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3화 (234/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스물 여섯 번째 과외 - Pink Eyedrop 1

"뭐라고? 나오라고?"

[나도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줄 아냐, 4학년 애들이 두 세명이나 왔댄다. 3학년도 비율 맞춰야줘야 되서, 너하고 나도 가야 돼.]

작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는 나오는 기척도 없었던 동기들이 이번 오리엔테이션 때 나온다고?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다.

작년에는 제대 때문에 복학하는 입장에다가,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도 얼굴도장을 찍었던 터라, 하는 수 없이 눈 딱 감고 나갔는데.

게으른 08학번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저러는 지.

"몇 신데?"

[아직은…여유있네, 오후 1시 쯤에 나와.]

"알았어, 끊어."

전화를 끊고 벽시계로 시간을 간단히 확인했다. 시계침은 점점 우하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은 두 시간 쯤 여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풋풋한 11학번 애들을 보는 자리인 만큼, 치즈인더트랩에 나오는 유정같은 선배가 될 필요가 있었다.

외모는 자찬하기 그렇지만, 어느정도는 되는 것 같고. 그 덕분에 옷빨도 먹히고, 옳지 못한 행위를 매일 하게 만드는 소녀들 때문에 몸관리는 따로 할 필요가 없었고.

"티아라 숙소가 중앙대랑 가까웠지…흠, 것보다 오랜만에 카페나 가볼까."

친구의 말대로 시간은 아직 두 시간정도 여유가 있었고, 준비하느라 30분을 썼으니 학교 근처에 가서 잠시 쉬다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듯 싶었다.

정 혼자서 커피 마시는 게 심심하면 친구놈 불러서 같이 마시며 잡담을 해도 되고, 어차피 그 카페에 가면 아는 누나 투성이일테니.

"흠, 가볼까나."

오랜만에 선물받은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어보았다. 역시나, 여전히 잘 돌아가는 나의 애마.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바퀴는 제자리에서 몇 번 돌다가, 천천히 앞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안전을 위하기보단, 준법정신에 의거하여 쓰는 헬멧(벌칙금 안 물으려고 쓴다)을 오토바이 손잡이부분에 걸어놓고, 오토바이의 키를 빼고는 카페를 향해 들어갔다.

여전히 익숙한 향의 커피냄새하며, 솔솔 풍기며 침을 고이게 하는 도너츠 냄새가 나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어서오세…어? 웬일이야?"

"곧 신입생 오티 있잖아, 그래서 나온거야. 누나 외모는 아직 여전하네."

도너츠를 만들면서, 동시에 카운터 일까지 하고있는 유진누나는 형식상으로 나를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한듯이 인사를 하다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곧바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도 빨리 간다. 니 일 그만 둔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네 달이 지났네."

"…그런가?"

유진누나가 몇 개월 전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말에, 나도 그 때의 일을 회상해보았다.

비록 남자들에 한해서 응큼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사장이 좀 짜증나긴 했지만, 그 외에 여기서 노동을 한 것에 대한 기억은 추억이 되었으니까.

"무슨 일이야…어? 이 자식!"

아직까지 일하는 세 여자 중에서도, 제일 키가 큰 유진누나도 이렇게 반가워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때리려고 하지는 않는데.

제일 키 작은 민정누나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콩콩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고, 주먹을 내 머리에 쥐어박았다.

"아, 스트레th!!"

"치사하게 너는 연락을 왜 한 번도 안 하냐? 엉?"

"내가 누나한테 연락을 왜 해…가 아니라, 카톡으로 가끔씩 했잖아!"

"그게 연락이냐? 적어도 연락이라는 건 말이야, 입으로 좀 나불대줘야 연락이지. 얍삽빠르게 엄지손가락 놀리는 건 연락이 아니야."

무슨 엉뚱한 정의인가 싶다. 세상에 이런 정의는 엉뚱하고 황당한 일들도 다 기록되있는 위키백과를 찾아봐도 없을 듯 싶다.

"으휴, 민정아 그만 좀 해라. 얘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으니까, 딴 카페 안 가고 여기 왔겠지."

"유진누나가 잘 아네. 어, 근데 사랑씨는 어디 갔어…? 그만 뒀나…"

"저, 여기 있어요!"

같이 일할 때는 두 누나 모두가 얄밉긴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나마 유진누나가 더 어른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에 비해서 '연락'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정의를 내리는 민정누나는…에휴…누가 데리고 사나.

여튼 두 여자를 번갈아보며, 대화의 꽃을 열심히 피우다가 내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 전에 이주일 정도 같이 일했던 한 아르바이트생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김사랑이었었나. 머리도 청순함이 적당하게 느껴질만큼의 길이였고, 마스크도 꽤나 남자들이 작업을 많이 걸었을 것 같은 모습이였는데. 물론 나는 더 늘리고 싶지는 않은 처지라서, 딱히 관심은 없다만.

이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주방 쪽에서 설거지를 하는 소리와 함께 상큼발랄한 하이톤인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직 일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이에요. 전 민식씨 번호 몰라서 연락도 못 했는데."

"아, 죄송해서 어쩌지…지금이라도 알려드릴까요."

"알려주면 저야 고맙죠, 여기 핸드폰이요."

그녀가 내게 건네 준 핸드폰의 전화 버튼을 켜서 내 번호를 찍어주고는 다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사랑씨는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유니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고무장갑을 다시 끼고는 설거지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랑씨만 설거지 해?"

"아니, 돌아가면서 하는 거야. 오늘은 사랑이가 설거지하는 날이고. 그치, 사랑아?"

"네, 유진이 말이 맞아요! 어제 민정이가 하고, 오늘은 제가 하는 거에요!"

"아, 그래요?"

후아, 나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는 모습을 가끔 가다 보여서 문제다. 더군다나 말투가 거의 사랑씨를 옹호하는 쪽에 가까웠으니, 더 오랫동안 같이 일한 그녀들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게 될 터.

대화의 꽃은 이제 지게 내비두고, 원래 목적이 커피를 마시러 온 것이였으니 커피를 시켜야겠다.

"내가 항상 먹던 커피랑, 항상 먹던 도넛 줘."

"알았어, 저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려."

훗, 주문하는 말투가 조금은 차도남 같았으려나, 아니면 까도남? 같은 이야기는 쓸데없는 망언에 불과하고, 테이블에 앉은 채, 조금이라도 바뀐 분위기가 있나 유심히 살폈다.

"자, 여기."

"후훗, 잘 먹을…엥…? 커피, 도넛츠 먹던 걸 주면 어떡해? 선불까지 했는데."

"니가 항상 먹던 커피랑 도넛 달라며. 너, 우리가 먹다가 남은 것만 거지처럼 줏어먹었잖아."

아놔, 기억력 한 번 야무지네. 유진누나가 얄밉지 않다는 말은 진짜로 취소다.

지금 유진누나에게서 느껴지는 배신감은,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면서 내 셔츠에 따뜻한 토사물을 쏟아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장난치지 말고, 정상적인 걸 줘…"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하지,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저 누나가 진짜…사람 잘 대해주는 척하면서 놀리는 건 천재다. 솔직히 놀리는 걸로 따지면, 저 누나는 이미 초딩들의 개념탑재수준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아무래도 저 누나가 초딩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에 대해 연설을 한 번 했다면, 초통령 되기 쉽상일꺼다.

+

"자, 여기 드세요."

"고맙습니다, 사랑씨."

항상 친하게 지내야 이익이 뒤따른다고 하던데, 오히려 덜 친한 것이 이렇게 이익이 따를 줄이야.

친하게 지내다가 보기좋게 골탕먹은 케이스가 바로 이 카페에서 생겨났고, 덜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 카페에서가 처음이었다.

"근데 사랑씨는 왜 저한테 말 안 놓으세요? 제가 알기론, 사랑씨가 두 살 더 많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헤, 그게…민식씨가 불편해하실까봐 일부러 안 놓는거예요."

어쩜 이렇게 마음씨까지 야무지게 착할까. 이런 천사같은 아르바이트생이 저 악마같은 두 누나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같이 굴렀던 알바생의 입장으로서, 많이 안쓰러웠다.

아, 아무래도 피로회복제를 약국에서 구입해서 힘내라는 차원에서 사랑씨에게 까스박명수를 줘야할 것 같았다.

"전 괜찮아요. 말 놓으세요."

"…히힛, 그럼 말 놓을까요…민식아?"

말 놓는 게 오히려 보기가 좋고, 잘 어울리네, 귀엽기도 하고. 음, 이제 나도 사랑누나라고 호칭을 바꿔야 하나.

어쨌든, 사랑누나는 두 여악마에게 잡혀 또 다시 일을 하는 듯 싶었으나,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의외로 손님이 뜸한 바람에 오히려 스텝 인원 수에서 잉여인원이 생겼다.

그 덕분에 나는 사랑누나와 더 친해질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사랑누나는 다른 두 누나들과는 달리 나를 엿먹이는 캐릭터는 아니었고, 정 비유하자면 '지붕뚫고 하이킥'에 나오는 신세경 같은 참한 성격이랄까나.

"잘 먹었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또 들를게-."

"…민식아, 잘 가-."

"잘 가라. 연락 해?"

"개강하면 또 와-. 맨날 와-. 또 일 하렴."

진심을 담아서 하는 손인사와 입인사. 세 여직원분들 께서 친히 나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하는 것으로 봐서는 조금이나마 감동과 여운이 남아있었다.

"일은 안 할거거든? 님들 엿먹이는 생각만 골똘히 하고 있을거니 긴장이나 타."

하지만 그 감동과 여운의 흐름이 날 놀리기에 바쁜 유진누나 때문에 보기좋게 끊어져버리긴 했지만.

"베에, 겁 안나지롱." 

역시나 유진누나는 놀리는 것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

+

"서연지, 졸업반이냐?"

"아니, 지금 휴학해서 나도 잘 모르겠다."

파릇파릇한 11학번을 비롯하여, 바닥에 눌러붙을 기세의 체력고자인 08학번까지의 이름표와 얼굴을 천천히 보다가, 뭔가 느껴지는 찝찝함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원래 이런 일을 도맡아하는 친구놈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순 없었다.

"1학년 명단 중에 얘네, 누구누구야. 김지호, 김자호?"

한 명으로서도 충분히 수업하기 벅찬 것을 내가 무슨 자신감이 있다고. 

+

"오랜만에 놀러가볼까."

내가 길을 어디서부터 잘못 들었는 지 모르겠지만, 이 곳은 티아라 숙소보단 소녀시대 숙소가 더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 지.

무언가 조종당하면서도 안 좋을 것 같은 느낌이 확 드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발걸음은 이미 오토바이에 내린 채였고, 약간은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얼굴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얘들아…오랜만이야…어? 분위기 왜 이래."

정말 소녀시대 숙소에 온 것은 무지하게 오랜만. 들어오자마자 갑작스럽게 이런 구도에 당황한 건 나였다.

분명히 엔돌핀이 훨훨 흘러넘쳐, 기분이 신명나야 할 그녀들이 모두 시체에 빙의한 것 같이 메마른 표정과 메마른 감정으로 그들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