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백 열 여덟번째 과외.
***
“히히, 오늘도 청춘은 지지 않는다!”
금요일 밤 열 한시. 소녀시대 숙소의 리모컨은 항상 내 손에 쥐여져있다.
얘들이 금요일에는 볼 게 없다고 딱히 보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 예전에 자기들 나와서 모니터한다고,
같이 양 옆에 앉았던 이순규 양과 권유리 양은, 자신의 출연분이 끝나자 매정하게 티비 앞을 떠나갔다.
결국엔 이번주 금요일도 나 혼자 소파를 쓸쓸히 지킨다.
‘두두-’거리는 경박한, 리모콘이 눌리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보고자 하는 프로그램은, 청춘불패.
보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나를 대신해서 농촌체험을 하고 농작물을 키우는 대리만족 프로그램이랄까.
그렇다고 모든 농작물을 키우고 싶은 게 아니다.
오이는 싫어.
“음, 게스트?”
여튼 재밌게 방송을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오늘은 지인들을 부르는 날이라고 하는 신영언니.
나는 청춘불패 출연진들이 부른 지인들을 한 차례 씩 구경하다가, 마지막 효민이가 데리고 오는 지인의 정체에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민식이가 왜 저기 있어!?”
믿기지가 않았다.
티비에 뻔뻔하게 나오는 저 낯짝. 저건 필시 민식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갈색머리, 요즘따라 희미하게 보이는 저 아우라, 예능하면 잘 할 것 같은 능글스러운 말투까지.
저 티비에서 나오는 사람은 서울에 거주하는 김민식(22.남)이 확실했다.
왜 민식이가 저기서 나오는 거지?
왜 민식이가 효민이 사촌으로 출연하냐구.
내가 알기론 민식이는 효민이 사촌이 아닌데. 동생도 누나도 형도 없는 독자라고 말한 것 같은데.
여튼, 또 다시 나는 민식이 때문에 멍을 때렸다.
“수연아, 무슨 일 있어?”
유리가 자기 방에 앉아있는 상태로 나에게 물어봤다.
그 소리에 나는 줄을 놓고 있다가, 다시 잡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하게 머리가 굴러간다.
유리의 말에 ‘청춘불패에 민식이가 나와.’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뭐?!’ 하면서 유리는 민식이를 찾겠지.
그럼 나 혼자 보고싶은데, 유리도 보게 될거고, 그렇게 있다보면 순규도, 미영이도, 윤아도 모두 민식이를 보게될거야.
그럴 순 없어, 나만 보고싶다구!
“아, 아니야.. 아무 일도.”
일단 여기서 민식이가 나오는 것을 들키면 안되니까, 나는 리모콘을 집고는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이 리모콘을 집고 있는 채로 청춘불패가 끝나는 열 두시 까지만 얘들에게 채널도, 리모콘도 안 넘기면 돼.
히힛, 난 머리가 좋은가봐.
*
점점 멍을 때리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시카야, 이게 뭔지 알아? 오이야-”
유리는 내 앞에서 오이를 흔들어보였다.
오늘도 날 놀리려는 속셈이 뻔히 드러나있는 악마율 같으니라구.
하지만, 나는 멍을 때리고 있느라 앞에 오이가 흔들거리는 데도 꿈쩍거리지 않았다.
나의 의외의 반응에 놀라는 건 앞에서 오이를 흔드는 유리였다.
“파,파니야..”
“으응?”
“시카가 이상해.”
티비를 보며 꺄르르 웃던 파니는 유리의 말에 고개를 유리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파니의 눈에 보이는 건 분명히 내 앞에서 오이를 흔들며 무서워하는 유리와 태연한 나의 모습이 보이겠지.
“뭐라고오? 응? 시카야?!”
역시나 화들짝 놀라는 파니. 눈이 아주 동태마냥 동그래졌다.
“멍 좀 그만 때려봐!”
“마자마자!”
나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채, 가는 귀로 두 소녀의 외침을 듣고있었다.
아직도 민식이 생각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나.
확실히 두근거리는 이 마음이 민식이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다.
“하, 일단 시카 정줄 알아서 잡게 하자. 뭐 시간이 지나면 잡게 되겠지.”
“우웅.. 근데에, 민식이는 언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려나.”
“글쎄..”
“응? 민식이?”
결국엔 포기하고야 마는 두 소녀들.
역시 그녀들은 잠꾸러기 일 때의 ‘나’와 멍 때릴 때의 ‘나’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걸 만약 이긴다면, 그 사람은 소녀시대 멤버도, 우리 가족도 아닌 민식이일꺼야. 헤헷..
여튼 이런 상상을 하면서 또 다시 멍에 빠지려는 찰나,
파니가 민식이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내 몸은 그 키워드에 반응했고, 나는 줄을 잡자마자 민식이를 찾았다.
근데, 있을리가 없지..
“음, 시카야?”
“아, 아니야.. 니네들 하던 대화 마저 해.”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는, 유리와 파니를 거실에서 떠들게 내비 둔 채로 내 방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침대 위에 앉아 또 다시 골똘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시카야.”
“...”
“시카야?”
혼자 있는 방에서 골똘히 고민(이라 쓰고 멍 이라 읽는다)을 하고 있는 찰나에,
태연이 내 방으로 자연스레 들어왔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지만, 여전히 나는 다른 생각 중이어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 민식이.”
“으응..? 민식이?”
내가 무반응인 채로 일관하자, 태연이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민식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러자 내 몸은 조건반사적으로 즉각 반응.
그 모습을 본 태연이는 나를 보더니 크게 한 숨을 지었다.
“하, 시카야..”
“응? 왜?”
“너.. 아, 아니다..”
태연이는 뭔가 마음에 쌓여있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태연이가 나를 부르자, 시크한 말투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에잇, 뭐야 싱겁게.
그리고 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태연이.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보였다. 그 모양새에 내 마음이 미안해지는 건 왜 일까.
“미안..”
묵묵히 걷고있던 태연이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미묘하게 흔들린다.
나의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괜찮아.. 한 명 정도 더 느는 것 쯤이야.”
태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내 방의 문을 부드럽게 닫았다.
몇 분만에 다시 나 혼자만 있는 방.
정적만 가득했다, 아직은 낮이라서 방 안은 환했다.
그래도 블라인드를 쳐서 그런지 하얗게 환하지는 않았고, 까맣게 환했다.
단지 자연적 현상 때문에 방이 이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분명 내 마음에서 이는 두 파도의 충돌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하아, 어떻게 하지..”
나는 분명 민식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이 마음을 밝히면 서로 경쟁하느라 바쁜 얘들 사이에 내가 끼니깐 경쟁이 더 치열해진다.
그리고 얘들은 불쌍해진다. 지금 상황 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서 내가 더해져 더욱 더 경쟁을 한다면 분명 불쌍해질 것이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나는 아득해진 머리를 한 손으로 쿵 치곤, 마음을 추스릴 겸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아이스크림 있어?〉
그리고 몇 분간 망설이다 보낸 문자.
제발 아이스크림이 있어야 할 텐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민식이로부터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제발, 핑계지만. 아이스크림아 - 제발 있어라..
“히잉.. 왜 이렇게 문자가 안 오지.. 낮잠 자나? 에이.. 설마..”
4분이 지나도, 답장은 전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더욱 더 조마조마해지는 내 마음.
이제는 왜 문자를 안 받을까, 하면서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해보고 있다.
늦잠자서 못 보낸거다. 다른 애랑 놀고 있느라 못 보낸거다. 등등 여러가지 생각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공기방물 마냥 튀어올랐다.
‘지이잉-’
“어? 헤헤- 왔다!”
그 때였다.
침대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만들어내며 부르르 떨려왔다.
나는 그 진동소리에 걱정이 싹 사라지고 꼬마마냥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민식이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했다.
《없는데》
뭐, 없어..?
그럼 나, 민식이네 집에 갈 핑계가 사라져버린거야? 그런거야?
그리고, 가고 싶어도 저 아이스크림 때문에 못 가는거야? 그런거야?
히잉.. 이건 있을 수 없어.. 말도 안돼..
흐윽, 말도 안됀다구..
“흐윽, 민식이네 집에 가야 되는데에.. 흐엥.. 싫어.. 흐윽.”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
그래서 나답지 않게 거의 흘려본 적도 없는 눈물을 지금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슬퍼도, 쉽사리 흐르지 않았던 눈물인데.
민식이를 좋아하고 마음에 담아두기 시작할 때 부터, 내가 감성이 풍부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첫사랑이고 짝사랑인데도. 원래 나는 감성이 그리 풍부하지 않은 여자인데도, 민식이를 좋아하기 시작할 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민식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할까.
혼자만 두근두근거리는 이 멈출 줄을 모르는 사랑의 펌프질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걸 민식이는 과연 알까?
여튼, 가슴이 쓰라리지만 행복한 가슴앓이를 잠시 접어두고 훌쩍거리며 민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조용하게 들려온다.
뚜우우 - 뚜우우 -
마치 아직 빛이 들지 않은 이른 새벽에 배가 출항하면서 내는 뱃고동을 연상시키게 하는 소리.
그 소리에 잠시나마 코발트빛 바닷가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골라쉬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눈가에는 걱정되는 눈물 몇 방울이 뚜욱 뚜욱 떨어지고, 목소리는 여전히 떨려왔다.
그렇게 잔잔한 통화연결음이 계속해서 들릴 때 쯤, 갑작스럽게 통화연결음이 뚝 끊겼다.
아마, 민식이가 내가 전화 건 것을 받았나보다.
그 생각에 갑자기 또 말을 할 때 마다 훌쩍거려졌다.
〔여보세요?〕
반가운 민식이 목소리. 내가 이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는데.
“흐엥.. 진짜 아이스크림 없어?”
〔시카야?〕
“웅..”
〔...없는데..〕
전화로도 없다고 말하는 민식이.
진짜 없긴 없나보다. 그런 마음에 다시 한번 가슴 한 켠에서 슬픔이 차올랐다.
또 다시 창피하게 눈물 흘릴 것 같잖아.
“그,그럼.. 너네 집에 못가겠네.. 히잉..”
〔그냥 와.〕
“어?”
그렇게 아이스크림이 없어서 못 갈것 같자, 괜스레 서운한 마음으로 민식이와 통화하고 있는데, 민식이가 그냥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맨날 내가 먼저 간다고 했는데, 이번엔 그냥 오라니.
히히, 해맑은 웃음만 나오고. 어느새 슬픔은 말랐다.
그리고 더 내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하는 민식이의 한 마디.
〔우리, 아이스크림 말고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