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5/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스물 일곱 번째 과외 - Pink Eyedrop 2

성급한 내 생각이었던 걸까. 그녀들은 분명 전처럼 나를 대해줄 것이고, 자기들의 할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일 뿐.

다만 내가 이렇게 단번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묵직한 무언가가 모두의 어깨를 누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 갈색빛 생머리를 찰랑거리는 수연이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으로 내 귀를 감싸며 속닥거렸다.

"…민식아, 오랜만에 와서 진짜 좋은 데…지금 파니가…"

"응? 파니가 왜?"

항상 밝은 모습, 누구보다도 더 눈부신 미소를 보여주던 그녀가 무슨 일이 생겼길래, 소녀시대 숙소 전체의 분위기를 검푸르게 침울한 분위기로 만드는 걸까.

지금의 분위기와는 약간은 아이러닉한 '파니의 방'이라고 써져있는 핑크색 간판을 보고는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당겨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약간은 경직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방 전체가 유치한 분홍빛 천국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그녀는 자신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녀의 몸집만한 토끼인형을 품에 껴안고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말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저 목걸이, 가끔 가다가 그녀가 차고 다니는 목걸이였는데. 특히, 일본에서 말이다. 일본에서 내내 차고 있었던 목걸이.

"…어? 민식이네…헤헤…오랜만이야…"

커버가 열린 목걸이를 슬픈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인기척을 느꼈는 지 고개를 들어올리는 그녀.

그리고 묵묵히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발견했는 지, 애써 슬픈 것을 급히 감추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내며 나를 반겼지만 눈가엔 슬픔이 반짝거리며 고여있었다.

평소같으면, 저렇게 재미없게 반응하기는 커녕 '민식아-! 왠 일이야아…?'라고 말하면서 빙구 웃음을 연신 지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파니는 발랄한 모습은 이미 마음 속 한 곳에 가둔 채, 무미건조한 표정과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표정은 몰라도 목소리는 깊은 강물에 젖어버린 듯 촉촉했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 지, 도저히 지금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치만 그녀의 슬픔을 위로하는 게 우선순위라고 생각했기에, 말없이 몇 걸음을 더 걸어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

예견된 침묵. 아무래도 쉽게 꺼낼 수는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런 감정, 한 두 번 느낀 게 아니었으니까. 내 진심, 이라는 것을 털어내는 것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만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있는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슬퍼서는 안 된다. 그녀와 나, 단 둘만이 있는 이상, 상대를 진심으로 대해야했다. 그게 나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물론 남자도 예외가 아니다.

애초에 그녀를 편안하게 위로해주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방금 들어와서 벌겋게 시린 귀의 감각은 스스로 무뎌지게 한 채,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왜 그래, 파니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거야?"

"…민식아."

여태까지 울음을 참은 듯, 그녀의 눈가엔 어느새 희맑은 슬픔뭉치가 한 가득 엉켜지며 빛나있었다. 그녀의 눈가를 보자, 가슴 한 켠이 괜스레 먹먹해졌다.

"그래, 말 해봐. 괜찮아, 나한테 말하는 건데."

"……"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너무나도 슬픈 파니의 모습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대신 말로써의 위로를 그만두고, 더 편안하게 그녀의 여린 몸을 따뜻하게 보듬어주었다.

슬픔에 말라가 푸석푸석한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그녀를 꼬옥 안았다. 그녀의 미세한 떨림이 내 몸으로 자그맣게 전해졌다.

"…괜찮아. 말 해도 되니까…혼자 아파하지마…내가 있잖아…"

"…흑…이런 거…이제 익숙해질 때도 됬는데…"

흐느끼는 소리조차 없이, 파니는 아무도 모르도록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나를 고모네 집에 맡겨두고 미국으로 덩그러니 떠나버렸을 때, 분명 안 울고 웃는 모습으로 한국에 남겠다고 다짐했지만, 떠난 당일만큼은 이불에 온 몸을 가린 채, 그 속에서 펑펑 눈물이 흘렸던 기억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멈출 때까지, 그녀를 꼬옥 안고 있는 채로 아련했던 전 추억을 떠올릴 뻔해서 나조차 눈물을 흘릴 뻔 했지만 말이다

차츰 그녀의 떨림이 사라져갈 때 쯤, 품에서 파니를 떼어내고는 조금씩 훌쩍거리는 파니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냈다.

"…왜 그래 파니야?"

실례겠지만, 벌써 두 번째로 물어보는 말. 이렇게 물어도 괜찮으려나 싶었다.

그렇다고 쉽게 입을 열면서 이유를 말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저 눈물을 멈추려고 억지로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

그래도 울먹거리면서 말하기는 싫단건지, 애써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은근히 귀여워보였다. 할 수 없이 그저 입을 꾸욱 다문 채, 파니가 입을 열어 진실을 고백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는 나였다.

"민식아."

"응?"

"부탁이 있는데…"

울음을 이제야 멈춘 그녀의 첫 마디. 그래도 여운은 아직 그녀의 말에서 묻어나와있었다. 

부탁, 그녀는 무슨 부탁을 들어달라는 걸까.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봐서는 누구나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은 아닌 듯 보였다.

"나랑 어디 좀 갈래?"

아마도, 자신을 억죄어오는 이 슬픔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일까. 일종의 일탈?

나도 답답한 일이 생길 때는 혼자 술을 마시면서 소리를 지르거나, 때로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뻥 뚫린 한강대로를 달리곤 하는데.

"어디?"

"…그냥…물어보지 말고…같이 가줘…"

장난으로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도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는 지, 다시 눈물이 고이려고 했지만 스스로 참아내고 있는 듯 눈시울이 발갛게 물들어버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조그맣게 끄덕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 침대 위에 앉아서 서글픈 감정을 추스리려 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직 추스리지 못한 채, 내 얼굴을 보며 내 손을 힘겹게 잡았다.

"…밖에서 기다려줄래?"

"알았어."

아무래도 잠옷 차림으로는 그녀 스스로도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 지, 등을 돌리며 말하는 그녀였다.

나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말을 하고는, 닫혀있었던 방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물밀려오듯 쏟아져 넘어지는 소녀들(?)

"…으으으…"

"…아악…숨 막혀…"

참, 기가 막힌다. 여태까지 파니와 내가 하는 대화를 모조리 엿들었단 말야? 만약 다른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낙석주의가 아니라, 낙소녀주의라고 파니의 방문 앞에다 표지판을 붙여야하나.

"…아우…뒷 목이야…"

그녀들은, 그녀들 나름대로 뻘쭘한 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내 시선을 여러 방법으로 피하고 있었다.

아예 등 돌린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물을 마시러 가는 유리.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로 달리는 써니, 이실직고하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서현이.

언제 갔는 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티비 앞으로 달려가 리모콘을 잡고 있는 효연이와 윤아.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피하는 수영이. 아직까지 고통의 여운이 남아있는 지 뒷목을 스스로 잡고 일어나는 제시카.

곧바로 시카와 눈이 마주치긴 하지만, 비밀로 해두는 것이 있는 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바로 시선을 돌리는 시카였다.

"야."

"……"

어쭈, 언제는 둘도 없는 내 사랑이라면서 갖은 앙탈과 아양을 부리더니. 

"시카야?"

"……"

지가 좋아하는 애칭을 불러줘도 모른 척이라니, 포커페이스가 위엄이 넘치는구나. 얼음공주처럼 대놓고 씹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알고있어서, 날 눈치보며 모른 척 하고 있는 게 좀 모양새가 웃겼다.

"우리 시카…?"

"…헤헤, 네?"

헐, 이제는 시카로도 모자라서 앞에 '우리'라는 말까지 붙여줘야하나. 아니면 소녀시대 숙소와 자신을 제외한 소녀시대 8명이 있는 곳에서 정수연, 자기 자신이 나의 소유임을 인증하고 싶은건가.

도대체, 여자라는 성별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우리래, 헤헤…"

아직도 소유의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그녀였다. 그것보다도 더 신경쓰이는 것은 당연지사 나머지 여덟 명의 소녀들.

파니는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못 들었다고 쳐도, 다른 일곱명은 분명히 들었지 아니한가.

모든 소녀들이 도끼눈을 만들고는 나를 째려보는 것으로 봐서는 100% 두고보자는 눈빛이 확실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였던만큼, 더 이상의 봉기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들이였다.

"파니 왜 저래?"

나는 조용히 내 옆에 있는 시카에게 귓속말로 오늘따라 파니가 저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단지, 누군가와 싸워서라서 그렇다면 저렇게 굴기까지는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파니와 싸운 멤버도 없는 듯 보였고.

"……같이 가보면 알아…"

시카까지 이런 말을? 다른 소녀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시카와 별 다를 게 없이 같이 가보면 안다는 식의 눈빛을 내게 암묵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난 더 이상 파니에 대해서 묻지 않기로 하고, 그저 파니가 저 잠긴 방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가자, 민식아."

마침내, 닫혀있었던 그녀의 방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분홍색 오리털 점퍼를 걸친 파니가 고개를 숙인 채 나오며 내게 말했다.

눈치상, 손은 바깥으로 나간 뒤 잡아주기로 하고 그녀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기로 했다.

"파니랑 어디 갔다 올게."

"응, 조심해서 갔다와."

태연이를 필두로, 모두 현관으로 우르르 모여 파니와 나를 배웅해주고는, 우리가 엘레베이터를 탈 때까지 그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지하 2층입니다.]

엘레베이터의 기계음과 함께 스르륵 열리는 문 밖으로 빠져나온 우리 둘은, 오토바이(저번에 놀러갈 때, 술 먹어서 그냥 숙소 주차장에 두고 갔었음)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파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오토바이를 발견할 수 있었고, 걸려있는 헬멧 중 분홍색 헬멧을 그녀의 머리에 직접 씌워주고는 내 헬멧도 스스로 썼다.

그리고 천천히 시동을 걸고서, 천천히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두 팔로 내 허리 꽉 잡아."

"응…."

파니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팔을 내 허리에 두르고는 놓치 않으려는 듯 약간 답답하게 감싸안았다.

그래도 버틸만 했기에, 난 파니의 손깍지를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다시 오토바이 핸들을 잡고는 주행속도를 지키며 달렸다.

+

"여기가 어디야…?"

그녀의 지시에 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한 납골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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