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7화 〉 727. 또 다른 신수(2)
* * *
“…….”
구미호를 마주한 에린이 경직된 채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어쩌다 보니 구미호와 안면이 있는 에이라와 차한성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
그들은 에린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에린을 마주하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여 혼란한 상태다.
에이라와 차한성은 이전 페르니아스 왕국의 역대 왕족들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오르비스 섬에서 구미호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바가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미호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모습.
에린의 몸에 빙의하여 그 육체와 정신을 잠식한 지금의 그녀와는 전혀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에린이 지금 나타난 또 다른 에린을 ‘구미호’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에린의 쌍둥이가 나타난 것이라고 착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된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에린과 똑같은 모습을 한 ‘구미호’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서 튀어나온 인물이란 말인가.
하지만 에이라나 차한성에게는 그 의문에 생각을 할애할 수 있을 만한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키아아악!
에이라의 검격으로 한쪽 눈을 잃어버린 바실리스크가 격렬히 분노하며 난동을 부리면서 에프라테 백작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에이라와 차한성은 황급히 여기저기로 휘두르는 바실리스크의 사나운 꼬리들을 피하기에 바빴다.
“읏…!”
육중하기 짝이 없는 거구의 꼬리가 이리저리 휘날리며 건물을 깨부수고 지면을 분쇄시킨다.
그저 휘둘러질 뿐인 꼬리 어마어마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 무시무시한 폭력 그 자체.
하지만 그 난리 통 속에서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둘이 있었다.
“…….”
“…….”
복잡한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려는 에린과 에린이라는 존재가 왠지 모르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구미호였다.
에이라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 속에서 머릿속으로 빠르게 우선순위와 본인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나갔다.
“에린! 부탁할게!”
결론을 내리고 나면 행동하는 것은 빨랐다.
에이라가 가장 먼저 내린 결론은 갑작스레 등장한 에린의 모습을 한 구미호라는 여자는 자신이나 차한성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라면, 적어도 세 사람 중에서 에린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터.
정말로 분하고 아쉽지만, 에린의 전력은 자신이나 차한성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에이라는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검술의 숙련도라면 대등한 싸움까지 이끌어 갈 수 있는 수준이라고 자부하고는 있지만, 그 이외의 요소에서는 에이라나 차한성은 에린을 따라잡지 못한다.
정갈하게 갈고 닦아온 신수의 마력.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발휘하는 요술은 두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재현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 특수한 영역의 재능에 가깝다.
저 구미호를 상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에린에게 맡기고, 에이라는 자신이 해야 할 최우선 순위로 바실리스크의 토벌을 결심했다.
“가자. 한성아.”
“네. 선배.”
한번 흘끗 시선을 주어 에린을 쳐다본 에이라는 이윽고 차한성과 함께 바실리스크를 상대하기 위해 이동을 개시했다.
부탁한다는 에이라의 말을 듣고도, 에린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답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에린 또한 본능적으로 눈앞의 구미호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내심 깨닫고 있었다.
키아아아!
오히려 지금 거칠게 날뛰고 있는 바실리스크의 토벌에 전념해준다니, 구미호를 상대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 고마운 배려에 가까웠다.
“흐음. 이상하군.”
팔짱을 끼며 에린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구미호는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싸울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자신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짓눌러버릴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걸까.
가능성이 높은 것은 후자 쪽이다.
처음 에린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구미호를 발견했을 때, 구미호가 에린에게 보였던 적개심은 진짜다.
그것은 경멸이나 분노보다는 실망과 한심함의 감정에 가까웠다.
‘…어째서?’
무엇에 그러한 감정을 드러낸단 말인가.
그 이유를 에린은 알 수 없었다.
“너는…누구야?”
에린은 구미호의 정체를 물었다.
“이 모습을 보고도 모르는 것인가?”
“…….”
“그렇다면 네 지능은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수준이겠지.”
지금 구미호의 모습은 그녀가 정신을 장악하여 강탈한 에린의 육체다.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이 모습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에린을 보며 그녀의 지성을 의심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또 다른 내가…!”
이윽고 에린은 깨달았다.
같은 외모.
하지만 다른 눈매와 태도.
자신이라면 절대로 보이지 않을 표정과 모습.
마치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떠올렸을 때.
이쪽 세계에 와있을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일리아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너는…다른 차원에서 온 미호구나.”
“흥. 그래도 아예 지능이란 게 없지는 않은 것 같군. 그리고….”
구미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힘을 발산했다.
우우웅
숨을 옥죄어 오는 탁한 기운의 압박을 느낀 에린이 긴장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크…!”
“건방지게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미천한 것이.”
자신과 에린은 절대로 다르다는 듯이 수준의 차이를 명확하게 선으로 긋는 그 의사가 구미호의 마력으로부터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다시 한번 묻지. 이곳의 나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본래라면 구미호가 에린의 몸을 강탈하는 것은 페르니아스 왕국에 행하는 복수의 초석을 다지는 시작점.
하지만 이 차원에서는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차원의 구미호는 페르니아스 왕국에 복수를 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
에린은 구미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강력한 기세의 압박을 받으면서 자신의 적을 노려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하.”
그 시선을 받아들인 구미호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신수의 힘을 사용할 줄 안다지만, 그렇더라도 에린은 겨우 한낱 인간.
그런 그녀가 적대의 의사를 보인다는 것이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앞에 두고도 기가 죽기는커녕 언제라도 전투를 시작할 기세로 가득하다.
“건방지군.”
구미호는 일단 이 차원에 대한 의문을 푸는 것보다, 에린을 무릎 꿇리고 굴복시키는 것을 첫 번째 우선순위로 잡았다.
“하!”
구미호가 그렇게 결심을 굳혔을 때, 둘 사이의 공기 흐름이 변화했다.
먼저 움직임을 취한 것은 에린이다.
몸을 웅크림과 동시에 다리에 모여있던 힘이 한순간 해방되면서 폭발적인 가속도를 만든다.
퍼엉!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면서 만들어진 어마무시한 속도는 공기를 찢는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소리를 만들어낸다.
순식간에 구미호의 앞까지 도달하고 손에 쥐고 있던 레반테인을 전방으로 내질러 망설임 없이 구미호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에린의 레반테인이 구미호의 목을 꿰뚫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반테인의 칼끝이 구미호의 목에 당도한 순간,
[호족 요술(?? ??)]
[잔불 바꿔치기]
구미호의 몸이 검은색의 불꽃으로 변화하여 레반테인의 칼날을 허무하게 통과시켰다.
“어…?”
실재하는 것을 베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베었다는 공허한 감각에 당황하여 에린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검은색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 들어 허무하게 그 모습을 감췄다.
“…과연.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이건가.”
“……!”
에린은 자신의 뒤에서 들린 구미호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태연하게 서 있는 구미호는 자신의 공격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은 듯 멀쩡한 상태.
구미호는 처음 보여주었던 태도 그대로 팔짱을 끼고는 에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에린은 자신의 뒤를 태연하게 점거한 구미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웬만한 타인들보다 남다른 감각을 보유한 자신이 구미호의 존재를 감지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몹시 이상한 일.
‘…그냥 이동한 게 아니야.’
자신의 감각으로 감지하지 못할 수준으로, 정말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자신의 뒤를 점거한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미호는 순간 형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마치 정신체로만 존재했던 설녀나 악마들처럼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구미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구미호는 처음부터 ‘에린’이라는 실재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없던 것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보다, 존재하고 있는 실체를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더 어려울진데, 구미호는 그 제약을 받지 않고 있었다.
‘방법이나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하는지는 곧바로 생각을 마쳤다.
에린은 곧바로 자신을 중심으로 마력을 흩뿌리며 감지를 펼쳤다.
주위의 지형지물과 구미호의 존재를 포함하여 전방위의 정보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더 명확하게 느껴지는 것은 구미호가 두르고 있는 검은색의 불길한 마력.
“이건….”
“흐음. 눈치챈 건가.”
자신과 구미호를 중심으로 사방에 탁한 신수의 마력이 퍼져있었다.
“그렇구나. 이 공간 자체가 네 영역….”
마치 틀이 없는 거대한 수조에 물이 가득한 상태와도 같다.
이미 공간 자체를 구미호에게 장악당한 상태였음에도 에린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공간을 장악한 구미호의 마력이 너무나도 옅었기 때문이다.
이 마력이 가득한 영역 안에서 구미호는 자신의 육체를 여우불로 바꿀 수도, 실체로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일 터.
즉 이 공간 자체가 구미호의 손바닥 안인 셈이나 마찬가지다.
“깨달았다면 이제 날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단 걸 이해했겠지. 이제 그만 발악하고 얌전히 내 물음에 답하고 죽어라.”
“…하.”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구미호의 말에도 불구하고, 에린은 기가 찬다는 코웃음을 치며 공격의 자세를 잡았다.
전의를 상실하지 않고 더더욱 투지를 불태우는 그 모습을 보고 구미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정녕 끝까지 해보겠다고?”
“못할 것도 없지.”
“이 공간은 이미 나의 마력으로 장악되었다. 네가 이길 가능성 따위는 없어.”
“그게 뭐 어때서?”
“…뭐?”
“확실히 네 힘이 무서울 정도로 대단하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에린은 확고한 자신감이 가득찬 목소리로 레반테인을 구미호에게 겨눴다.
“너 방금 내 움직임 눈치채지 못했잖아.”
“…….”
정곡이었다.
에린이 순간 구미호의 위치를 포착하지 못하고 뒤를 내주었던 것처럼, 구미호 또한 에린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에린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본능에 경고를 해오는 야성의 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구미호의 요술이 에린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특화된 분야였기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것이지, 구미호 자체가 에린의 공격을 모두 읽을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이 공간이 너한테 유리하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또 다시 달려들어 구미호의 목을 꿰뚫을 준비를 마친 그녀의 눈빛은 대상의 빈틈을 찾아내려는 맹수의 날카로운 눈빛과도 같았다.
“그게 네가 날 이길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못해.”
자신감에 찬 확신을 들은 순간, 점점 쌓여가고 있던 구미호의 가슴 속 의미 모를 불쾌한 감정이 무엇인지, 구미호는 자각하기 시작했다.
“미천한 것이 건방지게….”
고작 인간에 불과한 여자 하나가, 당당하고 올곧은 눈으로 자신에게 대항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
마치 자신을 깔보고 있는 것만 같아 참을 수가 없다.
“오냐. 후회하지 마라.”
구미호는 대충 봐줄 생각은 접었다.
에린을 완전히 짓밟기 위하여 인간들을 잡아먹고 타락한 신수는 움직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