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1화 〉 721. 뱀의 꼬리(2)
* * *
“즉…. 에프라테 백작은 정기적으로 노예들을 사들여 악마에게 제물로 제공을 하고 있다? 라는 뜻이 될까요?”
보고서의 내용을 정리하여 간략하게 요약한 릴리의 추측에 에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그리고 그 모험가에게서 들은 이야기까지 더해보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자신의 방에서 릴리가 붙잡아온 모험가의 심문을 마치고 돌아온 차한성은 에이라의 추측에 동의를 표했다.
그는 이 영지의 영주인 에프라테 백작에게서 몰래 마약을 받았고 창관의 주인과 창부들, 영지를 찾아오는 노예 상인들에게 마약을 뿌려 중독시켰다.
점점 더 약에 의존하게 되고 정기적으로 약을 구하기 위하여 무리한 지출을 강요하기 위해서.
결국에는 소지하고 있는 노예들을 팔아 금전을 마련하고 그렇게 만든 돈은 자연스레 마약을 제공하는 에프라테 백작에게 흘러 들어간다.
“정말…. 잘도 이런 생각을….”
에이라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영지의 사업 자금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다시 노예들을 구매하는 자본으로 활용되니 사실상 영지 안에서 계속해서 돈만 굴러갈 뿐인 악순환의 연속에 가깝다.
결국에는 피해를 보는 것은 마약에 중독된 이들과 팔려나가는 노예들이다.
본인에게는 일절 리스크가 오지 않으면서 꾸준히 늘어난 이익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미 영지 자체를 자작령에서 백작령으로 승작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자본을 끌어모았다는 뜻.
“…이해가 가지 않아요.”
에린도 에이라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마약의 유통은 왕국 안에서도 민감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부류의 사안 아닌가요? 어째서 지금까지 걸리지 않고 무사히 있을 수 있었을까요?”
에린은 아르티아 기사단이나 은현을 도와 마약을 몰래 유통하는 범죄 조직들을 소탕해보았던 경험이 몇 번인가 있었다.
마약은 사람의 몸과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악질 것이다.
때문에 페르니아스 왕국이나 아르티아 기사단이 이러한 일에 대하여 얼마나 신속하고 강경하게 움직이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약의 성질 때문이 아닐까요.”
차한성이 품에서 천으로 감싸인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테이블에 올려둔 주머니의 끈을 풀어주자 안에서 분홍색 액체가 가득 들어있는 유리병들 수십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네. 그 마약이죠.”
이 영지 안의 창관들과 노예 상인들 사이에서 나돌고 있는 마약이었다.
차한성이 심문을 마친 모험가에게서 강제로 마약을 회수해온 것이다.
“이 마약은 만들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1주일이 지나면 그 약효를 잃어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너무 짧은 것 같은데?”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를 지닌 포션과는 그 제조 과정과 효능이 전혀 다르지만, 마약 또한 ‘약’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다.
아무리 오래 보관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기한을 넘기면 그 효력을 잃는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번 제조하면 3개월 이상의 넉넉한 기한을 가진 포션들과 달리, 차한성이 회수해온 마약은 그 기한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네. 짧죠. 그것도 너무.”
게다가 일반적으로 한 장소에서 제조되어 다양한 장소의 곳곳으로 퍼지는 마약은 일반적인 포션보다도 그 기한이 굉장히 긴 편이다.
만들었지만 사용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빠르게 효력을 잃어버리는 마약 따위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기 마련.
“하지만 이 영지 자체가 마약을 제조하는 장소라면, 그 기한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죠.”
오직 이 영지 안에서만 나돌 수밖에 없다는 한정적인 제약을 가졌지만, 그만큼 효과는 강력한 듯 보였다.
부호의 상인들이나 창관들, 귀족들이 이 마약을 구하기 위해 환락의 영지를 찾고 거리낌 없이 값을 지불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만한 값어치를 가졌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그 짧은 기한의 제약 때문에 외부로 유출될 염려도 없죠.”
당연히 마차로 2, 3개월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 페르닌에 에프라테 백작령의 마약에 관한 소식이 흘러 들어갈 걱정도 현저하게 줄어든다.
에프라테 백작은 광범위하게 왕국 전체에 마약을 유통하여 큰 이익을 꾀하려는 범죄 조직과는 달리, 정보와 생산, 물량을 철저히 통제하여 사업을 진행시켰다.
“이건….”
“…….”
에린과 릴리는 차한성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분홍색 액체가 가득 담긴 유리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 사람? 왜 그래?”
둘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캐치한 에이라가 에린과 릴리를 불렀다.
“…언니. 눈치챘어?”
“응.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네.”
서로를 쳐다보며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곧바로 에이라의 물음에 답했다.
“이 마약, 그냥 마약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이라님. 이 마약 안에는…. 악마의 힘이 담겨있습니다.”
“…….”
릴리의 충격적인 말에 에이라와 차한성의 어깨가 움찔 떨렸고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실이야?”
“네.”
“확실해요.”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했다.
에린과 릴리가 마약 속에서 악마의 마력을 감지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수와 악마의 특성 때문이다.
마력에 민감한 에린의 감각이나, 악마의 특성을 절반 이어받는 릴리는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제법 강력해보여요. 아마도…. 감각을 일부 마비시키는 것도 모자라 흥분을 일으켜 일종의 환각 상태를 유발하는…. 저와 같은 매혹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악마로 보입니다.”
릴리는 이 약을 만드는데 자신의 마력을 아낌없이 제공한 악마가 자신과 같은 서큐버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릴리보다 강해?”
“…네.”
릴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에이라의 물음에 긍정했다.
적어도 그녀는 이런 약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
“그래. 알았어.”
에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의 설명을 참고했다.
전투의 분야에서는 문외한인 그녀에게 악마를 상대해달라는 무리를 부탁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걸로…. 에프라테 백작이 악마와 협력하고 있다는 확신은 얻었네요.”
물론 이것도 순전히 에린과 릴리의 물증이 없는 말뿐이었지만, 에이라와 차한성은 둘의 말을 의심치 않았다.
이번 상대가 절대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방심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짐하게 해주는 둘의 확신은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그러면 우리 이제 그 백작이라는 사람의 저택에 쳐들어가서 체포하고 악마를 처리하면 돼?”
“그, 그건….”
차한성은 당황하며 에린을 어떻게 만류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슬쩍 시선을 옆으로 옮겨 에이라를 쳐다보자, 에이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하면 정말로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게는 못 해.”
가끔가다가 에린은 정말로 그 노련한 은현이라는 남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무대포 같은 성향이 있었다.
에이라는 천천히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 ◆ ◆
완전히 해가 진 어두운 저택의 침실 안을 밝혀주는 것은 자그마한 양초 하나였다.
하지만 그 양초는 침실을 전체를 밝혀주기엔 너무 약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양초로도 미처 밝히지 못한 어두운 시야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속옷만을 입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중요 부위만을 가리고, 새하얀 피부를 드러내는 색정이 가득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여성의 허리에 달린 한 쌍의 검은색 날개다.
그녀는 인간이 아닌, 인간을 현혹시키는 것을 즐기는 악마였다.
“…오셨습니까.”
에프라테 백작은 느닷없이 이 새벽에 저택을 찾아온 악마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이미 이것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고, 상대는 인간이 아닌 악마.
많은 것을 따지기에는 그녀와 자신 사이의 격차는 너무도 뚜렷했다.
“이번 달 치는?”
“준비해두었습니다.”
“흐응. 좋아. 잘했어.”
늘 있던 대로, 정해진 기한인 오늘 준비해둔 재료를 확인한 악마, 루시는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프라테 백작이 구매한 노예들은 언제나 지하의 감옥에 가둬두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물을…. 물을 주세요!”
“살려….”
인기척을 느낀 감옥 안의 노예들은 며칠 동안 물도, 음식도 먹지 않아 피폐해진 상태로 간절히 외쳤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된 것은 에프라테 백작이 아닌, 악마였다.
“시끄럽네.”
루시는 귓가에 앵앵거리는 노예들의 목소리를 듣기가 싫어 자신의 마력을 사용했다.
[조용히 해.]
꺼림칙한 빛으로 가득한 붉은 눈을 마주한 노예들의 눈이 이윽고 초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섰다.
간절한 애원이 가득했던 노예들은 감정을 잃고 딱딱한 목각인형처럼 굳은 상태로 일절 움직이지 않는다.
실체화를 풀고 정신체의 상태로 쇠창살로 막혀있는 감옥을 통과한 루시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예들의 몸에 있는 정기들을 모조리 흡수했다.
비옥했던 토지가 수분이 증발하고 쩍쩍 갈라져 버리듯,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 버리는 노예들은 자신들의 생기가 악마에게 모조리 흡수당하고 있으면서도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고통의 내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미 루시의 세뇌에 완전히 정신을 장악당한 그들은 실시간으로 생명력이 깎여나가고 있음에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가까웠다.
이윽고 몸 안의 생기를 완전히 빼앗긴 노예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다.
차디찬 바닥에 몸을 누우면서도 숨소리 하나를 흘리지 않는 그들은 이미 심장의 박동도 멈춘 상태로 사망했다.
“흐음…. 역시 좀 아쉽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에프라테 백작이 준비해준 식사의 양은 겨우 사람 서너 명 정도의 양뿐.
루시의 배를 채우기에 늘 부족했다.
게다가 제대로 먹고 휴식을 취한 건강한 인간의 정기가 아니므로 맛도 영 아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요즘 들어 페르니아스 왕국이 악마에 대한 단서를 찾고 뿌리를 뽑기 위해 얼마나 강경하게 대응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정기적으로 안전하게 정기를 섭취할 수 있는 환경은 불만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루시는 자연스레 현재 렌디르 왕국을 시작으로 대륙의 동쪽 전체를 장악하여 인간들을 학살하고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레이넌이라는 과거의 영웅이었던 남자와 대륙의 여신이라는 존재에 증오심을 품고 있는 사령술사.
그리고 벨페고르라는 상위 악마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재, 아르케나 대륙의 동쪽은 인간들에게 있어 재앙이나 다름이 없다.
루시가 동쪽의 대륙을 벗어나 이 영지에 숨어들어 깨작깨작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고 있는 것도, 동쪽은 이제 그녀가 먹을 수 있을 만한 인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악마들은 자신의 힘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외부로 흘러나와 인간들을 사냥하는 것이 요즘의 상황이다.
“…쯧.”
루시는 혀를 차면서 바짝 말라비틀어진 시체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체들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의 효과로 미리 설정해둔 장소로 전이된 것이다.
“그 마녀…. 도대체 뭐야?”
루시는 자신에게 텔레포트의 마법이 각인되어있는 수정구슬을 넘겨준 검은 머리카락의 마녀를 떠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자신이 전투 능력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악마인 자신이 고작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정기를 모두 흡수한 시체들을 쓸 곳이 있다면서 이 아티팩트로 시체들을 전이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그 마녀다.
어째서 자신이 인간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것인지, 루시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는 마녀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격차를 본능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힘의 논리로 서열이 결정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나는 약육강식의 법칙은 싸워보지 않았음에도 루시를 굴복시켰다.
아티팩트를 이용하여 시체들을 전이시키고, 식사를 마친 루시는 다시 에프라테 백작을 찾았다.
그가 미리 준비해둔 포션들에 자신의 마력을 흘려 넣어 마약을 제작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이다.
루시와 에프라테 백작의 관계는 협력의 관계에 가까웠다.
그녀에게는 정기를 계속해서 공급받는 식사가 절실했고, 에프라테 백작은 서큐버스가 가지고 있는 그 능력이 절실히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협력 관계에 가깝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무슨 일이 있었나봐?”
“왕국의 기사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오늘 아르티아 기사단원 둘이 찾아왔었어요. 당신의 존재까지는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이 마약이 들킨다면 당신의 정체가 들통나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요.”
에프라테 백작의 태도는 굉장히 담담했다.
애초에 악마와 손을 잡고 마약을 만들어 진행한 이 사업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평생 왕국에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들킬 일이라고 염두에 둬두었고 그 다음을 준비할 뿐이었다.
“흐음. 그래서?”
루시도 그런 에프라테 백작의 태도가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당신의 그 세뇌 능력.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에게도 통할까요?”
에프라테 백작은 아예 에이라와 차한성의 정신을 장악하여 이쪽의 카드로 만들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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