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722화 (705/730)

〈 722화 〉 722. 뱀의 꼬리(3)

* * *

“언니. 정말로 괜찮아?”

“응. 괜찮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고 묻는 에린의 물음에 릴리는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지금 릴리가 입고 있는 옷은 평소 입고 있던 메이드복이나, 신참 모험가의 티가 나는 장비가 아니다.

허름한 천 옷을 입고 있는 그 모습은 노예 시장을 전전하는 노예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예치고 어색했던 부분을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그녀의 피부가 매우 깔끔하다는 점이리라.

허름하고 먼지가 묻은 옷은 굉장히 해지고 더러웠지만, 릴리는 오랫동안 씻지 못하여 청결이라는 것을 관리할 수 없는 노예치고는 굉장히 깔끔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본래 릴리가 가지고 있는 외모는 또래의 여성들에 비해서 굉장히 아름다운 편에 속하여 잘 관리를 받은 티가 나는 노예로 포장을 한다면 아예 수상쩍지도 않은 수준.

보기 좋게 위장한 릴리였지만, 에린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치만…. 내가 들어가는 게 더 나을 텐데….”

작전의 내용은 간단했다.

노예로 위장하여 에프라테 백작의 저택에 잠입함으로써 에프라테 백작이 악마와 손을 잡은 증거를 찾는다.

하지만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누가 노예로 위장하여 에프라테 백작의 저택에 잠입하느냐였다.

당연히 그와 면식이 있는 에이라와 차한성은 불가능하니, 자연스레 에린과 릴리 중 하나가 그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고, 서로 자신이 그 역할을 자처한 가운데, 에이라가 선택한 것은 릴리쪽이었다.

에이라는 솔직히 전투라는 분야에서 에린은 자신보다도 더욱 뛰어난 수준으로 든든한 아군이었지만, 그 이외의 분야에서 에린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매우 감정적이고 단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에린은 어떠한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쉽게 격양되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었다.

에이라는 에린을 여동생처럼 아끼고 소중히 대해주지만, 임무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는 요소를 가만히 내버려 둘 정도로 무른 성정도 아니다.

“괜찮아. 에린. 그리고 이런 건 과거에 노예였던 내가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거야.”

“…알았어. 그래도 언니.”

에린은 릴리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언니는 이제 노예가 아니야. 나랑 현이랑…. 일리아나님이랑 엘레노아님도 있어. 베르단디님도 있고.”

“알지.”

위로와 격려가 담긴 말을 들은 릴리는 웃으며 에린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비참한 인생을 맞이하고, 원하지도 않았던 반마(半?)의 특성을 증오하고 원망하며 살아왔던 자신을 구원해준 것은 이 따뜻한 온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릴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마의 힘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 힘으로 은현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수만 있다면, 기꺼이 힘을 사용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에이라에게 눈짓했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부탁할게. 릴리.”

“네. 걱정 마세요.”

“…역시 안 되겠어.”

굳은 표정으로 결심을 마친 에린이 이제 막 숙소를 나가려는 릴리의 허름한 옷자락을 붙잡았다.

“에린? 왜 그래?”

“나도! 나도 언니랑 같이 노예로 위장할래!”

릴리를 혼자만 보낼 수 없었던 에린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에이라에게 허락을 구했다.

“…알았어. 그렇게 해.”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에이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에린이 떼를 쓰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혼자 놔둔다면 또 언제 어디서 날뛸지 모르는 에린을 억제할 수 있는 고삐가 릴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고삐를 쥐여주고 통제하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리라.

“히히, 고마워요. 에이라 언니!”

에린은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에이라를 보며 헤픈 웃음을 지었다.

◆ ◆ ◆

에프라테 백작에서 일하고 있는 집사는 매달, 또는 매주 정기적으로 노예를 구매하는 일과를 위하여 현재 노예 시장에 와 있었다.

그가 노예를 구매하는 기준은 아주 간단했다.

그저 값이 싼 노예만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성별도, 나이도, 출신도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집사는 주인인 에프라테 백작의 요구에 맞춰 언제나 가장 값싼 노예들에 속하는, 나이가 많은 늙은 노예들을 자주 구매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자주 거래를 했던 노예 상인은 이번엔 평소와 달리 젊은 여성 둘을 제시했다.

“…이 두 명이라고요?”

“예. 예. 그렇습죠. 하하.”

“…….”

넉살 좋게 웃음을 짓는 노예상인의 표정을 확인해보았지만,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집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가 제시한 두 명의 노예들을 차례대로 관찰했다.

꾸준히 관리를 해온 듯 윤기 있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의 라인을 강조하는 특유의 아름다운 몸매.

건강미가 넘치는 그녀들의 몸은 도저히 노예라는 생각이 들 수 없을 정도다.

‘창부들인가? …아니. 그런 여자들이 아니다.’

순간 남성의 성욕을 받아들이는 것을 일로 하고 있는 창부들을 떠올릴 정도로, 이성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발산하는 그녀들의 외모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집사는 의구심이 앞섰다.

그녀들은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오히려 남성들의 욕구를 품게 만드는 매력을 가득 품고 있기 때문에 이 가격에 그녀들을 판다는 것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외모라면, 10배는커녕 20배를 주고도 사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텐데…. 왜 굳이 이런 값싼 가격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으십니까?”

집사가 의구심에 사로잡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노예 상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이 인간? 노예 상인 맞아?’

상식적으로 이런 매력적인 여성들을 노예들 중에서 가장 값이 싼 늙은 노예들과 같은 값으로 판매하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이 노예 상인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도리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더욱 아리송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꿍꿍이냐고 따져 물으려던 찰나, 두 여성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집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

노예 상인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대화를 끊어버린 그녀가 말했다.

[잔말 말고 우리를 사.]

“…….”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끌려가는 듯한 묘한 무언가에 머릿속의 이성이 잠식당해간다.

구름처럼 퍼지며 점점 증식해가던 의구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집사의 두 눈은 초점을 잃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겠습니다.”

“…와. 언니. 그거 진짜로 편하다.”

순식간에 세뇌로 정신을 장악하여 자신들이 에프라테 백작의 집사에게 구매가 되도록 유도한 릴리의 능력에 에린이 감탄했다.

“이 정도는 에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음…. 아니 나는 그렇게 정밀한 명령을 내리지는 못해.”

에린도 릴리와 비슷한 정신 조작 계열의 능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의 감정을 왜곡시켜 특정의 감정을 유발하거나 없애는 것 정도일 뿐, 릴리처럼 대상에게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못한다.

“그래도 이건 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특히나 정신적인 술법에 내성이 있는 대상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대표적으로 은현이 그러했다.

“주인님께는 이런 세뇌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는걸.”

은현은 베르단디가 부여한 여신의 가호가 있기 때문에, 정신에 영향을 주는 세뇌 계열의 능력은 일절 통하지 않는다.

이처럼 정신 공격에 대하여 내성이 있는 대상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능력이었지만, 반대로 내성이 없는 이들에게는 저항은커녕 자각조차도 할 수 없는 무서운 능력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현이가 특별한 게 아닐까?”

“그렇긴 하지.”

릴리는 에린의 지적에 피싯 웃으면서 동의했다.

두 여성은 노예로 신분을 위장하여 에프라테 백작의 저택 안으로 순조롭게 잠입했다.

◆ ◆ ◆

대금을 치르고 노예의 권리를 양도받는 문서를 교환하여 거래 절차를 마치고 집사를 따라 에프라테 저택에 들어온 에린과 릴리는 들어오자마자 지하 감옥 안에 갇혀졌다.

감옥 안에는 휑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고, 제대로 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며, 감옥 안을 지키는 병사들도 없었다.

정말로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감옥 안에 갇힌 지 6시간째, 평소였다면 푹 잠들었을 새벽 시간대였지만 에린은 잠들지 못했다.

“으으…. 바닥이 딱딱해…. 추워….”

지하 감옥의 바닥은 딱딱하며 울퉁불퉁하고 먼지가 가득하다.

벽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찬바람을 모두 막지 못하여 술술 들어왔다.

노예로 위장하기 위해 입은 낡고 허름한 천 옷은 체온을 빼앗기는 것을 막아주기에는 너무도 허술했다.

“최악이야…. 빨리 일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벌써부터 따뜻한 이불과 침대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무릎을 끌어안고 양손으로 팔을 슥슥 문지르며 억지로 열을 만들려 노력하는 에린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릴리는 안쓰럽다 못해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에린. 이리와.”

“응.”

에린은 오들오들 떠는 몸을 이끌고 릴리의 품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있으면 릴리가 양손으로 에린의 상체를 꼭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좋은 냄새와 함께 릴리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잔뜩 긴장되있던 에린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하아…. 따뜻하다….”

“다행이야.”

“언니는 괜찮아? 안 추워?”

“에린의 몸이 따뜻해서 기분 좋은걸? 그리고…. 나는 익숙해.”

노예로 전락한 신분으로 살아왔던 릴리에게 이 환경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

스스로를 자조하는 쓴웃음을 본 에린은 풀어졌던 긴장을 다시 조이듯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해보니, 에린은 릴리와 자신이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두 사람 모두 강자에게 핍박받고 빼앗기는 불합리함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에린은 적어도 릴리처럼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집과 옷이 없고 하루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들의 등쌀에 떠밀렸던 피 말리는 생활은 확실히 견디기 힘들었지만, 누가 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에린은 당연히 릴리 쪽이 자신보다 더 심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언니이….”

릴리는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라 울상을 짓는 에린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달랬다.

“괜찮아.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난 지금 굉장히 행복하니까.”

에린이 있고, 은현이 있으며,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있다.

비록 반은 인간이 아니게 된 반인반마(半人半?)가 되었지만, 릴리는 지금의 이 생활을 행복하게 누리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과 에린을 기다리고 있을 은현과 두 아내들이 떠올랐다.

“빨리 악마를 처리하고 집에 가자.”

“응!”

끼이익

그렇게 재차 결심하여 힘차게 답할 때, 무거운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이번엔 빠르게 준비해줬네? 뭐 두 명이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당당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여자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두운 감옥 안에서도 에린과 릴리는 정확히 그녀의 존재를 포착했다.

허리에서 돋아나 있는 한 쌍의 날개와 함께 그녀가 품고 있는 기운은 평범한 인간의 기운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것.

에린과 릴리는 곧바로 그녀가 악마라는 것을 확신했다.

“…언니.”

“응. 확실하네.”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에린의 목소리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했다.

“…응?”

이윽고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에린과 릴리를 발견한 악마,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어째서 ‘동족’이 여기에 있는 거야?”

그것은 자신과 같은 ‘마(?)’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릴리를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그 의문을 해소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마력을 이용하여 신체를 강화한 에린이 감옥 안과 밖을 가로막고 있던 쇠창살을 구부러뜨렸다.

끼이익!

“…어?”

신체 강화로 상승한 근력으로 쇠창살을 구부러뜨리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에린을 보고, 루시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재빠르게 파악하지 못하여 당황한 눈치.

에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만 잡으면 퇴근이야!”

두 눈을 번뜩인 에린은 재빠르게 루시를 향해 돌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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