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일흔 아홉 번째 과외.

시간은 그저 평범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시간만 그저 평범하게 흘러갔을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큐리언니의 말을 무시하고 민식이네 집에 갔다왔을 때, 큐리언니는 그 떄마다 나를 닦달했지만

우울한 표정으로 밖에 나가고 민식이네에 놀러갔다오면 반색하는 나의 표정에 점차 내가 민식이네 집에 놀러가는 것에 대해,

별로 제재를 안가하는 큐리언니와 다른 언니들이었다.

“에? 매니저오빠. 오늘은 저 스케쥴 취소됬어용?”

“응. 미안하지만, 애들 데려가야 되니깐 너 혼자서 여기부터 걸어서 가야겠다.”

“뭐, 괜찮아요! 오랜만에 혼자 이렇게 걸어보는 것도 낭만이니깐.”

“은정이는 긍정적인 마인드라서 다행이야.”

“히잇..”

오늘 야외로 나가서 하는 스케쥴은 촬영장소가 지금 우천인 상태라서 취소가 되버렸다고 매니저 오빠가 말해줬다.

그리고 방송국 안에서 스케쥴을 진행하는 애들을 데려다 줘야 한다면서, 어쩔 수 없이 여기서부터 혼자 걸으라고 말하는 매니저오빠였다.

먼 곳이었다면 볼을 부풀리며 저항을 해봤겠지만, 아파트 앞에 있는 공원에서 내려줬기에 그냥 오랜만에 산책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쿨하게 밴에서 내린 뒤 스케쥴 뛰러 가는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을 해주고는 시원한 공기가 스며드는 공원을 느긋하게 산책하기 시작했다.

“히이.. 오랜만에 산책하니까 기분 좋다..”

길지는 않지만 적당하게 펼쳐진 산책길 위를 걸으며 오전의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 쯤, 

나의 감정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산책길 위로 굵은 빗방울 하나가 뚝 하고 떨어졌다.

‘비인가..?’

그렇게 느끼며 나는 손가에 묻은 빗자국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평소에 비를 맞아서 흠뻑 젖는 것을 싫어했던 터라, 나는 비가 오자 아쉽지만 산책을 하는 것을 멈추고 하이힐의 굽소리를 또박또박 내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동안에도 빗줄기는 더 세져 빗방울이 수많은 나의 머릿결을 타고 흐르며 흠뻑 적셨고,

옷 마저도 빗물에 젖기 시작하며 내 살갗과 점점 찰지게 달라 붙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자칫하면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서 안에 있는 속옷이 그대로 달라붙어 보여서 창피한 광경을 연출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하이힐에 낀 발이 까지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그저 묵묵히 집을 향해 뛰어갔다.

‘히잉.. 열쇠열쇠열쇠 어디갔지..?’

다행히 집을 향해 뛰어갈 때는 주변에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비에 꽤나 젖어 비에 젖은 생쥐꼴로 물로 범벅된 발자국을 남기며 집 앞에서 열쇠를 찾았다.

내 가방 이곳 저곳을 뒤적거려봐도 열쇠란 사물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여는 시스템이었으면 좋으련만, 참 아쉬웠다.

그렇게 그냥 묵묵히 멤버들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다가,

문뜩 내가 멤버들이 올 동안 은신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히.. 바보같이.. 민식이네 집에서 있으면 되는데..’

*

“오늘은 소나기라도 내리나. 억수로 쏟아붓네.”

한적한 오전의 티타임.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돈이 쪼달려서 주전자에 물을 데워서 따뜻한 물을 만든 뒤 녹차 티백을 넣어 녹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뭐, 같이 곁들이는 디저트를 카페에서 쌔벼온 초코쿠키를 집어서 한 움큼 베어물며,

불도 안 킨채, 적당히 분위기 있는 거실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비 말이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잠시동안 한 눈 판사이에 시야가 확보가 안 될 정도로 미친 기세로 쏟아부어지고 있었다.

‘똑똑똑.’

“누구지..?”

그렇게 잠시 비 때문에 분위기에 젖어 다시 녹차를 음미하고 있을 때 쯤,

잠시나마 내가 감흥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듯, 현관에서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그 소리에 짜증이 났지만, 벨튀 같은 짓이 아니라면 그냥 자애로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자 하며

잔을 내려놓고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세요?”

“민식이 있구낭! 나.. 은정누나야. 집 키를 같이 사는 친구들이 가져가서, 잠시 네 집에 있다가 친구들 오면 갈게!”

은정누나란 소리에 난 더 붙이는 말 없이, 잠궈두었던 문을 열고 은정누나를 반겼다.

근데, 세찬 소나기를 맞기라도 한 건지, 언밸러스하게 내려진 앞머리는 비에 젖어 이마에 촥 달라 붙어있었고,

누나가 입은 나풀나풀한 블라우스마저도.. 크헐.. 하얀 살결에 달라 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불투명하게 비쳐지는 연두색 가리개에 살짝 코에서 붉은 빛을 띄는 물을 흘릴 뻔했으나,

다행히 진정되어가는 나의 마음은 건전하게 그녀를 거실로 인도하고, 흠뻑 젖어서인지 몸을 벌벌 떠는 은정누나에게 따뜻한 담요를 건네주었다.

“칠칠맞게 비를 이 정도 될 때까지 맞고 다녀?”

“히잉.. 안 맞으려고 뛰었는데도 막막 퍼붓는 바람에 이렇게 됬다구!!”

“에휴.. 이러다가 감기 걸리니까, 일단 욕실 빌려줄테니깐 씻어.”

“옷은!? 수건은!?”

“내가 빌려줄테니까 걱정마.”

나는 흠뻑 젖은 생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은정누나의 모습에 한 숨을 쉬며, 그녀에게 씻으라고 제안을 했다.

은정누나는 옷과 수건이 없다고 툴툴거렸지만, 그건 내가 빌려주면 될 일이니 안 씻겠다고 칭얼거리는 은정누나의 등을 밀며

욕실로 그녀를 보내고는 잠시 후 서랍에서 누나에게 맞을 맞한 사이즈의 티와 분홍색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 때 누나는 살짝 벗기라도 했는지, 문에 찰싹 달라붙어 기대며 ‘어서 주고 나강!!’이라며 귀엽게 수줍어진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재빨리 내가 건네 준 옷가지들과 수건을 받고는 문을 쾅하고 닫았다.

얼굴을 재빨리 안 치웠으면, 내 안면은 문에 광속으로 충돌해서 피떡이 될 뻔했을 위기에서 운 좋게 벗어나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 방 안에 있는 컴퓨터를 켜서 현명한 도시인의 인터넷 서핑을 즐겼다.

     

한참 인터넷에 집중하고 있을 때, 욕실에서 문이 열리면서 따뜻해보이는 하얀 김이 욕실 밖으로 새어져나왔다.

그리고 사이즈가 약간 컸는 지, 좀 널널한 옷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채 아까의 창백한 모습과는 달리 촉촉한 모습으로

나오는 은정누나였다. 

나는 그런 누나의 모습에 다시 고이 접어둔 담요를 건네주곤 거실 투명테이블 뒤에 있는 소파에 앉혀 담요를 어깨에 걸쳐준다음,

녹차를 급하게 제조해 누나에게 대접해주었다.

그러자 은정누나는 내가 건네준 녹차를 홀짝 홀짝 마시더니, 이내 내려놓고 건너편에 나를 앉힌 뒤 잡담을 시전하려 했다.

나는 그 낌새를 한 번에 눈치채고, 다시 컴퓨터를 향해 걸어가니 은정누나가 나의 바짓깃을 붙잡고 말을 했다.

“컴퓨터 하지 말고 나랑 대화하자? 응?”

“풋, 안 그래도 그럴려고 컴퓨터 끄러가는거야.”

흥핏쳇.

컴퓨터 하면서 은정누나 재울려고 했는 데,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버렸다. 우우우우..우우..

하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묵히고 달아오른 컴퓨터님을 잠재워주신 다음,

아쉬운 발걸음으로 은정누나의 건너편에 앉아서 대화를 나눌 준비를 하려는데, 은정누나가 잠시 멍을 때리는 바람에

대화로 시작한 이 모습은 흡사 내가 취조하고 은정누나가 취조를 당하는 장면으로 변질되어버렸다.

“근데, 민식이 너는 이상형이 누구야?”

“나? 예쁘고 안 예쁘고는 따지지 않고, 그냥 마음씨가 착하고 내 말 잘 들어주는 여자가 좋아.”

“아∼ 그렇구나..”

은정누나는 한 동안 멍을 때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는 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또 쳐다보더니,

의미없이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천천히 떼며 말했다.

이렇게 계속 안 말하다간 은정누나 입에 거미줄이 쳐 질 기세였는데, 다행이다.

근데 물어보는 질문이 시작부터 이상형에 관련된 질문이라니.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연예인처럼 방송용 멘트를 약간 섞어주고 대답해주는 나였다.

사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외모는 아주 살짝 따진다. 근데 은정누나는 예쁘니까 패스.

내가 이상형에 대해 말을 해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했다라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기의 이상형도 말하려는 심상이었다.

뭐, 누나의 입에서는 강동원이나 조인성이나 원빈이나 장동건이나 이승기나 송중기나 그런 우월한 외모를 가진 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겠지. 뭐 외국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조니뎁이나 조쉬 하트넷이나 브래드 피트 같은 사람들이 입 밖으로 나오겠지.

나는 누나의 이상형이 다른 사람처럼 만인의 이상형이 아닌 독창적인 이상형이었음 좋겠다 생각하며,

남은 뜨거운 녹차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누나가 어떤 이상형을 말할 지 궁금한 눈빛으로 누나의 귀여운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나는 나에게 이상형을 말해주기 직전에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수줍고 풋풋한 소개팅을 앞선 아리따운 소녀의 볼 만큼이나 발갛게 붉혔다.

난 서,설마 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보성 녹차를 드링킹하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 몇 초동안 정적인 상태로 기다렸을까.

“난 너 같은 남자가 좋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상큼한 오 어절로 구성된 문장에 입 안에 가득 머금고 있었던 녹차로 인간 분수쇼를 벌일 뻔했다.

하지만 애써 나와 그녀와 탁자를 더럽힐 짓을 가까스로 참으며, 잠시 망치질을 한 듯 달아올랐던 내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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