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여든 두 번째 과외.

노동의 시간으로 알차게 주말을 보내고, 어느새 체력을 비축하라고 있는 주말이 체력을 낭비하는 날로 변질되어버린 나의 일상에

한숨을 쉬며 오늘도 학점과 월급 세이브를 위해 까리한 운동화를 신은 채 문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햇님이 어디로 출장이라도 가셨는 지, 햇님이 있어야 할 위치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덩어리들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나는 이렇게 흐린 하늘의 모습도 좋아서 휘파람을 신나게 불어대며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엘레베이터를 기다렸다.

“흐아암.. 심심ㅎ..”

“민식아, 안녕!”

“응. 은정누나구나, 안녕.”

이제 이런 가벼운 인사 따위는 별 부담되는 것 같지도 않아서, 시크하게 누나의 인사를 받아쳐줬다.

그리고 엘레베이터에 양 발을 들여놓고 문이 닫힐 때 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보고 싶었어!”

“으음!? 은정누나 갑자기 왜 이래!? 반가움의 표시는 일단 이 팔을 떼고 그냥 손만 흔들어도 괜찮잖아.”

그저 가벼운 손 흔들기로 끝날 줄 알았건만, 주말부터 갑자기 나에게 적극적으로 굴기 시작하는 은정누나였다.

가족 품에 있는 듯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은 괜찮았지만, 일단 너그럽지 못한 주위의 시선들을 감안했다.

그래서 나의 몸에 진드기 마냥 달라붙은 은정누나의 몸뚱아리를 떼어내고,

은정누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린 꼬마에게 충고를 해주는 아저씨의 말투로 누나에게 말을 했다.

그렇게 훈계를 하다보니 천둥 소리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느껴지는 엘레베이터는 어느새 일층에 도착했고,

난 그렇게 충고를 해도 진득하게 포기하지 않고 달라붙는 은정누나를 다시 떼고, 겨우겨우 엘레베이터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나 학교 갈게. 나중에 봐.”

“히잉.. 민식아.. 나중에 꼭 나 봐야 돼.. 잘 가..”

“어엇, 왜 이렇게 말투가 아련해. 어차피 내일 아침 아니면 오늘 저녁에도 엘레베이터에서 볼텐데.”

그래도 은정누나는 나와 몸까지 뜨겁게 섞었던 사이였으므로, 그렇게 상처받게 누나에게 행동은 안 하고

다시 시크한 모습으로 돌아와 살짝 손을 흔들어주니, 이 누나가 어제 ‘고전시가’라도 섭렵이라도 한 듯,

표정에서 ‘가시리’의 주제가 묻어나올 정도로, 대놓고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닿지 않는 팔을 뻗는 은정누나였다.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귀여운 은정누나의 모습이긴 했지만, 이렇게 여유부리다간 학점이 야무지게 깎여서 자칫하다간

학사경고도 야무지게 먹을 수 있으므로 서둘러서 걸음을 재촉하며 캠퍼스로 걸어가는 나였다.

**

음, 요즘 은정언니의 모습이 자꾸만 수상하게 느껴져.

내가 봤을 때는 마주친 것도 자주 있었다고 인정은 하지만, 포옹을 할 정도로 은정언니가 저렇게 적극적이고 여자다운 모습을 보이는 건

떴다 그녀 시즌 4 촬영 갔을 때, 천둥이랑 파트너 된 거 이후로 처음인데.

뭐, 그 때는 적극적이진 않고 조신한 여자다운 모습만 보여서, 은정언니답지 않게 시시했었는데.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저리도 친해질 수 있는 거지?

- 효민의 현장 리포뜨.

“1차 휴식시간입니다. 패널 분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쉬셔서 힘내주세요.”

“흐암, 스타골든벨은 재밌긴 하지만 힘들어, 그치 언니?”

두 시간에 걸친 스타골든벨 아침 녹화가 끝나고 주어진 30분의 점심시간.

언니들은 따로 밥 먹고 온다고 먼저 대기실에서 빠져나가고, 막내들은 다른 그룹 막내들이 와서 같이 밥 먹자라고 하니까 귀엽게 ‘콜’이라 외치면서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결국, 티아라 대기실에 사람 흔적이라고는 ‘뭐 먹을까.’하면서 곰곰히 고민하고 있는 나와 뭐가 그리 바쁜 지 핸드폰을 한 시라도 떼놓지 못하는 은정언니가 대기실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

은정 언니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핸드폰에만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나마 말을 할 수 있는 틈이라고는 언니가 문자를 보내고 답장이 오기까지의 기다리는 시간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 박선영. 틈새를 잘 파고드는 날카로운 여자가 아니였던가.

나는 잠깐의 그 찰나에 은정언니에게 떠보기 식으로 질문을 했다.

물론 의심스러움이 한 스푼 가미가 된 질문으로 말이다.

“언니이. 어디에 그렇게 문자를 바삐 날려?”

“히히. 그냥 친구.”

‘그냥 친구가 아닌 것 같은데에?’

라고 은정언니를 몰아붙이면서 의심스러운 폭탄을 야무지게 한 방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일단 심증은 어느정도 확보가 된 것 같은데, 물증이 딱히 없으므로 물증도 어느정도 모이면 그 때 날려버려야지.

음, 근데 왜 그렇게 은정언니는 그 남자에게 호감있게 행동하는 걸까.

그 이유가 뭔지 무지 무지 무지 궁금해 !!

힝, 그 전에 우선 배가 고프니까 빈 속 부터 채워야 겠다.

“은정 언니, 이러다가 배가 등가죽에 달라 붙겠어. 가자!”

“읭? 어디..?”

“어딜 가긴, 식당 가야지. 그리고 문자 좀 그만 보냉!”

나는 가자고 해도 망부석처럼 소파에 앉아있는 언니를 강제로 일으켜, 거의 끌고 가다시피 은정언니를 잡고 근처 식당까지 걸어갔다.

그래도 변함없이 핸드폰을 붙잡고 있길래, 살짝 이마에 빠직마크를 새긴 나는 언니의 핸드폰을 강탈하고 일단은 식당까지 러쉬했다.

언니는 내게 핸드폰을 뺏기자, 급히 당황하기는 한 듯 방방 제자리에서 뛰며 나를 쫓아왔다.

- 효민의 현장 리포뜨 끝

**

날씨가 점점 가을 날씨가 되가는 구나.

아침 저녁으로 슬슬 으슬한 기운과 닭살이 돋는 것을 보자면, 요거슨 여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것이 누가 봐도 가을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휴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랑스러운 나의 직장에서 나를 제외한 직원 전부에게 휴가를 주다니.

이것이 바로 정규직과 파트 타임 계약직의 차이점이라던가.

결국엔 오늘 나는 눈으로 보기만 하던 커피와 도너츠 제조를 하고, 서빙도 하고, 계산도 하고, 주문도 받는 완벽한 노동 기계가 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카페에서 노조 활동을 벌이고 싶으나, 아직 딱히 내 의견에 따르려고 하는 다른 임직원들은 안 보여서 실패로 돌아갈테고,

사장님은 더 게이 짓을 해가며 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려고 하시겠지.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딸랑딸랑’

“어, 손님 오셨네. 안녕하세요. 무엇을 드시겠어요?”

“하. 일단 아메리카노 한 잔 줘요.”

그렇게 저 멀리 동네 친근한 산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멍때리기 식의 명상을 하다가,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미니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나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그 종소리에 난 문 쪽을 쳐다보니 왠지 모르게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와서는 카운터 앞 쪽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을 받으러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 다른 가게들은 다 셀프로 주문하더만.

도대체, 어째서 우리 가게만 웨이터가 따로 있는 거야. 정말 아날로그적인 커피 가게로다. 우우우.. 다방도 아니고..

그래도 월급은 아르바이트 치고는 쎈 편이니, 불만은 고이 학으로 접은 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대신, 주문지 대용으로 쓰는 포스트잇을 가져가서 한 쪽엔 볼펜을 들고 그가 주문을 하기 만을 기다렸다.

내가 무엇을 드시겠냐고 묻자, 존니스트 차갑고 갸소롭게 웃음을 지으면서 아메리카노 주문을 했다.

나는 그 웃음에 살짝 당황해했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리며 포스트잇에 아메리카노를 펜으로 적었다.

그리고 분명히 커피만은 시키지 않을 테니, 다른 것도 물어보았다.

“예, 디저트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도넛츠 종류하고 케이크 종류가 있는데.”

“하. 그럼 치즈 케이크 하나 주고.”

말의 서두마다 입꼬리를 기분 나쁘게 올리면서 썩소를 지으며 말하다니,

이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다.

갸소롭게 웃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 손님. 오늘 오셨던 손님 중에서 최고난이도의 플레이를 요구할 것 같은데?

여튼, 나는 펜으로 포스트 잇에다가 치즈 케잌까지 추가 시킨 다음, 주문을 확인 식으로 한 번 물어보았다.

“예, 치즈 케이크 하나. 아메리카노 아무 것도 추가하는 것 없이 하나요?”

“하. 그렇게 줘 보던 가.”

말투를 싸가지없게 하는 손님이었지만, 나는 종업원이고 아르바이트생이니까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가며

주문이 적혀있는 포스트 잇을 들고 본격적으로 주방에서 제조를 시작했다.

어디 보자, 아메리카노는 이렇게 만들고.  치즈 케이크는 이렇게..

그렇게 만들다보니, 때마침 치즈 케이크가 완성 되었을 때, 아메리카노도 마찬가지로 완성되었고,

난 따끈따끈 한 음료와 케잌을 들고 ‘하.’로 말을 시작하는 청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만들기 전에 살짝 지갑에 끼워져 있던 신분증에 적힌 이름을 보니, 아마 ‘최....대민?’이었던가.

여튼 여느 때와는 달리,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갸소로운 웃음을 날리는 이 시대의 시크남 ‘최대민’씨는 하자가 만든 음식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라고 생각하며 궁금했다.

그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케이크도 한 숟가락 떠먹으면서 맛을 보더니, 이내 얼굴에 진지한 기운만 가득 채웠다.

“하. 젠장. 하. 쓰레기. 하. 그러니까. 하. 케이크를. 하. 왜 이따구로. 하.”

그는 아메리카노와 케이크의 아스트랄한 조화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지, 격한 어조로 말을 진지하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말의 시작 부분마다 쓰이는 ‘하.’라는 소리 때문에 손님의 불평이 불만으로 들리기는 커녕, 오히려 웃긴 상황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 미친. 하. 커피는. 하. 또 왜 이렇게. 하. 쓴거야. 하. 망할. 하. 도대체 어떤 새끼가. 하. 커피하고 케익을 만든거야.”

   

그렇게 ‘최대민’이라 불리는 냉혹한 썩소의 사나이의 개그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는 그가 가고 난 뒤 관계자 출입 금지 구역인 곳의 간이 침대로 가서 방금 가버린 차도남의 말투를 생각하면서 

실성한 사람 마냥 미친듯이 쪼갰다. 

처음에만 ‘하.’ 집어 넣으면서 갸소로이 웃을 때는 왠지 모르게 청자의 입장으로서 듣기 안좋았는 데,

사람이 흥분하면서 ‘하.’를 계속 집어넣으니까 고조된 어조에 진심까지 묶여 있는 것 같아서,

더 웃겼다.

푸흡, 푸힉, 푸하하. ‘하. 미친. 하. 쓰레기.’라니 이거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터지는 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