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7/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백 열 두 번째 과외.

“몰라, 스케쥴이 됬나 봐.”

“아, 씨. 어쩌지.”

“어? 어어어어?”

효민이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신용하는 게 아니었는데, 섣불리 믿어버린 내 잘못이다.

딱히 이 위기상황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못 찾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

엎친 격 덮친 격으로, 치엔누나는 오자마자 뭔가 튀어보이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는 지 놀란 얼굴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 진짜 어쩌지.

“왜 그래, 토리야?”

“아니, 잠깐만요오. 아는 사람 가타서어.”

신영누나는 뭔가 놀라하는 치엔누나의 반응에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신영누나의 질문에 보지는 않고, 내 쪽으로 점점 다가오면서 대답을 하는 치엔누나.

그런 치엔누나의 대답에, 출연진이나 스텝이나 지인들이나 다 ‘응?’이라는 리액션을 취할 뿐.

더 이상 효민이의 등에 숨어있다간 무슨 꼴이 날 지 생각도 안나니, 어쩔 수 없이 나오기로 했다.

“하하하하..”

머리를 긁적거리며 효민이의 등 뒤에 숨어있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모습을 본 치엔누나는 매우 놀라워하는 표정.

분명히,

‘에엑?!’ 하는 치엔누나거나,

‘니가 왜 여기써?’하는 치엔누나겠거니 생각하는 나였다.

“민식이다! 민시가! 보고시퍼써!”

엥!?

나의 두 가지 예상과는 달리, 나를 보자마자 나에게 달려들어 앵기는 치엔누나였다.

마치 연인처럼 진하게 앵겨붙는 치엔누나.

키가 나보다 아담해서 그런 지는 몰라도 자신의 볼을 내 가슴팍에다가 부비부비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표정은 모두 나와 동일했다.

단, 지금 순간 만큼은 누구보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노려보는 효민이만 빼고.

“호호, 이게 지금 무슨 일인 지 설명해보실까.”

비소를 지으며 날 비릿하게 쳐다보는 효민이.

예능은 안 보고, 드라마를 조금 보긴 하는 나여서 그런지 그녀의 눈빛에서 구미호의 눈빛이 느껴졌다.

신민아가 구미호인 게 그냥 커피면 얘가 구미호가 되면 블랙커피야.

담백하게 나를 털 것 같아.

효민이의 표정이나 멘트에서 뭔가 모르게 무서운 여자의 질투와 분노를 감지한 나는 곧바로 나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변명이 필요함을 자각했다.

“아, 그게 저.. 으음, 우연하게 아는 사이랄까..”

“민식아아, 오랜만이야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에―”

나의 진심어린 변명에도 치엔누나가 진심어린 멘트를 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아직도 자기 자리에서 오프닝을 하지 않고, 내게 안겨 효민이가 진정으로 분노를 내뱉을 것 같은 대사만 골라서 셀렉하는 치엔누나.

효민이의 눈빛을 다시 보니, 이번엔 레알 죽을지도. 집에 가면 살아남을 수 없을 지도.

그리고 더 궁금한 건, 심지어 루나나 엠버보다도 어색했던 치엔누나였는 데 나도 모르게 이렇게 친해져버린거지.

“...치엔 누나, 이러면 내 목숨이..”

“웅?”

“하, 감독님 잠시 녹화 좀 끊으면 안 될까요.”

효민이의 불그스름한 분노의 아우라에 감독님도 쫄았는 지, 촬영을 잠시 멈추고 쉬는 시간을 10분 씩이나 주셨다.

아, 감독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10분 후면 저 밭일 못 할지도 몰라요.

어쨌든 계속해서 ‘설명해보실까.’를 반복해서 말하는 효민이와 ‘보고시퍼써어.’를 연발하며 볼을 가슴팍에 부비대는 치엔누나.

그리고,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를 속으로 읊조리며 대안을 갈구하는 나.

“일단 여기는 사람들이 지켜보니, 뒷간에서 담소 좀 나누자.”

“네..”

“나도 따라가도 되는 거야아?”

이번만큼은 효민이에게 대꾸도, 장난도 못 칠 분위기였다.

늅늅, 효민이는 약간 화가 났는 지 성큼성큼 저 만치 앞서나갔고, 나와 치엔누나는 나란히 발을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일단은 효민이를 풀어줘야 하니까, 치엔누나랑 입을 좀 맞춰야겠어.

“하, 치엔누나.”

“응?”

“효민이가 오해하는 것 같으니까, 일단은 축제 때 만나서 아는 사이라고 대충 둘러대요.”

“응.”

일단 치엔누나와 입을 맞추는 것은 완료.

이제는 얼마나 효민이에게 어필을 해서, 효민이의 화를 풀어주느냐가 문제다.

마일리지를 또 쌓아야 풀리려나. 늅늅..

“자, 설명해봐.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게 사실, 내가 대학교 다니고 워낙 성실히 일을 하는 지라, 어쩌다보니 축제 스탭을 맡게 됬거든, 거기다가 에프엑스 전담 스텝이라서

  어쩌다보니, 빅토리아누나와는 얼굴을 많이 익히게 되더라구. 단지 그것 뿐이야. 제발 믿어줘 늅늅.”

“효미나― 민식이 말이 맞아. 대학교 축제 때 얼굴 익힌 것 뿐이야.”

첫 번째 변명은 성공했나 모르겠다.

계속 화가 나있었던 효민이의 표정이 우리 둘의 진심어린 말에 약간은 풀린 듯 했다.

근데, 아직은 먼 것 같다고.

뭔가 질문을 할 것만 같은 기세인 효민이의 모습이란 말이다.

“흐음, 얼굴 정도만 익힌 사인데 어떻게 그렇게 껴안을 수가 있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그건 치엔누나한테 물어봐.”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반가워서 그런거야아.”

이번엔 치엔누나가 하는 두 번째 변명.

내가 아닌 더 믿을 만한 치엔누나가 해서 그런 지, 좀 더 풀린 듯한 효민이의 표정이었다.

그래도 아직 풀리려면 멀었어.

쳇, 나의 몸까진 쓰려고 하지 않았는 데. 진짜 이거 안 풀어주면 오랫동안 남겨 둘 것 같아서..

“효민아.”

“왜.”

“잠시 대화 좀 나누자.”

“여기서 얘기 해.”

왜 이렇게 갑자기 시크해진거야.

순간 정자매 보다도 더 냉기를 뿜어주는 효민님이였다.

닮은 사람들끼리 뿜는 냉기는 비슷비슷하네.

쳇, 어쨌든 여기서 얘기하라는 효민이의 말에 할 수 없이 치엔누나가 안 들리게 효민이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내일 밤에 찾아와도 뭐라고 거부는 안 할게..”

“히힛♥”

내 말에 곧바로 반색하는 효민이.

하, 당했다. 이 냔의 얻고자 하는 보상은 바로 이런 것이였어.

그리고 아까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나한테나, 치엔누나한테나 활짝 웃으며 미소를 보이는 효민이었다.

앙큼한 여자 같으니라고. 

“헤헤, 이제 그럼 멤버들 기다릴테니 마당으로 다시 가자!”

“으응..”

“응.”

그렇게 효민이의 ‘질투를 빙자한 뭔가를 얻어낸’ 사건은 별 트러블 없이 헤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치엔누나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나오는 효민이의 모습과는 달리,

뭔가 어둡고 찝찝한 표정을 짓는 나의 모습에 사람들은 이 아이러닉한 장면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촌장님, 오늘은 뭐 해요?”

“아, 오늘 벼 이삭이 아주 실하게 익은 것 같으니 추수를 해야지. 오늘은 너무 많으니까 반만 할꺼야.”

아까와는 달리 아주 신나는 표정으로 적극적으로 방송을 하는 효민이.

젠장, 그녀와는 달리 나는 계속 찝찝한 마음이 들어서 노촌장님이 뭐라고 말하시는 지 듣지도 못했다.

다행히도 깨알같은 그녀들의 리액션에 대충 힘든 일이라고 눈치챘을 뿐.

어느새 내 발은 그녀들을 따라 논길을 걷고 있었고, 내 앞에 펼쳐진 건.

“와아아아아, 노랗다!!”

산들산들한 바람결에 휘날리며 드넓게 펼쳐진 황금빛의 물결이었다.

여태껏 농촌을 와본 경험은 약간 있긴 했지만, 이만큼 진경의 모습을 보기도 참 힘들었다.

티비로서나, 컴퓨터로서 보던게 내 눈 앞에 펼쳐지니까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에 맞춰, 고개를 푸욱 숙여 내게 인사하는 것 같은 벼들의 모습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의 반년에 가까운 벼농사 후 추수쯤 되었을 때,

수 만줄기의 벼이삭들이 일제히 흔들리는 그 장관을 본다면, 그 보람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농민들이 왜 벼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벼를 키우는 지 이제야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다른 애들도, 다른 어르신들도, 다들 나와 거의 비스무리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나마 일제히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자, 이제 감탄은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벼를 추수해보자.”

“네!”

모두 빛의 속도로 황금빛으로 수놓아진 논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각자 손에 들고 있는 낫으로 볏줄기를 사각사각 베어냈다.

아직은 겨우 몇 단밖에 안 베어낸 지 몰라도 별로 힘이 들지 않았지만, 뭔가 기계의 힘이 필요할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오늘은 트랙터 와요?”

“오늘은 트랙터로 못 하니까, 일단은 우리 손으로 벨 만큼 베어내야돼.”

늅늅, 다른 논에서 트랙터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나 뭐라나.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다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한다는 게 촌장님의 말씀이셨다.

G7 중 하라구를 뺀 6명 + 나를 포함한 지인 여섯 명 + mc군단 3명 + 로드리 아저씨와 왕구아저씨 까지. 

모두 열 일곱명이 열심히 낫을 놀려대고 있지만, 아직 새발의 피만큼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혼자 앞서나가며 몇 십 단을 베어내고 있었을까. 나는 괜히 빨리빨리 베어내고 있다가, 체력이 금방 오링나는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쉬엄쉬엄 하면서 새참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새참시간에 치엔누나와 할 얘기가 있었으므로 더욱 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참시간이자, 잠시 쉬는 시간입니다!”

몇 시간을 더 볏단을 베어냈을 까, 이제야 성과가 보이려고 할 때 쯤에 고맙게도 새참시간이 찾아왔다.

다들 새참시간이 반가운 듯 우르르 논 위로 몰려나왔다.

다들 열심히 하긴 하셨나 본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고스란히 맺혀있었다.

물론 노촌장님만 빼고. 훗, 많이 쉬엄쉬엄 하셨나보네.

역시나 다른 멤버들도 그 모습을 발견하고, 노촌장님을 은근히 디스하고 있었다.

노촌장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그 디스를 넘기려는 모습이 다분하셨고.

나는 새참시간이 조금 길었기에, 간식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맛있게 보이는 주먹밥 한 개를 입에 가득 문 다음

나의 옆에서 맛있게 새참들을 먹고 있는 치엔누나의 손목을 잡고, 아무도 몰래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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