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백 여덟 번째 과외.
“그..그게..”
“설리랑은 하고.. 나랑은 안 하고?”
하, 설리가 결국 둘 만 알기로 했던 비밀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수정이에게 폭로했나보다.
설리야, 미안하지만 당분간 과외는 취소해야겠다.
수정이의 눈빛에는 질투 아닌 질투기가 서려있었다.
“...”
“나는.. 오빠한테 처녀까지 줬는데..?”
순간 ‘처녀 준 건 다 처녀 줬어.’라고 말할 뻔했다.
애써 그 말을 삼키고, 일단은 수정이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해보았다.
점점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지는 그녀.
겨우 참아왔던 슬픔이 또 다시 한 번 터지려고 하나보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샌가 그녀의 눈시울은 붉어져가고 있었다.
“수..수정아 그런 소리 누가 들으면..!”
“흐흑, 오빠는 그저 내가 욕구 배출용이였던거지? 그런거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한 번도 얘들을 욕구 배출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얘들의 욕구 배출용 도구가 아니었던가. 라고 생각해봤다.
난 전혀 하고 싶지 않았는 데, 음탕한 미소로 방문을 두드리고선 결국엔 날 꼴리게 해 하게 만든 그녀들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웬만한 야릇한 상황은 피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그리고 오늘따라 자꾸만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한 가득 맺히고 있었다.
“아..아냐! 절대로! 내가 얼마나 우리 수정이 아끼고 또 사랑하는데.”
“흐흑.. 진짜아..?”
“물론!”
주위의 눈총이 따가웠다.
그래서 만약에 달래지 않는 다면, 사람들의 눈총과 뒷담화의 주제가 될 것 같아 지금은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려 하려는 수정이를 열심히 달래기 시작했다.
내가 저런 말을 하자, 눈물을 흘리려는 것을 멈추며 나를 쳐다보는 그녀.
“그럼..”
“그럼..?”
“데이트 하자!”
아, 완전히 낚시 당해버렸다.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 낚시.
설리로 인질을 거는 장난문자를 날려, 집에서 상쾌하게 일어난 나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지않나.
이번엔 시트콤에서 갈고 닦은 연기로 데이트를 유도하지 않나.
수정이 꽤나 고단수인데?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SM이 참 연기 연습은 더럽게 잘 시킨다고 새삼 느끼게 되었다.
예전에 윤아가 등산의 진실에 대해 토로해놨을 때도 꽤나 놀랐다고.
“하아.. 너..”
“나 운다?”
“앞장 서시죠.”
“힛.”
나는 당했다는 기분으로 수정이를 노려보았고, 수정이는 또 다시 눈물 연기로 응수하려 하자 내가 졌다는 식으로 앞장을 서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방랑 열일곱세의 소녀다운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서 앞장을 서는 수정이.
이윽고, 내 팔에 팔짱을 낀 채로 누구보다 해맑은 얼굴로 전혀 한적하지 못한 명동거리로 걸어갔다.
“어, 의외로 사람들이 너 못 알아보네. 수정이 뜨려면 아직 한 참 남았구나.”
“이씨이.. 화장하면 인기 많아져.”
“그래, 너 잘났어.”
이렇게나 사람이 인산인해인데, 수정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지 모자만 썼고 화장기만 없을 뿐인데, 이렇게 못 알아보나!?
그러고 있던 찰나에, 지나가던 행인이 ‘어, 크리스탈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괜스레 빨리 뛰며 명동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크리스탈은 신상이 그리 좋은 지 빨리 걸어도 맘에 드는 옷이 있으면 그 쪽 쇼윈도에 촥 달라붙어서는 ‘나 이거 맘에 드는데.’라면서 나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거기에 붙어있는 가격을 보고 지갑 안을 보았다.
하, 매치가 안 돼.
일단은 수정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므로, 뭔가 얼굴을 가릴 것이 뭐가 있을까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래. 선글라스라면 어느정도 커버할 수 있을꺼야.
“수정아.”
“웅?”
“선글라스 가게 가자.”
“응!”
아, 갑자기 왜 이렇게 말을 잘 듣지.
불안했지만, 그래도 수정이의 손을 사이좋게 잡고 선글라스점으로 갔다.
안에 들어가서도, 수정이는 그 손을 놓지를 않았다.
어쨌든 수정이의 지금 스타일에 맞는 선글라스를 한 번 찾아보았다.
수정이의 복장은 나를 만나서 꽤나 이뻐 보이고 싶었는 지, 17세 다운 앙증맞은 치마를 매치한 코디였다.
그렇다면 10대에게 어울릴만한 저 선글라스를 사줘야겠지.
“수정아 어때?”
“힛, 이거 맘에 들어! 오빠가 사주는 첫 선물이라서 더 맘에 들어!”
어린 아이가 된 마냥 기뻐하는 수정이의 모습을 보자니 구매욕이 확 들었다.
살짝 망설였지만, 저것을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성큼성큼 한 발자국 씩 옮겼다.
성큼성큼 자신감 있는 발자국 소리와는 달리, 지갑을 쥐고 있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수정이가 선글라스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어..얼마죠?”
“음, 저 여자 분께서 끼고 계시는 건 15만원이십니다.”
헐.
내가 한 달 동안 여섯시간 씩 휴가 없이 꼬박꼬박 일해서 번 돈 중 벌써 60 퍼센트가 증발해버렸다.
10%에는 매트리스, 10%에는 선글라스, 나머지 40%에는 공과세, 생활비.
이제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은 오직 40% 즉 60만원 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월급 받으려면 3주일 남았는데,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재앙을.
그래도 아까 수정이가 한 말에 가슴이 살짝쿵 뭉클해져서, 그냥 사주기로 했다.
뭐 삼주일 그까짓거 안 먹고 버티면 되지 뭐, 후달리면 티아라 숙소가서 밥셔틀 되는 대신 밥 먹으면 되니깐.
이렇게 말해봐도, 아직도 체크카드를 건네 줄 때 내 손은 미치도록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산을 마친 뒤, 수정이를 데리고 나와서 하늘을 허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오빠! 나 이거 너무 맘에 들어― 고마워! 어? 근데, 오빠 울어?”
“아..아니..”
“지갑이 죽기라도 했어? 표정이 왜 그래?”
“아직 죽진 않았어.. 다만 죽어갈 뿐이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지갑은 죽어서 청구서나 영수증만 남긴다.
세 번째 구절이 참으로 맘에 와닿았다.
어쨌든 이미 써버린 돈 뭐 어쩌겠는가,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는데.
나는 표정에서 허망함을 싹 지우고, 다시 데이트에 집중하자는 심정으로 수정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응?”
“아,아니야.. 그냥 하던 데이트나 계속 하자.”
“응!”
풋, 발랄해서 좋다.
나는 해맑은 수정이의 손을 꽉 잡아주고는 가벼운 발 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러다가 수정이는 자연스레 내게 다시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귀엽게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을 아무 걱정 없이 걸어가는 수정이.
“수정아, 어디 안 들어갈래?”
“응? 왜?”
“이렇게 걷는 거 안 힘들어?”
“으음.. 아니! 난 오빠랑 이렇게 걸어다니는 게 좋은데?”
사실 내가 힘들어서 쉬자는 건 아니고, 어쨌든 차 같은 게 없어도 불평하지 않고 걸어주는 수정이에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이 섞인 채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 수정이 머리에 뭐라도 있나. 오늘따라 평소에 하지도 않던 머리 쓰다듬기를 왜 이렇게 하는 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수정이 머리에서 각질이라도 나오려나.
“수정아, 밥 먹었어?”
“아니.. 아까 오빠가 사준 케익 빼고는..”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진짜?”
“응..”
“그럼 나.. 저거!”
수정이도 아침을 안 먹고 여기로 왔구나.
내가 사준 케익 빼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니, 난 그것도 못 먹었는데.
수정이 먹여주느라, 우우우.. 내껀 사 먹지도 못했어.
여튼, 수정이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곳은 명동의 돈까스 집이었다.
왠지 모르게 아동틱한 느낌이 쎄하게 들었다.
“돈까스?”
“웅! 나 돈까쓰!”
“...돋네”
“웅?”
“아니, 귀엽다고. 그래 가자.”
“우웅―”
오늘따라 수정이의 혀가 꽤나 짧아진 것 같다!?
현재 설리와 지연이와 지은이를 제치고‘오빠의 귀요미’가 되겠어요. 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애교만땅 수정이를 보자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여튼, 안으로 들어가보니 보통 식당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인테리어였다.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메뉴판을 보며 메뉴를 골랐다.
나는 로스까스를 시키기로 하고, 수정이는 아직 못 골랐는 지 갈팡질팡한 눈빛으로 메뉴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정아 골랐어?”
“응!”
“뭔데?”
“이거!”
수정이의 하얀 검지 손가락의 끝을 따라 내 시선이 머문 곳은 어느 한 메뉴의 사진.
돈까스가 있고, 우동이 있고, 밥이 있었다. 그저 노멀하구나 하면서 옆의 한글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어린이세트 A (돈까스 + 우동 + 밥) - 6000원’
어잌후.
“...”
“왜?”
“수정이.. 나이가 몇 살이었지?”
“나? 17살.”
음, 일곱 살이면 몰라도 열 일곱살이면 보통 평범한 로스까스라거나 다른 돈가스 시키지 않나.
우동이 먹고 싶으면 돈까스정식 A를 시켜도 괜찮을 듯 한데.
“어리구나.”
“웅!”
“근데 이건 말이야 수정아..”
“왜.. 안대?”
또 다시 연기 일발 장전 후 작렬.
어쩔 수 없이 수정이의 울먹거리는 애교에 그대로 GG를 치고, 할 수 없이 어린이세트를 시키기로 했다.
잠시 담소를 나누다보니, 완성된 채로 서빙되는 돈가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게 꽤나 먹음직해보였다.
근데, 어린이세트 답지 않게 돈가스 크기가 크다!?
“히잉.. 이거 왜 안 썰어져어..”
“수정아, 나이프 줘봐. 오빠가 썰어줄게.”
하지만 지금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정이가 낑낑대며 돈가스를 썰어보려 하지만 못 썰고 헛칼질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아직 어린 애구나 하며 수정이의 나이프를 빌려와 포크로 돈가스를 찍고 매끄럽게 돈가스를 썰어댔다.
그렇게 돈가스를 다 썰고 다시 수정이에게 돌려주며 ‘먹어.’라고 말하는 찰나에,
“아아―”
“뭐 하니.”
“먹여죠오―”
“...”
“턱 아포― 빨리이―”
수정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채로, 내가 먹여주길 바랬다.
이제는 수정이 애교가 써니의 애교 마저 넘겨버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성인의 애교가 아닌 아직 풋풋한 고등학생의 애교라서 그럴까. 꽤나 치명적이었다.
거기다가 수정이가 원래 이렇게 심하게 애교를 부리는 아해가 아니었지 않은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수정이의 애교에 져주며, 돈가스 하나를 포크로 찍어 수정이에게 먹여주었다.
그러자 수정이는 잘라낸 돈가스를 오물오물 씹어먹으며 어린아이 마냥 헤헤 웃었다.
“히힛.. 오빠가 먹여주니깐 더 맛있다!”
“.... 돋네..”
“응?”
“아냐..”
다행히, 조흔 타이밍에 내가 시킨 로스가스가 나오는 덕분에, 잠시동안은 조용한 분위기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식사 도중에 또 수정이가 먹여달라고 입을 벌릴 때도 있지만, 그리 많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계속 그랬으면, 내가 간병인에 빙의된 줄 알았을거야.
어쨌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돈가스를 맛있게 먹고, 다시 서늘한 명동의 거리를 걸어다녔다.
“좋다..”
“응? 뭐가?”
“이렇게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거.”
“평범한 게 뭐가 좋다고?”
명동의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오랫동안 걷느라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하고 있을 때 쯤,
수정이가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놀을 쳐다보며 말했다.
평범한 게 좋다는 그녀. 난 왜 평범한 데이트가 좋은 지 잠시동안 이해가 안 갔다.
다행히, 그녀가 이윽고 하는 말에 이해가 가긴 했지만.
“평범하다는 게 나한테는 특별한 거야 오빠. 좋아하는 사람과 이렇게 거리를 걸어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데.”
이렇게 말한 수정이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새삼스럽게 수정이는 연예인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주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수정이는 평범한 것이랑 조금 먼 존재.
그래서 더욱 더 평범한 것을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니, 수정이의 속마음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나는 말없이 수정이의 어깨를 감싸안아주며, 수정이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따뜻한 포옹을 하고 있을 때 쯤, 문뜩 내 시야에 한 곳이 눈에 쏙 들어왔다.
“수정아, 평범한 데이트의 끝을 달려볼까?”
“웅?”
“사진 찍자.”
“어?”
“스티커 사진.”
나는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수정이에게 오락실 앞에 있는 스티커 사진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활짝 웃으며 반색하는 수정이.
“와! 오빠, 어케 알았어!? 나 저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
“그래? 그럼 다행이네. 들어가자.”
나는 신나라하는 수정이의 손을 꼬옥 잡고, 스티커사진 기계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는 천원짜리 한 장을 집어넣고, 옆에 있는 꾸미는 용품에서 가발을 꺼내 썼다.
나는 좀 웃기게 찍으려고 아프로가발을 머리에 씌었고, 수정이는 금발 가발을 자신의 머리에 씌었다.
왠지 모르게 금발의 가발을 쓰니, 자매인 걸 인증해주는 듯 제시카와 약간 비슷한 모습인 수정이었다.
“찍어볼까?”
“웅!”
드디어, 사진 찍기 버튼을 누르고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브이-”
“브이-”
맨 처음엔 둘이서 평범하게 나란히 브이를 하는 포즈.
브이 포즈를 취하자 몇 초 뒤 플래쉬가 팡하고 터졌다.
“야아.. 볼 자바 때기지마-”
“히히.. 오바도 때기며서-”
두 번째는 장난스레 서로의 볼을 잡아땡기는 포즈.
수정이의 볼살은 꽤나 말랑말랑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볼살을 잡아당기는 것 같고 티격태격하다가 플래쉬가 또 다시 한 번 ‘팡’ 하고 터졌다.
이젠 마지막 컷.
“마지막은 뭘로 할까.”
“오빠 가만히 있어봐아.”
“왜?”
‘쪽’
마지막 컷의 포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수정이는 갑자기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했다.
나는 수정이가 무슨 포즈를 취하려는 지 몰랐기에, 그래도 일단은 수정이의 말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수정이는 촬영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내 볼에 말랑말랑한 입술의 촉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플래쉬는 마지막으로 ‘팡’하고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