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쉰 세 번째 과외.

“아따, 필기 참 옴팡지게 했구만.”

프랑스에서 배우는 영어는 한국에서의 공부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고 치자면, 사람을 극도적으로 미치게 만드는 엄청난 필기량과

한국에선 교수님이 한국어로 말했고, 프랑스에선 영어를 쓰는 정도였다.

다행히 아예 읽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불어 쓰는 것보다 낫긴 했다.

눈이 소복히 쌓인 것 같이 새하얗던 엠마의 손가락도 그렇게 벌겋게 달아올랐으니,

필기량을 어느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일줄이야..

다행히 내일은 공강이어서 몸도 정신도 자유로워져 새벽까지 엠마의 노트 안에 가득 적혀있던 필기내용을

한 자의 오타나 빠진 것 없이 빼곡히 나의 뉴 노트에 새겨썼다.

“근데 엠마가 가자고 했던 그 축제, 한 번 가볼까. 딱히 여기와서 수면에 자주 빠지긴 하지만 놀았던 경험은 없잖아.”

고작 프랑스에 온 지 어느덧 사흘 째.

다시 프랑스를 떠날 때 까진 열흘 그리고 여드레.

20박 21일에서 고작 14.272%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흘의 시간에서 반을 딥 슬립으로 보냈으니 제대로 학교생활 한 시간은 7 퍼센트 밖에 되질 않는다.

그러니 놀았던 경험은 당연히 없을 수 밖에 .. 라는 생각이 사실이었군.

필기라는 고된 수련을 마치고 나니 음침한 기운의 수마의 무리가 무더기로 나의 몸을 뒤덮여왔다.

나는 방어할 겨를도 없이 침대로 기어가지도 못하고 책상에서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히히. 오늘이 드디어 가는 날이구나.”

에프엑스 멤버 다섯 명이 일제히 밝은 표정을 지으며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녀들에게 주어진 휴가는 12박 13일, 신인치고는 굉장히 여유로운 휴가였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휴가비까지 합한 다면 여기가 진정 SM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배려심이 깊은 것이 아닐까라고

서술자인 나는 생각해본다.

에프엑스의 애교와 오빠팬 지분의 반을 맡고있는 애교쟁이 설리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했다.

분홍색의 딸기 시럽 가루를 살짝 얹힌듯한 그녀의 수줍은 볼터치는 그녀의 귀여운 외모를 한 층 더 부각시켜주었다.

“작년에 갈 때도 조금 떨렸는 데, 이번엔 더 떨리는 것 같아. 설리야 너도 그래?”

“으응- 히힛.”

수정이도 설리와 매한가지로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는 프랑스행이 눈 앞에 다가오자 자신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귀여운 반응을 보이는 둘의 모습을 엄마의 시선으로 훈훈하게 쳐다보았다.

“자,이제 뱅기표도 받았으니까 공항으로 곧장 고고싱하죠!”

설리의 당찬 목소리에 나머지 멤버들은 곧바로 그녀를 따르며 엘레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리고 다섯 소녀의 몸을 실은 엘레베이터는 매끄럽게 동력기에 의해 아래로 움직였다.

지하 주차장에 있는 새까맣고 광택이 좔좔 흐르는 밴은 부릉부릉 시동소리를 내더니 다섯 소녀를 태우고

점점 아파트로부터 서로의 거리를 늘여트려놓았다.

// ♪- ♩- //

작년의 경험과 추억을 토대로 오순도순 차 안에서 떠드는 다섯 명의 소녀들 중 설리의 핸드폰에서

귀여운 벨소리가 밴에 울려퍼졌다.

설리는 이윽고 그 전화의 출처가 ‘유리’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리언니?”

〔응. 그래, 설리야. 너네들 프랑스 간다며?〕

“네, 그런데요?”

〔파리대학교로 공연하러간다며?〕

“맞아요-”

〔그럼..설리야,민식이도 그 대학교에서 다니니까 발견하는 즉시 그의 행각을 낱낱이 보고해. 알았지?〕

“내가 왜 그래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의 부탁이니까 그러도록 해볼게.”

〔응. 그래, 난 너만 믿는다. 설리야- 그럼 언니는 이만 전화 끊을게.〕

그리고 뚝 하고 끊겨진 전화.

설리와 유리의 통화의 내용은 모종의 계약은 담겨있지 않고, 다만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얻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설리는 민식에 대해 일들을 낱낱이 문자나 전화로 보고하고, 유리는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뒤 소녀들의 몸이 실어진 프랑스행 비행기는 넓고 광활하고 청량한 하늘빛 창공을 향해 움직였다.

***

“오늘은 그렇게 버틴다며 눈을 부릅 뜨더니, 역시나 민식이 너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하하.. 엠마야 미안. 오늘도 좀 빌려줘라-”

“에휴, 못 말린다 못 말려. 너 교환학생으로 와서 좀 다르겠구나 싶었는 데, 공부쪽으론 말고

  수면 쪽에서 진면모를 보이는구나. 자, 여기 또 밤 새워서 열심히 필기하렴.”

“땡큐. 어? 근데 엠마 너 손이 왜 그래?”

오늘도 여지없이 3시간을 야무지게 수면으로 보낸 나였다.

이로써 이번주 강의 9시간은 영어의 세계 대신 암흑의 세계로 빠지며 시원하게 날려먹고.

결국엔 부분적으로 손, 확대하면 정신과 육체가 고생하는 새벽의 필기를 또 다시 감행해야했다.

아, 이제는 이 손에 느껴지는 고통마저도 점점 무감각해질것같군.

그것보다 나에게 노트를 벌써 세 번째나 건네주는 엠마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조금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상처가 없는 듯 보였던 손가락에 뭔가 베인 듯한 상처가 나타났다.

“아,이거? 연필 깎다가 실수로 베인거야.”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어디 봐봐.”

“나 괜찮아.”

“뭐가 괜찮아! 여기 봐봐 손이... 괜찮구나.. 음.. 미안..”

괜히 걱정했나보다.

피도 멈춰있었고 상처도 그 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표피가 살짝 벗겨진 정도였다, 몇 일이면 금방 아물어버릴 그런 상처말이다.

다른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오버 좀 해보고 싶었는데, 오히려 역효과만 제대로 발동된 상황이었다.

버프로 뻘줌해지는 건 보너스.

“민식아.”

“응?”

“오늘 우리학교 축제 있는 거 알지? 너도 올거야?”

“고민해봤는데... 한 번 가볼려고. 항상 새벽에 필기하면서 밤을 지새울 순 없잖아?”

“히힛. 좋은 자세네. 그래! 1시간 뒤면 공연과 함께 시작이니 얼른 가자-”

눈부신 금발이 등불에 비춰지며 은은하게 황금빛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리고 미미한 상처가 새겨진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그녀의 손 보단 더 까만 나의 손가락과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우며 강의실 밖으로 나를 인도하는 금발의 엠마였다.

여자의 손을 잡는 건, 소녀시대 애들이나 에프엑스 애들과도 많이 잡아봤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게 주황 빛으로 물들어진 노을 진 하늘을 보며 강당으로 걸어갔다.

// 웅성 - 웅성 - //

강당으로 들어서니 여기 저기에서 각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퍼졌다.

크고 웅장한 계단을 한 걸음씩 터벅터벅 소리를 내며 내려가니 무대와 우리 둘의 모습이 더욱 더 가까워졌다.

이리 저리 움직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려대는 무대 스탭들, 참 많이도 고생한다.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도 한 번 스탭 경험을 해봐서 그 힘든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자판기 커피라도 하나 뽑아서 스탭들의 안쓰러운 등을 토닥거려가며 커피를 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곧 시작하니까, 여기 앉자.”

“응..”

엠마가 여전히 나의 손을 잡은채로 거의 무대 앞에 있는 자리를 석점하며 나보고도 앉으라고 재촉했다.

나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엠마를 따라 그 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예술의 전당에 있는 의자처럼 쿠션감이 있고 푹신푹신한게, 프랑스에 오면서부터 딱딱한 의자에만 앉다시피 했던 터라

감회가 새로웠다.

“어, 갑자기 불이 왜 꺼지지.”

“공연이 시작한다는 뜻이야. 이제 곧 무대 쪽에서 스포트라이트 쏘아질걸.”

엠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둑어둑했던 강당의 모습에서 한 줄기의 빛이 무대를 향해 쏘아졌다.

그 일광은 곧 두 줄기, 세 줄기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후엔 다섯 줄기의 빛이 무대 이 곳 저 곳을 샅샅이 비추었다.

나의 시선은 그 빛의 동선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백색 ( 白色 ) 의 눈부신 아우라는 점점 무대 중앙으로 모여 합성되었다가 분산되기도 하였다.

아무도 없었던 빈 공간에서 비밀스러운 발굽 소리가 들려오면서 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 흑의 공간에서 누군가 

무대를 채우고 있을만한 느낌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샤르륵 - //

강당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걷혔다.

관객석 윗층 부분부터 서서히 빛이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되지 않아 그 빛은 내 쪽으로 와 나의 레드 와인색의 머리를 살며시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에 있는 곳까지 와서야 찰나의 움직임을 마쳤다.

그러자 한 번에 내 시선에 다섯 명의 실루엣이 스며들었다.

그 실루엣을 보고나서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약 콜라잔이라도 있었다면 그걸 땅바닥으로 떨어트릴 만큼 놀라움이였다라고 할까.

“One , Two , Three ! 안녕하세요. f(x)입니다 !”

나의 추리를 확정짓는 목소리의 조합에 나의 뉴런들은 점점 바빠지는 듯 보였다.

점점 짙어지는 호흡, 확장된 동공, 잠잠했던 손가락까지 가만히 있질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불안한 눈빛으로 무대를 슬며시 쳐다보았는데, 이럴수가.

빅토리아 누나와 눈을 제대로 맞추고야 말았다. 

날 본 뒤, 갑작스럽게 눈동자가 커지는 빅토리아 누나의 모습에 서서히 내게는 불안감이 덮쳐왔다.

왜냐하면 빅토리아 누나랑 눈을 마주치기 전 까지만 해도 엠마와 사이좋게 얘기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주마등처럼 프랑스로 떠나가기 전에 그녀들이 했던 ‘ 딴 여자에게 한 눈 팔지마. ’라는 말이 나의 뇌를 툭 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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