."
다행히 규리누나의 부탁으로 한 여자스텝분께, 목 거는 방식의 스텝증을 받고는 신나는 발걸음으로 매점을 향했다.
+
"갈증 없어지니까, 살 것 같다."
이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음료수는 내 위에서 스물스물 소화가 완료되었고, 양 손에는 신동형과 규리누나 그리고 스텝 분들께 줄 조공물품(그래봤자, 음료수와 과자가 전부)을 두 손에 바리바리 들고서 원래 왔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먹을 것 사왔어요! 어, 근데 다들 표정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저, 그게…아, 여튼 잘 먹을게요…흐음…어떡하지."
기분이 좋아서 날아버릴 것만 같은 나와는 달리, 스텝의 표정 하나하나가 핵폭탄급 데미지를 얻어맞은 격 벙쪄있었다.
분명 기분이 괜찮아 보였던 피디님도 괜히 머리를 싸매고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휘젓고 있었다. 아, 나가 있어야하는 분위기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목에 건 스텝증을 벗어서, 나에게 스텝증을 잠시 빌려주었던 여스텝분께 가서 돌려준 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 순간, 규리누나가 내게 소리쳤다.
"민식아, 일루 와! 얼른!"
"…나?"
"어, 얼른!"
규리누나가 오랜만에 내게 하는 명령에 마성이라도 심어져있던 것도 아닌데,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를 했던 라디오부스의 문을 어느새 활짝 열고 들어가서 규리누나 옆에 멋쩍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러자, 규리누나는 내게 방송용 헤드셋을 건네주며 다시 소리쳤다.
"그 헤드셋 껴!"
"…이거? 아, 알았어…"
내가 규리누나의 명령에 이것을 왜 꼈는 지, 나도 몰랐고, 스텝들도 몰랐고, 어장에서 헤엄치고 있을 내 멘티도 몰랐다.
"앉아!"
"…!?"
멍냥이(개, 고양이)도 아니고, 규리누나가 마치 이누야샤에 나오는 가영이가 된 마냥 나를 맘대로 부려먹고 있었다.
웃기는 건, 그녀의 말을 한 톨도 거절하지 않은 채, 어느샌가 신동형이 앉아야 할 자리에 내가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신동형이 마지막으로 먹었던 그 도넛츠가 크게 한 건 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