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7/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백 스물 두 번째 과외.

“어때, 입 맛에 맞아?”

“응! 아이스크림 만큼 맛있어. 헤헷-”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간단히 벗어제끼고 주방으로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시카는 이제는 자기 집 마냥 거실, 침실, 심지어 주방도 거리낌없이 활개하고 다녔다.

그래, 그렇게 신나해도 좋아. 그 대신 냉동실을 열지마렴.

수줍게 얼어가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있단다.

만약 네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얼마도 안 돼 내 정수리에는 쓰라림이 느껴지고, 뒤를 돌아봤을 때 흐릿해지는 시카의 웃는 모습을 보겠지.

다행히도 주방에 와선 내 뒤에서 내가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주는 쿠키를 맛있게 받아 먹을 뿐.

냉장고를 여는 류의 행패(?)는 보이지 않은 시카였다.

“입 맛에 맞다니, 다행이네. 그럼 난 씻으러 갈게.”

“우웅! 난 티비 보고 있을게-”

떡하니 거실에 앉아 티비를 키고 보는 시카의 뒷모습을 지켜본 나는, 안심해하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방책으로 문을 잠구고 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쏴아아 장렬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바짝 말라있었던 머릿결도, 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살결도.

따뜻한 물을 몇 번 맞으니 사르르 녹아내렸다. 더불어 기분이 좋아지고, 피로가 풀리는 듯한 느낌은 보너스.

“개운하네, 시카는 아직도 티비를 보고 있으려나.”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염색한 지도 벌써 세 달 째라서, 갈색 머릿결이 가득했던 내 숱에도 어느 새 검다란 색깔이 제법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하이라이트라니.

나중에 한 번 더 다른 색으로 염색해야겠다. 아니면 이 년 만에 검은 색 머리로 돌아가거나.

여튼 머리를 어느 정도 말리고, 목에다 젖은 수건을 걸친 다음 시카는 뭐하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 거실로 걸어가보았다.

‘쿠울 - 쿠울 -’

아기 마냥 새근새근 숨결을 토해내며, 잘만 자고 있는 시카였다. 그것도 소파에서 새우자세로 말이다.

여태껏 눈 뜨고만 있던 시카의 모습을 보다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시카의 모습을 처음 보니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오늘 이 곳 저 곳 많이 돌아다녔고, 또 바쁘니깐.”

참 잘 자고 있는 시카를 보며, 첫인상을 떠올려봤다.

마냥 차갑고 시크하고 냉정한 레이디인 줄 알았는 데, 여기서 알고 지내다보니 허술한 점도 많고 애교도 있고 너무나도 귀여운 여자라고 느꼈다.

그렇게 시카를 쳐다보다가, 문뜩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시카가 가야 할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시카야.. 시카야?”

그래서 시카를 흔들어서 깨우려고 하는 데, 하? 꿈쩍도 안 한다.

피곤하다못해, 잠시 정신이라도 놓으셨나. 라고 생각한 나는 계속해서 시카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수연아..? 수연아!”

시카가 그렇게 부를 때 마다 부끄러워 하던 본명을 불러봐도 무소용.

아주 조그만 움직임도 잠자고 있는 시카에게선 보이지 않았다. 

분명 코에다가 손가락을 댈 때는 숨이 쉬는 것 같은데, 설마 혼수상태!? 아니면 기절!?

에잇, 그럴리가 없잖아.

“뭐야, 왜 안 깨는 거야!?”

호흡 정상. 맥박 정상. 외모 정상. 질병 없음. 몸매 정상(?).

모든게 완벽한데, 어째서 시카가 일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진득하게 잠만 디비 자고 있는 이유는 뭘까.

서있는 채로 턱을 괴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문뜩, 과거에 유리랑 놀 때. 그러니까 아직 시카와는 별로 친해지지 못했을 때 유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식아, 너 그거 알아?”

“그게 뭔데.”

“시카 베이비 있잖아, 걔 한 번 깊게 자기 시작하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진득하게 자거든? 자기 의지로 깨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도 못 깨.

  그리고 걔 깨우려면 우리 멤버들이 목숨 걸고 달려들어야 돼. 자칫하다가 발에 채여가지고 우리들이 더 깊게 잘 수 있거든.”

아, 그래서 프랑스에 갔을 때도 시카 주변으로 그렇게 시체(?)들이 많았더구나.

풀리지 않았던 미스테리 중 하나를 해결했다. 우우 쾌거야.

여튼 과거의 유리가 했던 말 대로라면, 내가 깨웠을 때도 분명 상큼한 발길질이 내 복부로 야무지게 스며들어와야 되는데.

왜 안 들어오는 걸까, 자체적으로 남자는 필터링해주나?

우우, 좋은 스킬이다. (엄지손가락)

“젠장...”

이런 상황에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혼절(이라 쓰고 폭풍수면 이라 읽는다)한 시카를 등에 업고, 구부정한 채로 소녀시대 숙소로 갔다간, 

지금껏 어디 있었냐며, 나를 향해 폭풍 마사지를 시전할테니 전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하는 수 없이, 시카를 들쳐안고 성큼성큼 내 방의 침대에 시카의 몸을 뉘였다.

그리고는 이불을 크게 펼쳐 시카의 온 몸을 따뜻하게 덮혀주고는 헤집어진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모습은, 탁자에 놓여진 과자 봉다리. 그리고 소파에 남아있는 따뜻한 온기. 그리고 신문지.

신문지를 이불로 애용하면 꽤나 괜찮은 방법이긴 하겠지만, 얼핏 누가 봤다간 노숙자 취급을 받기 쉽상이었기에 그 생각은 접어두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내 방으로 다시 걸어가, 시카가 깨지 않도록 장농에서 담요 하나를 챙기고는 다시 거실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소파 위에 눕고는 담요를 내 몸 위에 덮은 뒤 나지막히 읊조렸다.

“하, 피곤한 하루였어.”

***

“우웅.. 여긴 어디지..”

아직 새벽의 여명이 채 가지 않은 애매한 시간, 의도치 않게 오랜만에 일찍 깨버렸다.

원래 내가 쉬는 날에 일어났을 때에는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는 데, 오늘은 해가 이제 막 뜰 참에 일어나버렸다.

낑낑거리며 닫아두었던 눈꺼풀을 여니, 투명한 햇빛이 나를 향해 빨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튼 아침이란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여기는 내 방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 방이지.

“어..? 미,민식이!?”

조금 흐트러진 머릿결을 손으로 털며, 털털한 발걸음으로 태연하게 누구의 방인 지 모르는 곳에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방은 바로 거실로 연결되어있었고, 거실에는 소파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소파에는 그닥 편하지 못한 자세로 자고 있는 민식이가 보였다.

그럼 내가 잤던 방은..?

“헛!? 우우.. 생각해보자.. 내가 왜 저기서 자게 됬는 지.”

일단은 민식이랑 레스토랑에서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바로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고는 잠시 쉬다 가겠다며 내가 민식이네 집으로 따라 온 거고.

그리고 민식이가 준 과자와 음료를 먹으며 열심히 티비 시청을 했다.

그 뒤로는 아무 기억이 안 나고, 꿈 생각이 나는 것으로 봐선 민식이가 씻는 도중에 잠에 든 것 같았다.

근데 내 추측대로라면 나는 소파에서 자고 있어야 정상인데, 침대에서 자고 있고.

오히려 민식이가 소파에서 자고 있고, 나의 옷의 상태는 자기 전과 같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누군가의 손이 닿은 흔적이 없고.

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소파에서 자고 있어야 하는데 침대에서 자고 있다는 건..

“꺄앗..”

민식이가 나를 들쳐안고 침대까지 움직였다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민식이가 나를 안았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히잉, 자는 척이라도 했다면 민식이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은근히 아쉬워. 여튼 그렇고 그런 생각에 하얗기만 했던 내 얼굴은 옅게 붉은 기운을 띄며 달아올랐다.

“하암.. 깼어?”

“아.. 응..”

나의 탄성이 알람이라도 된 것일까. 민식이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민식이의 부스스한 모습도, 찡그리고 있는 저 표정도 멋져. 

아, 근데 나 왜 이렇게 콩깍지가 심하게 씌여진거지.

“빨리 가야 하지 않아?”

“아니, 오늘 스케줄 없어..”

“아, 그래?”

민식이는 자신의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올 때 마다, 내 마음은 왠지 모르게 두근두근. 

쿵쾅쿵쾅 대는 소리를 민식이가 들어버리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쿵쾅쿵쾅 주체 못하는 심장인데, 하필이면 해가 점차 뜨기 시작하는 지 아침의 상쾌한 햇빛이 민식이를 비쳐주었다.

진정한 미남은 자연 조명만으로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뽐낸다던데.

민식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햇빛에 비춰진 민식이의 모습을 보자니, 누가 나에게 아드레날린이라도 투여한 마냥 마음의 물결이 요동쳤다.

그렇게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나였다.

“응?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어..어?”

갑자기 내 얼굴이 붉어지자, 민식이는 걱정되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볼살에 붉은 빛이 어린 나의 모습에 민식이는 혹시 감기라도 걸린 것 아니냐며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히잉, 자꾸 이러면 더 붉어지는데.

“으음..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나..나가볼께!”

뭔가 심각하게 고뇌하는 표정에다가, 나의 이마에 훤히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나는 결국 내 감정을 주체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아까보다 더 달아오른 내 얼굴, 거울로도 선명히 보인다.

나는 고개를 마구 흔들어, 민식이의 손이 떨어진 게 한 다음. 

급히 스케쥴이 생긴 것 마냥 헐레벌떡 현관으로 도망치듯 달아났다.

“응? 스케쥴 없다며, 아침이라도 먹고 가지.”

“아, 아니야. 괜찮아! 고마웠어! 잘 있어!”

민식이는 급하게 나가려는 나를 향해 아침이라도 먹고가라는 말을 했지만,

아침을 먹었다간, 내 마음을 들킬 가능성이 다분하다구. 

나는 재빠르게 민식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마침 나를 향해 달리는 택시 하나를 잡아 곧바로 숙소로 갔다.

“너 어디 갔다가 지금 와!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 데!”

“하, 몰라. 피곤하니까, 말걸지마.”

“시카... 너!”

역시나 오자마자 멤버들이 귀찮게 잔소리를 해댔다.

나는 원래 나의 모습으로 돌아와, 시크한 말투로 얘들을 대했고 멤버들도 더 이상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숙소에 들어오니까 피곤해지는 듯한 이 느낌은 뭐지.

나는 내 방에 들어가자마자 다리가 풀리는 듯한 느낌에 침대 위로 폭삭 앉았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한 숨.

“하아..”

민식이가 그리도 가까이 다가왔을 때의 얼굴, 그리고 민식이의 매력적인 입술.

영화관에서 느낀 보드랍고 따뜻한 민식이의 촉감이 내 손에서 아직도 느껴지는 듯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달아올라서, 연신 볼을 쓰다듬으면서 그 열을 식히려 했지만,

그럴 수록 떠오르는 민식이 생각은 배가 되었다.

“시카야.. 들어가도 될까?”

그렇게 민식이 생각을 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찰나, 태연이가 내 방에 와선 똑똑 노크를 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 태연이.

“잘 지내?”

“응?”

그리고는 뜬금없이 저런 말을 했다.

처음에는 태연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잘 다음 말에 태연이가 뭘 물어보려고 했는 지 알 수 있었다.

“...민식이.”

“...응.. 건강해 보이더라..”

태연이는 나의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손을 한동안 말없이 매만지고만 있었다.

나만큼이나 태연이도 마음 고생이 심했을거라는 게 문뜩 생각났다.

아니, 그 이상이지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에, 태연이는 열 줄을 몰랐던 입을 벌리며 말했다.

“...좋아하지?”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토해내며 그녀에게 내 마음 속에서만 묵혀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응.. 그런 것 같아.. 자꾸 머리 속에서 민식이만 떠오르고, 왜 이러는 지 모르겠어.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왜 안 되는데?”

“으..응?”

마음 속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 하소연을 잠시 하자, 태연이는 잠시 나를 당황시키는 말을 했다.

‘왜 안 되는데?’라니.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왜 스스로 안 된다고 하는걸까.

“파니도, 유리도, 윤아도, 써니도, 설리도. 심지어 너의 동생 수정이 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좋아하잖아.”

“그렇지..”

“근데 넌 왜 자신의 마음을 숨길려 해?”

민식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다른 애들이랑 비슷하거나 아님 그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까지 좋아해버리면, 다른 애들은 더 힘들어질텐데.. 그런 생각이 문뜩 들자, 민식이에게 고백을 하는 것을 점점 망설이게 되는 나였다.

오늘도 못 해버렸고. 내 마음에 있는 말을 결국엔 끝까지도 못하면 어쩌지.

왠지 후회감이 너무 크게 들어버릴 것 같은데.

“내가.. 그래도 될까..”

“왜, 안돼? 너도.. 좋아하면 표현하면 되잖아.”

“... 얘들이.. 그리고 너한테.. 미안해서..”

“..미안해 하지않아도 돼. 다들 솔직한 것 뿐이야.”

태연이의 말이 내 마음속에 깊게 와닿았다.

역시 리더는 달랐다. 태연이의 말의 하나하나가 나의 긴장되고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태연이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태연아..”

“괜찮아. 민식이도, 너도 나한테는.. 아니 우리들한테는 소중하니깐, 혼자 끙끙 앓지 말아.”

“..응..”

“그럼 나가볼게.”

태연이와의 짤막한 대화를 통해 나는 내가 얻고자 하는 대답을 얻은 것 같았다.

태연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즈막히 속으로나, 밖으로나 내가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말하고 말거야. 망설이지 않을거라고..

아득하게 보이는 천장. 그 곳을 향해 나는 나즈막히 말했다.

“그래.. 나는.. 민식이를.. 사랑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