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2/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백 열 일곱 번째 과외.

그렇게 정신적으로는 포만감이 가득 차고, 육체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쇼핑을 끝내고

다시 사람도 많은 대학가 근처를 서성거렸다.

여튼 돌아다니긴 하는 데 할 게 없어서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처량했다.

물론 내가 처량한거지, 밀짚모자 쓰고 블링블링 핑크 선글라스 끼신 설리님은 제외십니다.

“오빠야.. 나 배고프다..”

풀셋을 맞추신 설리님은, 이제는 배가 고프신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돈을 꺼내면서 지갑의 잔액을 확인한 나는, 그 뒤로부터 2층에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대신, 대놓고 노점상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설리가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 거기로 가기만을 간절히 빌 뿐이었다.

“뭐, 먹고 싶은데?”

나의 이 시선을 확인해줘, 설리야. 우리 착한 설리는 오빠에게 라면을 먹이지 않겠지?

오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너의 입모양을 지켜보고 있단다.

제,제발.. 위에는 쳐다보지 말고, 저 주황색 비니루의 가게에 관심을 가져다주렴.

“떡보끼!!”

금방이라도 설리를 격하게 안아주고, 지금의 선택에 대해 보상을 해주고 싶었지만,

주위의 시선이 심히 의식되어서 가까스로 돌발적 개드립을 자제할 수 있었다.

어쨌든 오빠의 마음을 알아주는 착한 고향 동생 설리님의 손을 잡고,

시선을 뗄 줄을 몰랐던, 우월한 주황색 비니루의 노점상을 향해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오늘 최고로 가벼운 발걸음인 것 같다.

“뭐 드릴까?”

“떡볶이 1인분이랑 순대 1인분 주시구요, 오뎅 종류별로 1개 씩만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요.”

노점상 같아보이지만, 노점상을 컨셉으로 잡은 분식점이었다.

엄연히 합법적인 영업을 하는 가게, 주황색 비니루 안으로 가면 많이 익숙하신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방긋 웃어주셨다.

1학년 때, 오전 강의와 오후 강의 사이의 나의 허기진 위를 야무지게 채워주시던 분식집 아주머니.

인자하신 표정과 외모만큼이나, 덤도 푸짐하시다.

“아주머니, 저희 1인분만 시켰는 데.”

“호호, 단골이라서 이렇게 주는거야. 단골 아니었으면 찔끔 줬다구.”

“헤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이-”

“호호, 많이들 먹어요. 단골학생 여자친구가 꽤 예쁘시네. 단골학생은 복도 좋아, 저런 여자 잡고?”

역시나 그 인정(人情)은 변함 없는 상록수의 마음.

먹음직스럽게 불그스름한 떡볶이가 2인분도 넘을 듯한 양으로, 접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또한, 순대와 오뎅도 서비스이신지 여러 개를 더 넣어주셨다.

아아, 안 이러셔도 되는데.

그래도 설리는 많이 먹게 되서 좋은가본지, 방실방실 눈웃음을 흘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신 아주머니는, 나보고 설리가 네 여자친구가 아니냐며 질문을 하셨고.

아니라고 대답하기엔 살짝 껄끄러웠지만, 은근히 대답을 어떻게 기대하는 설리의 따가운 눈빛도 있었기 때문에

노 코멘트 대신,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히히..”

설리는 나의 행동이 만족스러웠는 지, 떡볶이를 먹다 말고 입을 벌리며 웃음을 지어냈다.

풋, 설리야. 웃을거면 입가에 묻은 그 떡볶이 소스의 흔적을 지우고 웃지 그랬니.

여튼 설리가 혼자서 2인분 같은 떡볶이 1인분을 입으로 청소(?)하고 있었을 때,

나는 일찌감치 떡볶이를 맛보는 걸 포기하고, 설리에게 내준 다음 순대를 젓가락으로 찍어 소금에 먹었다.

“아 나- 다른 건 다 몰라도 순대는 적응 안 돼. 순대는 막장에 찍어먹는 게 진리인데..”

막장이란, 니 인생 막장이다. 할 때의 뜻의 그 막장이 아니라, 쌈장을 조금 묽게해서 달달하게 만든게 막장이다.

거기에 순대를 찍어먹으면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짭쪼름하고도 고소한 맛이 아주 일품인데.

서울에선, 고작 소금에다가 찍어먹다니.

차라리 생으로 먹는 게,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생각일 뿐.

오늘도 별 수 없이, 순대를 소금에 찍어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었다.

설리도 부산사람이라 내 마음을 이해하는 지, 막장 얘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어줬다.

그래. 마음이라도 이해해줘서 고맙다.

“우와, 잘 먹었다아-”

“벌써? 그 많은 떡볶이를 다? 오뎅도 다 먹었네, 설리가 배고팠긴 많이 배고팠나봐.”

“칫, 오빠는 남자답지 않게 왜 이렇게 조금 먹어. 나만 먹보같아 보이잖아.”

설리는 맛있게 잘 먹었으면서, 괜히 나한테 볼멘소리다.

너 때문에 내가 몇 일을 굶게 생겼는 데, 다행히 비싼 음식 가게 안 가서 다행이었지.

만약에 갔다하면, 난 투잡 알바를 뛰어야 되거나. 월급 받을 때 까지는 라면이나 먹었어야 했어.

그것도 무척이나 지겹도록.

여튼, 분식집에서 꼬르륵거리는 허기를 채웠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너무나도 눈부시게 화창한 날씨의 햇빛 몇 줄기가 가로수의 초록잎 사이로 새어나와 활기 찬 경관을 보여주었다.

“설리야.”

“웅?”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그렇게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가로수길을 계속해서 걷다보니, 딱히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설리가 하고 싶은 걸 하려고 설리에게 가고싶은 곳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아니― 난 오빠랑 이렇게 걷고 있는 게 제일 좋다― 히힛..”

그러자 눈웃음을 방긋 지으며, 기특한 말을 하는 설리였다.

난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부드럽게 그리고 꼬옥 안아주었다.

설리의 까슬한 모자챙이 내 턱에 닿아 불편하긴 했지만, 지금의 따뜻한 감촉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동생 그 이상으로 대하는 걸지도 모른다.

포옹이 끝난 후에 설리의 모습은, 보통 고등학생 소녀들과 별 다를 바 없이,

풋풋한 사랑에 빠진 불그스름한 볼의 색을 띄웠다.

농익은 사과의 색보다는 연하고, 복숭아 색보다는 조금 더 진한 그녀의 얼굴색이

얇게 펴바른 분장을 뚫어, 지금 설리의 콩닥거리는 마음을 대변해줄 것 같았다.

“진짜 가고 싶은 데 없어?”

“응! 아, 한 번 해보고 싶은 거 있었어.”

“그게 뭔데?”

그래도 스케쥴 전 까지 시간은 써줘야했기에, 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아까 전까지만 스케쥴이 없다고 말한 설리였지만, 인기가요 MC 스케쥴이 있다고 아까 토로한 설리였다.

진작에 말을 왜 안해줬냐며 타박하고 싶었지만, 또 서운해 할 설리의 모습은 보기 싫어서 별다른 말은 안했다.

여튼, 스케쥴 시작 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설리에게 하고 싶은 걸 물어보는 데.

설리는 한 동안 없다고 대답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듯, 자신의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 소리에 즉각 설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나.

“좋아하는 사람이랑 커플 자전거 타 보고 싶었어!”

“그럼 공원으로 가자.”

“히히, 웅!”

참으로 소박한 꿈이었다. 그 정도는 얼마든 지 들어줄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은 빨리 갈 수 있을테니.

근처의 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공원에서는 가을임을 알리는 지, 떨어지는 낙엽의 쓸쓸한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 냄새에 코를 찡그리거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이 냄새도 자연의 일부일 뿐. 절대로 인위적인 게 아니지 않은가.

낙엽이 외부의 인위적인 힘에 의해 이렇게 장대비마냥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 청풍에 의해 수 없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오목하고도 볼록한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낙엽을 밟으며, 자전거 대여소 앞에 가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커플 자전거 한 대만 대여해주세요.”

“한 시간에 삼 천원.”

자전거 대여소 주인은 의외로 시크하셨다.

역시 나이를 드시면 드실 수록, 다정해지기는 커녕 시크해지시는 노년의 남자.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시크해지나보다.

뭔가 시크해지는 이유가 좋은 쪽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이 점점 떨어지자, 이에 상응하듯 자신이 관심을 주지 않는 건가라고 쓸데없이 잡생각을 해보았다.

어쨌든 점점 시크해지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

시크한 노년의 남자로부터 빌린 커플 자전거는 보통의 자전거와 다를 바 없이 바퀴 2개가 잘만 달려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의자로 쓰이는 덮개가 2개고, 핸들도 2개, 페달도 2개다.

둘이 합심해서 움직여야 편하게 달릴 수 있고, 따로따로 움직이면 절대 편할래야 편할 수가 없는 커플 자전거다.

여튼, 나와 설리는 두 안장에 몸을 싣고, 곧바로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오빠, 하나하면 왼쪽, 둘 하면 오른쪽. 오케이?”

“응, 오케이.”

“자, 그럼 간다. 하나! 둘! 하나! 둘!”

설리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진두지휘에 맞춰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 나.

설리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하나를 외칠 때면 나는 왼쪽 페달을 힘껏 밟았고, 둘을 외칠 때면 오른쪽 페달을 힘껏 밟았다.

핸들 조절도 앞이 컨트롤이 잘해야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었기에, 난 페달 밟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설리에게 맡겼다.

여튼 커플 자전거를 타는 설리의 목소리는 꽤나 고조되어있었고, 들떠있었다.

그렇게 공원 한 바퀴를 도니, 어느새 한 시간이 다 되었다.

그리고,

“히잉.. 오빠 나 이제 목동 가야되. 재밌게 놀아줘서 고마워어- 다음에도 또 놀아줘야돼?”

“당연하지, 스케쥴 잘 해. 설리야-”

“웅!”

설리가 스케쥴을 위해 밴을 타고 떠날 시간도 다 되었다.

미리 밴이 오기라도 한 듯, 공원을 딱 빠져나오자 에프엑스 밴이 떡하니 서있었다.

설리는 울상을 지으며 아쉬운 마음을 나에게 직접 내비쳤다.

그래도 어쩌겠는 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은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아쉬워하는 설리를 달래서 보내고는,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설리빠인 내 친구가 예전에 한 말을 장난스레 되짚어보았다.

‘설리는 어떤 줄 알아?’

‘어떤데?’

‘설리는 레알 진리야, 그냥 그녀를 내 앞에서 보고 있으면 녹아버릴 것 같아.’

나는 오늘 설리의 모습을 보고, 그 친구가 한 말을 생각해보니.

오늘은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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