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9/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백 일흔 한 번째 과외 - 이것만은 알고 가 (Before U Go) 上 

‘뒹구르르-. 뒹구르르-.’

지은이에게 정력을 드레인 당한 지 어언 하루 쯤 지났을까, 2010년도 이제 겨우 9일 밖에 남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데에 쓸 정력은 이미 지은이가 드레인 했으니, 성인으로서의 막중한 의미를 가지는 육체적 행위를 하고 싶은 마음은 싹 사라졌고.

그 대신 할 게 없어 심심한 분위기가 내 마음을 꽉 채웠다.

“아우, 다른 애들 다 스케쥴 가서 심심하지만 카라 애들은 없다고 하니까 카라 숙소나 오랜만에 놀러가야지.”

이제는 각 그룹의 스케쥴마저 줄줄 꿰고 있다. 그 이유는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그녀들이 보내는 문자메세지 때문에도 있지만,

덕분에 잔근육 대신 손가락이 어렴풋이 두꺼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그리 눈에 띄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숙소를-. 조심스럽게 내딛어요-.”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고 숙소로 걸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감정은 충만했다.

촐싹맞게 6/8박자로 계단을 내려가며 숙소에 도착하면 날 반겨줄 카라 애들을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헤이, 오랜만!”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내가 올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견이라도 한 건지, 활짝 열려져있는 문에 흡족해하며 미국식인사를 그녀들에게 띄웠다.

“...?”

하지만 숙소 안에 들어서자마자 꽤나 침울한 분위기가 내 어깨를 꾸욱 눌러댔다.

젠장, 지은이 사건을 끝낸 지 얼마나 됬다고 분위기가 그 때만큼 암울하냐. 그냥 없는 사람인 척 하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게 내가 속 편할 것 같았다.

“아.. 민식이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타이밍 돋네. 

소리없이 지나가는 바람마냥 숙소에서 떠나려고 했건만, 마찬가지로 우울한 표정을 짓는 규리누나의 레이더망에 걸리고 말았다.

“뭐야.. 분위기 왜 그래..?”

그냥 가기엔 그른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축 처진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가야할 것 같은 막심한 의무감이 들었다.

“그게.. 아.. 하라 할머니가 위독하시대.”

그래서 이렇게 분위기가 무참히 가라앉아있었던구나. 그럼 스케쥴 상 문제가 있더라도 내려가서 뵈어야 할 텐데.

“어..? 그럼 빨리 가봐야지.”

“아, 근데 사정이 조금..”

그 사정이 무엇이길래 지금 당장이라도 급한 문제를 해결하러 광주로 가려고 하지 않고, 여기서 가만히 우울감을 입에 넣고 씹고 있는 거야.

나의 머리카락의 끝이 이마에 드러난 힘줄로 인해 살짝 갈라졌다.

“뭔데?”

“하라 할머니가 하라 남자친구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시는 데, 남자친구 있다고 말했거든.”

남자친구. 연애 관계에 있는 남자를 지칭해서 말하는 단어가 아닌가.

근데 하라는 지 입으로 자기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하며 날 노려보지 않았던가.

“근데 실은 없잖아.”

“그런데?”

“마지막으로 보고싶다고 하시는 데.. 그런 상황이야.”

참으로 하라에게 닥친 상황이 가여웠다. 어서 빨리 할머니에게 가서 병문안을 해야되는 데,

정작 하라는 자신이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했고, 만약에 없다는 사실이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하라의 할머니는 가뜩이나 상태가 위독하신 데, 

하라는 그녀에게 더욱 더 실망감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갑자기 내 머리가 그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떻게 해야할 지 결정을 내렸다.

“그럼.. 내가 가면 되잖아.”

하지만 그 결정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그녀들에게 내뱉었다. 너무 간단하게 내뱉으면 그녀들의 입장도 좀 그러하므로.

“응?”

조심스럽게 말해보았지만, 역시나 멤버들의 눈은 꽤나 휘둥그레해져있었다. 특히 하라가 더욱.

“미..민식아..”

“오빠아..”

각기 나를 부르는 말은 달랐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상통했다.

“같이 가자, 하라야.”

나의 말에 하라를 포함해 니콜이도, 지영이도, 승연누나도, 규리누나도 모두 눈빛이 흔들렸다.

하라는 그렇다 치지만, 다른 분들은 왜 흔들리는 지 모르겠네.

“뭐, 지금 당장 남친대역을 해줄 사람을 잡아 놓을 순 없는 노릇이고, 급한 상황이니까 내가 하는 수 밖에 없잖아.”

“...”

그녀들은 일단은 아무 대답을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의 말에 수긍만 할 뿐 이었다.

근데 너무 조용해서 그런 지, 정작 그녀들은 남친 대역으로 내가 적당하지 않은 가 보다.

“하라야,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하라였으므로, 하라에게 다가가 하라의 의사를 물어보자,

하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니 울고 있었는 지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여있었다.

“흐아앙-. 아니야-. 오빠.. 흐흑.. 고마워..”

하라는 내 품에 안긴 채로 몇 분간을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이것도 연기가 아닌 진정한 감정, 그 눈물에 또 다시 심장을 망치로 때린 듯 요동쳤다.

“언니, 니콜아-. 지영아-. 우리 갔다올게.”

“응, 하라야 몸조리 잘하고 민식이 너는 옆에서 하라랑 잘 있어줘야돼?”

영악한 스마트폰으로 이미 광주행 고속버스는 예약해놓은 상태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만큼, 하라는 긴 머리를 털모자로 감싸고 튀지 않는 네이비색 목도리로 목을 칭칭 감았다.

하지만 패딩 점퍼에서 노란 빛이 울긋불긋 새어나와서 확 튀었다.

“내 곁에 있는 이상 걱정마. 그럼 갔다올게.”

오글오글거려서 쪼그라드는 손가락을 애써 무시하고, 승연누나의 걱정을 뒤로 하고 우리는 점점 아파트와 거리를 벌렸다.

“표 좀 보여주시겠어요?”

‘쓰윽-.’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 정차해있는 버스 안에서 직원은 우리에게 표를 보여달라는 부탁을 했고,

나는 표 대신 스마트폰에 찍혀있는 디지털형식으로 되어있는 표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위적일지도 모르는 미소를 지으며 버스 안으로 우리를 들이는 직원이었다.

맨 끝의 다섯 자리가 있는 곳에서 앞, 아니 좀 더 앞에 있는 두 좌석에 우리는 몸을 뉘였다.

“하라구가 앵간히 울었어야 했는 데, 눈이 퉁퉁 부었네, 부었어.”

하라만의 특유의 애교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울그락불그락 붉은 빛이 띄는 것을 보니, 눈이 부었나보다.

나는 기분을 풀어주려고 그녀의 눈 밑을 툭툭 찔러보았다.

“치잇, 부은 거 아니야. 눈 밑에 분칠 좀 한 거야.”

“그렇게 울어도 농담할 여유는 있나보네-.”

하라는 볼을 부풀리면서 내 말에 대꾸했고, 나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 그녀가 어느정도 우울한 감정이 풀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꾸 내가 이런 묘사를 하는 게, 혹시 내가 심리치료사에 관련된 직종에 일가견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물론 무리수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덮어두어야겠다.

“여기가 광주구나.”

“오빠, 여기 처음 와 봐?”

당연히 부산에서 아스트랄한 입시전쟁을 벌이다가 이사 간 지역이 서울인데, 몇 몇 놀러간 곳을 제외한 지역 말고는

광주는 그야말로 22년 인생에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응.”

“힛.. 그럼 내가 할머니 병문안 다녀오고 나면, 광주 시내 구경 시켜줄게-.”

이 때가 기회다 싶어, 하면서 데이트라도 하려는 속셈이란 것이냐.

아니다, 아직은 나도, 그녀도 연인관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하라의 조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한 일방적 계약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으니,

데이트라곤 딱히 단정지을 수도 없을 것 같다.

“광주 구경? 생각해보고.”

“치잇.”

뭔가 미심쩍게 토라진 하라, 할머니가 편찮으신데도 불구하고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아직은 어린 티를 못 벗었나보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차도녀인 척 해봤자지. 귀신 눈은 속여도, 부사니언의 눈은 못 속인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고 정할 일이고, 빈 손으로 가기는 뭣하니깐 저기 편의점에 들려서 뭐라도 사갖고 가자.”

“응!”

일단은 하라의 제안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고, 유교국가였던 대한민국의 일개 시민으로써 빈 손으로 어른이 계신 곳을

방문하기엔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자연스레 하라를 이끄는 발걸음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하라야..”

막상 할머니가 계시는 병실을 눈 앞에 두자, 긴장이 되었는 지 침을 꿀꺽 삼키는 하라였다.

그리고는 긴장을 같이 공유하려는 속셈인 듯, 나의 손을 꽈악 잡아보였다.

“오빠..”

“응?”

“고마워..”

그녀의 눈가에는 다시 눈물이 자연스레 스르르 차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마워하면 심심해서 광주까지 온 내가 무안해지잖아, 그래도 애써 안 그런 척을 하면서 하라를 향해 씨익 웃어주고는 그녀의 손을 더 꽈악 움켜쥐었다.

“풋.. 괜찮아, 빨리 보여드리자. 죄송스럽긴 하지만, 안심시켜드려야지.”

“응!”

하라는 자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망설였던 마음이 가득한 얼굴에서는 그런 기운이 싹 사라진 채 원래의 하라구로 돌아와서는 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누워계실 병실 안의 장면을 속으로 상상하며 문을 활짝 열자 시끄러운 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아이고, 할머니 좀 누워계세요..”

“뭐셔! 시방 내가 짐 돌아다니는 데 니가 뭐라고 지금 날 막는겨!”

아주 아스트랄했다. 저 할머니는 앓던 병은 말끔히 씻겨내셨는 지 아주 팔팔하다 못해 날뛰는 정도랄까.

간병해주는 아주머니까 꽤나 땀을 뻘뻘 흘리며 폭주를 하시는 할머니를 막고 계셨다.

“하라야, 저기 누워계시는 분이 니 할머니셔?”

열심히 폭주중인 할머니 한 분은 일찌감치 하라의 할머니 후보에서 배제하고, 창가에 햇살을 솔솔 받으시면서 잠들어계신

할머니 한 분을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니..”

하라는 아니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양 옆으로 저었다. 젠장, 저 할머니가 아니면 딱히 위독하신 할머니가 없는 것 같은데.

“할머니이!”

나는 하라가 어딜 향하면서 할머니를 목놓아 부르는 지도 모른 채, 창가에서 누워계신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메, 우리 손녀왔네!”

흐음, 아니? 하라를 반기는 목소리가 꽤나 정정하신 톤이었다.

하라의 할머니 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신 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훽하고 그 쪽으로 돌렸을 때, 나는 본의아니게 들고왔던 음료상자를 바닥으로 떨어트릴 뻔 했다.

“할머니.. 무슨 일이야..?”

아주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던 그 할머니가 하라를 꼬옥 안으면서, 오랜만에 만났다는 듯 반가워서 즐거워진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있었다.

하지만 전화상으로 받았던 상황과 다르게 펼쳐지는 모습에 나도, 하라도 당황하긴 매 한 가지.

그러나 할머니의 표정은 꽤나 무덤덤하셨다.

“아, 호호호-. 그게 말이다..”

하라의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모두 실토하려는 표정을 지으며, 멋쩍은 웃음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잔혹동화 같았던 지은이의 이야기 만큼은 아니겠지만, 뭔가 소름이 돋으면서 아스트랄한 얘기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것이 내 소견이다.

“하라, 이 놈의 기지배가 좀처럼 고향으로 와야 말이지. 우리 손녀 얼굴 보려고 전에 남자친구 얘기도 해서 그러니까 겸사겸사 손녀 남자친구까지 보려고 이 할매가 위장입원을 좀 했지, 아이구-. 우리 하라, 할매 연기 어땠어? 괜찮았어?”

할머니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충격적인 발언에 나도 벙찌고, 옆에 있던 하라도 벙쪄있는 채로 잠시 멍을 때렸다.

근데 저 간병해주는 아줌마는 도대체 왜 같이 벙쪄있는거지.

“오매, 이 머스마가 우리 손녀 남자친구여? 키도 크고, 얼굴도 훤칠한 게 역시 우리 손녀답네, 손녀다워! 할매는 우리 손녀가 이렇게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를 낚아서 기분이 좋네, 좋구나-.”

‘허허헣..’

하라의 할머니께서는 내 몸의 이 곳 저 곳을 더듬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대신 나는 반대로 ‘낚였다.’라는 생각에, 음소거를 한 채로 허망한 웃음을 속으로 토해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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