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730화 (713/730)

〈 730화 〉 730. 또 다른 신수(5)

* * *

콰아앙!

거대한 체구에서 나오는 난폭한 폭력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목숨을 간단히 앗아가는 무자비한 폭력이다.

“크아아악!”

바실리스크가 휘두르는 꼬리의 여파에 휘말린 모험가가 그 압도적인 질량의 충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허공을 날았다.

허리가 그대로 분쇄되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꺾여져 즉사하는 불합리한 폭력은 어떤 의미 가장 당연한 흐름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출현한 검은색의 기사들과 청색의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싸움의 양상은 당연히 100 대 9라는 불합리한 숫자의 열세 차이로, 에린이 소환한 청색 백귀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

“하하!”

에린을 따르는 백귀들 중 트리스탄은 자신을 향해 퍼부어지는 폭력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듯이 웃었다.

여신의 권능이라는 혜택을 부여받아 생전의 육체를 되찾은 그는 현재 신수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청색의 갑옷을 관통하여 데미지를 주는 검은 백귀들의 공격이 기쁘기 그지없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부과되는 고통을 즐기고 있는 미치광이나 다름이 없는 감정의 흐름이었지만, 지금 백귀들에게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의 흐름으로 작용하여 기쁨의 감정을 낳았다.

‘살아있다.’라는 감각을 실현시켜주는 적들의 공격.

그것은 자신의 몸이 정말로 생전의 육체를 가지고 부활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된다.

온기와 추위를 느끼고, 수면욕과 식욕이라는 것을 느꼈을 때의 어색하면서도 기쁜 것과는 또 다르다.

전장에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이 사투가 너무나도 기쁘다.

“죽어서도 싸워보자고! 동지들아!”

그것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에린을 따르는 다른 푸른 백귀들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라는 적을 배제하기 위하여 필사의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검은색의 기사들.

구미호가 소환한 검은 백귀들에게 한 말이었다.

백귀가 된 계기나 사정은 모두 각기 다를지라도, 아마도 그들 또한 죽어서도 이 사투를 잊지 못하여 구미호의 백귀가 된 자들일 터.

그렇다면 이제는 다른 것 따윈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필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따르는 주인의 명령 뿐.

그로 인해 만들어진 이 전장에는 자신이 있고, 사투를 벌일 수 있는 적이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한 검은 백귀가 거대한 할버드를 들어 올렸고 망설임 없이 그것을 트리스탄을 향하여 내리찍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히는 평범한 공격이었지만, 그 공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도와 질량의 힘은 그대로 땅을 분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그것을 인식한 트리스탄은 곧바로 보법을 밟아 아래로 내리 찍히려는 할버드의 공격 사선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백귀들이 트리스탄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카아앙!

양쪽에서 진입해와 무기를 휘두르는 검은 백귀들의 공격을 양손의 권갑으로 방어해내긴 했지만, 충격의 영향 때문인지 순간 몸이 경직의 상태에 빠졌다.

좌우의 퇴로는 검은 백귀들에 의해 차단당했고, 이제 와 뒤로 몸을 빼봤자 저 거대한 할버드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야지.’

트리스탄은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돌진했다.

정면으로 내려 찍히는 할버드의 날이 그대로 어깨를 들이받고 한쪽 팔이 힘이 실린 질량의 공격에 못 이겨 뜯겨 나간다.

어차피 그를 포함한 백귀들은 아무리 데미지를 받아 신체 일부가 손상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복구된다.

그것은 그들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근간이 바로 신수인 에린의 마력이기 때문.

물론 에린의 마력이 모두 깎여나가 그 잔량이 0이 되어버린다면 더는 복구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그것을 신경 쓰는 백귀가 아니었다.

1의 데미지를 주기 위하여 10의 손실을 감수하는 어리석은 선택지는 뼈를 내어주고 살을 취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손해의 교환이라도 그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콰아앙!

한쪽 팔이 뜯겨 나가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버드를 내리찍은 검은 백귀의 품안으로 파고든 트리스탄의 권격이 검은 백귀의 몸통을 터뜨렸다.

분골쇄신이라는 사자성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미련한 전투의 양상은 당연히 다른 백귀들 쪽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

“하핫.”

트리스탄은 이 전투의 양상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웃음을 보였다.

그가 뒷일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내키는 대로 무모한 전투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진형 쪽에도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군으로 있기 때문이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의 바람]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선풍과 함께 전장에 난입하는 유려한 선의 궤적은 깔끔하게 검은 백귀들의 몸통을 그어갔다.

뒤늦게 만들어지는 균열로 인해 검은 백귀들의 갑옷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선이 그어진 부위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 곡선의 궤적은 그렇게 수십의 검은 백귀들을 유린했다.

“하하. 진짜 괴물이시네.”

이 광경이 단 한 명의 검사가 전장에 개입함으로서 생긴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트리스탄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술적이다.

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정교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움직임.

거기서 만들어지는 검격의 연속은 마치 무(?)라는 예술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유려한 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갑작스레 난입한 시에테의 검격에 감탄한 것은 트리스탄 뿐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진형에 있는 다른 푸른 백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적인 검은 백귀들의 이목마저 쏠리게 만들 수준.

전장의 흐름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 ◆ ◆

멀찍이서 백귀들의 싸움을 관망하고 있던 구미호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전장의 흐름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신수의 마력을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는 에린이 백귀들을 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애초부터 내심 상정하고 있던 일.

하지만 에린이 소환한 푸른색의 백귀들은 본래 자신이 상정했던 것보다 강했다.

애초에 영혼만이 존재하고 있는 그들에게 실체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수의 마력이 가진 특성 때문.

하지만 이미 죽은 망자(?子)들에게 생전의 육체를 다시 부여하여 부활시키는 것은 구미호가 가진 그 신수의 마력으로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에린 사용하는 마력이 평범치 않은 힘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그냥 신수의 마력이 아니다. 저건….”

더 상위의 다른 어떤 힘이 섞여 있음을, 구미호는 간파했다.

이 세계에 오래전부터 깊게 뿌리가 박혀있는 신성력과도 차원이 다른 힘.

여신의 힘이다.

“어떻게 저것이 저 힘을?”

저것은 사제들이 다루는 신성력이라는 힘과는 별개로 평범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에린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경위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백귀들의 전장을 휘어잡으면서 그 양상을 변화시키는 두 번째 변수가 곧바로 등장했다.

갑작스레 휘몰아치는 선풍과 함께 단번에 자신의 검은 백귀들을 쓸어버리는 무언가의 난입.

백귀들과 같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살아있는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틀림없이 그녀 또한 에린의 힘에 소환된 백귀.

“…쯧!”

게다가 저 백귀는 구미호로서도 전혀 모르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저것은 그냥 백귀가 아니다.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기술’의 끝.

그 영역을 통달한 달인의 경지에 위치해 있는 무력은 그 하나만으로 천의 전력을 가볍게 압도한다.

그리고 구미호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구미호 또한 ‘요술’이라는 영역에서는 다른 이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까지 통달하여 힘과 경험을 쌓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분야에서 싸울 경우의 이야기.

시에테가 보여주는 ‘검술’의 극은 지금도 자신의 힘으로 구현된 일당백의 전력인 백귀들을 간단하게 쓸어버리고 있다.

본래라면 에린의 백귀들을 계속해서 몰아붙여 그 전력을 깎고 순조롭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 테지만, 에린의 백귀들의 저항과 전력이 생각보다 강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저 단 한 명의 여검사가 백귀들간의 전장을 휘어잡는 열쇠가 되었다.

“어디서 이딴 것들이 차례차례로….”

구미호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자신이 모르는 변수의 출현에 계속해서 짜증이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애초에 에린이라는 존재 자체부터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돌연변이와도 같았다.

결국, 스트레스가 계속 쌓인 구미호는 모든 게 귀찮아졌다.

“됐다.”

에린이라는 존재 자체가 거슬렸기 때문에, 그녀를 무릎 꿇려 굴복시키고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싶었지만.

구미호는 저토록 격렬하게 저항하는 에린은 물론 이 영지 자체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하여 하늘 높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손 위로 천천히 응집되기 시작한 검은색 마력은 점점 더 그 색깔이 짙어지고 크기를 키워나갔다.

검은색 마력은 이윽고 손바닥만 한 구슬의 형태를 갖춰나갔고 구미호의 마력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풍선마냥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카아앙!

에린은 검은 백귀들의 공격을 유연하게 다른 방향으로 흘려내고 그 빈틈을 관통하는 매서운 반격으로 검은 백귀의 몸통과 머리를 분리시켰다.

“흣…!?”

그러던 찰나, 한 점에 강력한 기운이 응축되어가는 것을 느낀 에린이 검은 백귀들을 처리해가던 도중 오싹한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저건…!”

하늘 위로 높게 들어 올린 손바닥 위에서 점점 형태를 불려 나가는 마력의 응집체.

에린은 구미호가 만들고 있는 거대한 흑색 구슬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딱 한 번, 에린은 저것과 비슷한 요술을 본 적이 있었다.

오르비스 섬에서 평생의 원수와도 같았던 오르타스와 함께 그 섬을 바다 속으로 매장해버리기 위하여 이쪽 차원의 구미호가 사용했던 요술.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저 구슬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정갈하고 깨끗한 기운이 응집되어 밝게 빛나는 작은 태양을 연상시켰던 그때의 구슬과는 달리, 지금 에린의 시야에 들어온 저 흑색 구슬은 너무나도 불길하고 음험하며 그 크기 또한 두 배는 가까이 커다랗다.

“이제 다 귀찮다. 그냥 다 지워버리지.”

무감정한 구미호의 말이 혼란스러운 백귀들의 혼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에 있는 에린의 예민한 청각에 정확히 들려왔다.

[구미호 고유능력]

[섬멸옥]

“안돼…!”

저것이 지면에 닿는다면 오르비스 섬이 바다 위에서 아예 지워졌던 것처럼, 아예 이 영지 자체가 지도상에서 지워져버릴 것이다.

에린은 다급히 구미호를 향해 달려나가 저 거대한 흑색의 태양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간단히 그녀를 놓아줄 리 없는 흑색의 백귀들이 에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어…!”

에린은 이를 갈며 검은 백귀들을 뿌리치고 구미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역시나 그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없도록 검은 백귀들은 집요하게 에린을 물고 늘어졌다.

점점 커져만 가는 검은 태양의 존재감은 계속해서 공기를 타고 에린에게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카아앙!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오싹한 감각은 1초라도 빨리 저것을 막아야 한다고 경고를 보내 호소하고 있지만, 검은 백귀들의 방해로 구미호에게 향할 수 없는 에린은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의 바람]

뒤늦게 전장을 누비며 백귀들의 급소를 노려 일시적인 무력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던 시에테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에린 쪽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백귀들을 단숨에 제압하여 주춤하게 만든 틈을 타, 시에테는 등을 보이고 있는 에린에게 외쳤다.

“빨리 가라!”

“……!”

감사의 인사를 전할 틈도 없이, 시에테의 호통에 몸을 움찔 떨었던 에린은 당장이라도 검은 색의 태양을 떨어뜨리려는 구미호를 향하여 질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