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3화 〉 713. 환락의 영지(1)
* * *
“일레이나가 당분간 아빠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네?”
“……?”
집으로 돌아온 은현은 느닷없는 일리아나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날 아침, 바로 에프라테로 출발을 할 예정이었던 은현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말이기도 했다.
악마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장소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바쁘게 움직이려 했던 찰나, 타이밍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없다.
‘아니. 타이밍이 나쁜 게 아니라….’
은현은 집에 오기 전부터 그가 에프라테로 향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었던 릴리와 에린을 슬쩍 쳐다보았다.
“응? 왜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정색하며 자신을 말리려고 했던 에린은 어느샌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은현을 말려줄 대상을 확실하게 찾은 것처럼.
“…….”
은현은 에린과 릴리가 일리아나에게 에프라테에 숨어들어 있는 악마의 이야기를 미리 모두 이야기해두었음을 확신했다.
아마도 자신들끼리 아내들 몰래 만들어둔 비밀 회선으로 그 이야기를 전달해두었으리라.
가뜩이나 일리아나를 다른 아내들에게 맡겨두고 바쁘게 일을 처리하러 돌아다닌 탓인지, 은현은 일리아나의 부탁을 거절하기 뭐 했다.
“고민하고 있네. 뭐 너답긴 하지만.”
일리아나는 쓰게 웃었다.
그렇더라도 곧바로 알았다고 답해주지 않는 것에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나도 너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 굳이 네가 직접 가지 않더라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조금은 다른 사람에게도 의지하라는 말이야.”
◆ ◆ ◆
온종일 이동하고 해가 지자 야영을 하게 된 네 사람은 몸을 데우는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따뜻한 스프에 빵을 찍어 먹으면서 허기를 달랜 에이라는 지금까지의 경위를 모두 듣게 되었고 쓴웃음을 지었다.
시작점은 흑랑단을 통해서 악마가 숨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꽤 신빙성 있는 정보를 들은 은현이다.
하지만 창관의 여자들이 가득한 장소에 은현을 절대로 보낼 수 없었던 에린과 릴리가 일리아나를 끌어들이면서 은현의 조사 계획은 시작도 전에 무산되었다.
“뭐, 확실히…. 기사단 쪽에서 움직일 명분 자체는 충분히 있네요.”
차한성도 이야기 자체를 듣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 대신 에프라테에 아르티아 기사단에 수사를 부탁하자는 것을 일리아나의 아이디어였다.
에프라테령 또한 페르니아스 왕국 안의 영토에 속해 있는 영지인 이상 아르티아 기사단이 움직일 명분 자체는 충분히 존재했으니까.
의외였던 점은 그것을 부탁한 것이 은현이 아니라 일리아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리오드는 군말없이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명분이나 이유 자체도 충분했던 것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은현이 당분간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일리아나의 의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제 막 출산을 마치고 어린 딸아이와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여자의 마음을 헤아린 결과다.
친구들의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해서 사적인 청탁 정도는 눈을 감아주자는 리오드의 작은 배려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선택된 것이 바로 기사단 소속의 단원인 에이라와 차한성이었다.
“저는 이 방법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리오드님께 수사를 부탁드린다니.”
에린도 몹시 의외였다는 듯 중얼거렸다.
물론 공적인 명분과 이유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친분이 있는 은현과 일리아나였기 때문에 기사단장인 리오드에게 이런 사적인 부탁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언니랑 같이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응. 나도 그래.”
에이라는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 실실 웃으며 애교를 부려오는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흑…. 라면이라니…. 라면을 먹을 수 있다니….”
한편 그녀의 옆에 있던 차한성은 스프 이외에 또 다른 냄비에 릴리가 준비해준 라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심 포기하고 있었던 지구의 음식이 훌륭하게 재현된 광경은 차한성에게 있어 감동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어째서 모험가나 기사도 아닌 메이드에 불과한 릴리가 이 여정에 참여하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 차한성은 그런 의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라면을 끓여준 릴리라는 여성은 차한성의 인식 속에서 순식간에 은인으로 격상했다.
“주인님께서 젓가락이라는 걸 함께 드리라고 하셨는데….”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차한성은 릴리가 건네준 젓가락을 잽싸게 받아들고 라면이 담긴 냄비에 국자를 퍼다가 자신의 그릇에 옮겨 담았다.
주위의 시선과 체면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능숙하게 젓가락을 사용하여 면발을 집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발을 후후 불고는,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입안에 면발을 밀어 넣었다.
후르릅!
따뜻하고 약간 매콤한 국물맛과 함께 입안에서 툭 끊어지는 면발의 탄력을 느낀 차한성은 또 한 번 흐느껴 울었다.
“크흐흑….”
“그, 그렇게 맛있니…?”
“네. 선배. 진짜…. 진짜 맛있습니다….”
얼마나 격렬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리액션인지, 보고 있는 사람 쪽이 당혹스럽다 못해 신기할 정도다.
라면을 끓여준 릴리나, 에린과 에이라 모두 차한성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정작 차한성은 거의 잊고 있던 지구의 맛을 다시금 깨닫는데 감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매워서 못 먹겠던데….”
한번 국물을 맛보았던 에이라는 너무 자극적인 매운맛에 생수를 들이켜야만 했다.
아마 이 라면이라는 것을 맛있게 먹은 것은 은현이나 유리아 여왕 이외에 차한성이 유일할 것이다.
“…차한성 님. 내일부터는 제가 운전해봐도 되나요?”
라면의 맛에 심취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기회를 본 에린이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네? 안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차한성은 방금까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라면을 먹었던 것과 달리, 거짓말같이 정색하며 에린의 제안을 거절했다.
인벤토리 안에 있는 레토나를 소환한 것은 에린이었지만, 현재 이 중에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차한성이 유일했다.
단칼에 거절하는 차한성의 매몰찬 대답에 에린은 볼을 부풀리며 투정을 부렸다.
“치, 치사해! 그래도 한 시간 정도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은현님이 꼭 당부하신 말씀이셨어요.”
애초에 지금 차한성이 먹고 있는 라면 자체가 뇌물에 가까웠다.
혹시라도 에린의 투정에 못이겨 운전대를 허락하게 해준다면, 은현은 다시는 자신에게 라면을 주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그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으으….”
“어쩔 수 없지. 주인님께서 금지하셨잖아.”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불만을 토로하는 에린을 보고 릴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위로했다.
“연습해서 다음에는 꼭 허락받자.”
“우우, 릴리 언니도 매정해….”
매정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 완전히 어린애가 따로 없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에린의 운전 실력은 정말로 형편없었다.
익숙한 바이크를 운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레토나를 운전했다가 나무에 들이박아 큰 사고를 냈던 전적이 있었던 에린에게 다시 운전을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 아니에스가 직접 은현에게 에린에게 운전 같은 걸 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 큰 원인이다.
‘…휴. 다행이다.’
차한성은 라면이 담겨있는 그릇을 꽉 쥐면서 속으로 안도했다.
아무리 그라도 에린이 진심으로 투정을 부려온다면, 그것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릴리가 적절하게 에린을 위로해준 덕분에, 에린은 불만을 가지면서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릴리가 세 사람을 함께 동행한 이유는 자신을 제외한 세 사람이 창관과 그곳에서 일하는 창부들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런 곳에서 청소를 비롯한 잡일을 해보았던 릴리는 그러한 장소의 생태계에 눈이 밝은 편이었기 때문에 동행을 자처했다.
게다가 굉장히 기분파인 에린의 고삐를 확실히 쥐고 있는 효과까지 낳고 있으니 차한성으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창관인가.’
차한성은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장소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그곳이 어떠한 곳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차한성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부끄럽게도 그는 전생에도, 지금에도 여성과 그러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차한성이 창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기대보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긴장에 가깝다.
“한성아? 무슨 생각해?”
그토록 감격해 마지않는 라면을 먹다 말고 고민에 잠겨있는 표정을 본 에이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차한성에게 물었다.
“예? 아…. 그…. 숨어 있을 악마는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에프라테 령의 창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창피해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차, 뒤늦게 떠오른 변명을 떠올리고 입에 담았다.
자신치고는 제법 괜찮은 대답이었다고 차한성은 스스로 생각했다.
“으음…. 그렇네….”
무언가 이상하긴 했지만 에이라는 차한성의 말을 받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에프라테 령을 가보는 건 처음이야.”
에프라테 령은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서도 유흥과 환락의 영지라는 평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게다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파는 창관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꺼려지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남성들에게는 지위를 불문하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영지이기도 하다.
현재 유동인구가 굉장히 활발한 아르미타스 령과는 다른 의미로 입소문이 자자한 영지가 바로 에프라테 령.
아르미타스령이 돈을 벌기 좋고 살기 좋은 쾌적한 영지로 소문이 나 있다면, 에프라테령은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쾌락의 영지라는 평가가 귀족들 사이에서 퍼지는 인식이었다.
“일단은…가봐야지.”
고민만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에이라는 잘 알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무리를 지은 네 사람은 곧바로 잠을 청했다.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예상치 못한 성비에 비해 설치한 텐트는 단 두 대뿐이었다는 점이다.
“…선배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뭐가?”
“그게…. 저와 같은 텐트를 쓰신다니….”
“두 개뿐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나는 릴리와 에린이 함께 사용하는 이상, 남은 하나는 자연스레 에이라와 차한성의 몫이 되었다.
은현의 아내들인 릴리나 에린과 함께 텐트를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배치와 구성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차한성의 감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망설이고 있었다.
“한성아.”
“네, 네. 선배.”
“나는 기사야. 여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기사로서 대해줬으면 좋겠어.”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는 에이라의 눈빛과 마주한 차한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했습니다.”
“응. 그러면 어서 자자. 너는 불침번 가장 마지막이지?”
“네.”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바닥에 깔아둔 에어 매트 위에 몸을 눕혔다.
에린이 인벤토리 안에서 꺼내 설치해준 에어 매트는 굉장히 푹신해서, 종일 걸으면서 쌓인 육체의 피로를 풀어주는데 효과가 대단했다.
하지만 그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도, 두 사람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담요를 덮고 서로에게서 등을 돌리며 누워있었지만, 에이라나 차한성이나 등 뒤의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
‘어떡하지…. 잠이 안와….’
처음 차한성에게 자신을 여자가 아닌 기사로서 생각해달라고 호언장담을 했던 것과 달리, 에이라는 긴장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세차게 뛰는 가슴의 고동은 너무나도 크게 들려 더욱 의식하게 만들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악순환의 연속을 일으킨다.
혹시라도 등 뒤에 있는 차한성에게까지 자신의 두근거림이 들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가득했다.
반면 차한성은 그런 에이라를 신경 쓸 여유도 없는 상태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단장님이 이 사실을 알면 난 죽었다.’
에이라와 한 텐트 안에서 함께 잠을 잤다는 사실을 리오드가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