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화 (240/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서른 두 번째 과외 - Bo peep Bo peep 2

"헤헤, 왔네?"

그저 들리는 내 발자국 소리에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큐리누나였다. 여기가 자신의 숙소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마냥 편한 옷차림으로 대기를 타고 있었나보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큐리누나는 내게 '문 잠궈'라는 말만 하고, 자신의 방으로 쫓기듯 뛰어갔다. 

"흠, 잡지네?"

그녀는 내가 오기 전까지 외로움을 떨쳐내려고 잡지를 읽고 있었나보다.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패션잡지와 현재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나오는 패션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면 쉽게 그렇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겨울을 히트할만한 애니멀프린트룩에 대하여, 몇 가지를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첫째, 애니멀프린트룩은 도트룩의 연장선에 있는 패션룩 중 하나로써…]

큐리누나가 읽다 말았던 잡지를 대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어차피 패션잡지라고 해도, 레이디경향같이 여성적인 성격이 짙은 잡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심플한 스튜디오 배경에 무심한 듯 서있는 모델들의 복장과 그 옆에 조그맣게 설명이 되어있는 글들을 보며, 큐리누나가 나오기까지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 읽어내려갔다.

[이 곳은 명동 길거리. 명동 길거리 속 패션 트렌디스트를 찾고 있었던 저희 매거진 편집자들은 갓 사회에 들어선 듯한 모습의 남자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때맞춰서 와이드한 텔레비전을 통해 나오는 하이데피니션(HD)급 화질의 패션전문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길이 익숙하게 보이는 것이, 리포터가 소개하는 대로 명동 길거리를 촬영한 듯 싶었다.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캐치해 낸 한 남자는 머리를 짧게 쳤지만 꽤나 준수한 외모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반전몸매라는 말이 있듯이, 흡사 그의 맵시는 해골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빼빼 말랐다.

[자기 소개 해주세요-.]

[아, 제…제 이름은 이기룡이구요, 스물 한 살…평범한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방송출연은 한 번도 경험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마냥 목소리가 무척 떨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소녀들을 내 블루레이급 동공에 담아서 찍어내고 있을 때도 그 느낌이었지.

오죽하면, 그 때 태연이와 윤아의 비쥬얼을 보고 들고있던 짐을 땅바닥으로 후려치는 과감함을 선보였을까.

지금은 기피대상 1호와 2호지만 말이다. 요즘따라 유난히 체력이 약해져 보약을 수시로 챙겨먹고 있는데, 그 약효를 모조리 드레인해가는 아녀자 중 한 두명이 바로 그 년들이었다. 흐으…질긴 냔.

"가자!"

"…어? 응."

잡생각을 꾸준히 하며, 티비 프로그램을 유심히 시청하고 있을 때 쯤, 자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큐리누나가 이 쪽으로 활발한 모습으로 걸어오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티비 프로그램에 집중하느라, 잠시동안 그녀가 외친 소리를 못 들었으나, 이윽고 내 어깨에 올려진 그녀의 손에 의해 티비에 놓아버린 넋을 다시 챙겨왔다.

"…호피네?"

"응, 나 이런 무늬 좋아하거든. 그것도 무지무지-."

겉은 영락없는 도도한 성격을 소유한 여자인데, 속알맹이는 한없이 부드럽고 애교가 넘치는 이큐리라니. 조금은 아이러닉했다.

"누나, 어딜로 갈 예정이야?"

"오늘은 홍대? 전에 들렸던 샵이 신상 들어왔다고 해서 기왕 가는 김에 겸사겸사 홍대구경 좀 하구. 어때?"

쇼핑한다는 게 좀 지루한 어감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홍대 구경을 한다는 생각에 괜스레 들떠버렸다.

"오케이, 누나가 말한 거 그대로 받고, 노래방 콜?"

"…노래방? 노래방은 왜?"

"지겹도록 들은 노래 못 한다는 소리. 적어도 누나보다는 잘 부른다는 것을 인정 받아야 될 것 같아서."

"……풉, 너 나보다 노래 못하는 거 맞잖아?"

"…낄낄, 지금 마음껏 웃어둬. 조금이나마 노래 실력이 늘어났으니, 누나보단 잘 부를테니까."

노래실력에 관해서는 피차일반인 두 사람이 노래방에서 노래 배틀이라니. 참 가관이었다.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심판할 재량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문제는 그런 잉여스러운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지금 당장 없다는 것이였다.

"근데 누구 보고 판단하라고 하지?"

"기계는 괜히 있니? 기계가 기계니까 가장 정확할 거야."

그 기계에 점수 매기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 노래방 주인인 건, 아직 누나는 모르나?

그렇다면, 이번 게임이 불안하다 싶으면 노래방 주인 아저씨 혹은 아줌마를 먼저 매수하는 쪽이 승리의 주먹을 불끈 쥘 수 있겠군.

"그럼 노래방 먼저? 가게 먼저?"

"차라리 노래방에서 정정당당하게 실력 대결해서 진 사람이 신상 사주는 거, 콜?"

"오케이."

나라고 패션에 관심이 없을 줄 아나. 이미 집에서 구독하는 패션잡지로 최근 사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로 적어놓고 사고 있는데. 여기서 이기면, 돈도 굳고 참 좋구만.

큐리누나를 노래로써 이기는 것은, 이제는 적어도 누우며 떡 먹기 보다 더 쉬운 경우라고 판단했다.

"문 잠궜지?"

"우리 숙소 하루 이틀 와봐? 자동잠금이야."

아주 대단한 자동잠금장치 납시셨다, 그죠? 

밝으면서 단조로운 8비트 멜로디가 내 귀에 딱딱하게 스며들었다. 문이 철컥 소리를 절로 내는 것을 보아하니, 큐리누나의 말대로 자동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층 눌러? 아니면 지하층 눌러?"

"1층 눌러. 오늘은 오토바이 안 끌고 왔어, 기름 안 넣어서…"

큐리누나는 약간은 실망한 듯 눈 끝이 아래로 기울어진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쌩쌩 바람을 맞으며, 도로 위를 질주하는 청량감과 스릴을 느끼고 싶었나 본데.

아쉽게도, 오토바이는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일본 제품이라서 그런 지, 수리에 필요한 기관들을 일본에서 직수입해서 구해야한다고 말한 수리업체였고, 벌써 맡긴 지는 3~4일이 넘었다.

"그럼 택시 타야되나?"

"어쩔 수 없잖아? 괜히 사람 많은 버스나 지하철 타서 뜨거운 감자 될 일 있어?"

"…그럼 돈은 니가 내는거지?"

"뭔 소리, 더치페이. 반반 나눠야지, 나 오늘 카드 안 들고 왔어, 현찰도 이 만큼 밖에 없어."

못 믿을 표정의 그녀를 위해, 나는 성심껏 나의 지갑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카드라고는, 갖가지 잔망스러운 적립카드와 중앙대 학생임을 인증하는 학생증과 민증, 오토바이 운전 면허증이 전부.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의 현찰 몇 장을 짚고는 실망한 눈치를 지었다. 와, 돈이 있었으면 도대체 얼마짜리를 사달라고 했을 지. 돈은 많았지만, 눈 앞이 아찔했다.

'…사실, 크레딧 카드는 점퍼 안주머니에 있지롱.'

일종의 깜짝 이벤트랄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격 한도 안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안주머니에 있는 이 카드를 꺼내서 그녀를 위해 써줄 예정이었다.

"택시비 어느정도 나오려나?"

"전에 여기서 은정이랑 홍대 간 적 있는데, 그 때 만원정도 나왔나? 안 막히면 만원?"

"흠, 오늘은 평일이고 하니, 별로 안 막히겠네. 그럼 누나가 택시 잡아."

말하기가 무섭게, 택시 정류장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거침없이 택시의 문을 여는 큐리누나였다.

살짝 당황은 했지만, 그 기색을 감추고 큐리누나가 잡은 택시에 타려고 몇 걸음을 더 걷고, 편하게 택시 안에 안착했다.

"아저씨! 홍대입구역으로 가주세요!"

기분이 들뜬듯, 아주 하늘을 날아버릴 것 같이 목소리가 방방 뜬 큐리누나의 말에 택시기사 아저씨는 잠궈놓았던 브레이크를 풀고, 빛이 바랜 갈색 구두로 액셀레이터를 천천히 밟기 시작했다.

앞유리로 보이는 바깥세상이 조금씩 다가오며 변해갔다.

+

"우선 노래방 먼저 가기로 했으니까, 노래방 갈래?"

"생각해보니까,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내가 자주 가는 요 앞 카페에서 런치세트 있거든. 그거 먹고 생각해보자."

"응."

아까의 반응과는 달리, 노래방보다 카페를 우선시하며 말하는 큐리누나의 말에 아쉽긴 했지만, 이제 노래 실력으로는 언제든지 큐리누나를 이길 수 있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겼으니 그리 상관은 없었다.

홍대입구역에서 천천히 걸어가자, 오랜만에 보는 홍대거리가 눈 앞에 마주했다. 그냥, 노래방 말고 오랜만에 인디밴드 구경이나 해볼까.

"여기야."

"응? 여기는?"

손으로 그린듯한 간판에는 정확히 '몽마르뜨 언덕 위 은하수다방' 이라고 적혀있었다.

필시, 엠피쓰리플레이어로 자주 듣던 인디밴드 음악 중 하나인, '10cm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의 배경이 된 그 카페였을 것이다. 귀로만 듣던 곳이, 눈 앞에 담겨지니 묘한 분위기가 얼핏 들었다.

"너도 대충은 아나보네? 노래로 들었지?"

"응, 여기 처음 와보는데. 기분 묘하다…"

"나는 십센치가 이 노래 내기 전부터 은정이랑 자주 와봤던 데라서, 아마 너랑은 조금은 다른 묘한 기분을 느꼈었다?"

내 기분과는 상반되는 그녀가 느낀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까?

내 기분은 드라마에서 보던 웅장한 건물들을 눈 앞에 마주했을 때,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막 들고 있는데. 그녀가 느끼는 기분은 자주 가던 곳이 티비 안으로 담겨졌을 때 느껴지는 그 기분일 것이다.

"일단 들어가자."

"응."

큐리누나가 이끌어주며 들어간 그 곳은, 여타 홍대 카페와 다를 바 없는 소담스럽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작년 프랑스 파리의 카페와는 조금씩 다른 분위기랄까. 아늑한 카페 안에는 양초 조명도 조그맣게 나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고, 한 쪽으로는 사진으로만 보던 LP판이 책장 안에 정리되어 있는 채로, 복고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뭐 먹을래?"

"나는 케이크 잘 안 먹어봐서. 누나가 적당히 시켜줄래?"

"알았어, 그 대신 딴 소리 하기 없기다? …흠, 어디보자아…"

큐리누나는 메뉴판을 골똘히 쳐다보면서 무슨 메뉴를 고를 지 유심히 고민 중에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평소에 즐겨먹는 디저트들이 있었기에, 큐리누나는 그 모습을 여러번 지켜봐서 그런 지 내가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고민하는 듯 싶었다.

내 말이 맞으면, 큐리누나는 은근히 배려심 깊은 여자고, 아니면 우연의 일치고.

"근데, 은근히 카페 분위기보단 다방 분위기가 풍긴다."

"그러니까 은하수다방이잖아. 흠, 이거 먹을래?"

자세히 은하수다방을 훑어보니, 살짝씩은 보통 카페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약간 벽면에서 허름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카페명처럼 다방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리고 엘피판 옆에 있는 디제이박스를 보니, 작년에 봤던 시라노 연애 조작단의 그 카페가 떠올랐다.

여튼 감상은 그만두고, 큐리누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메뉴를 보니 꽤나 달달해보이는 게 침이 절로 고였다. 시카가 자꾸 아이스크림 만들어달라고 해서 그런가, 자주 만드니까 단 것에 입맛이 당기네.

정작 만들어주기만 하고, 먹질 못했으니….

"그래, 그거 먹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