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4화 〉 704. 사제 회의
* * *
사령술사의 습격과 비리 사제 파벌들을 척결한 지 2주의 시간이 지났다.
“이봐! 여기 석재 보충은 아직인가?”
“2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좋아! 그러면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만 하고 마무리 준비해! 내일 아침부터 다시 시작한다!”
언데드의 습격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에레니움 내부를 빠르게 보수하고 있는 이들은 1m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신장을 가진 드워프들이었다.
드워프들은 은현의 부탁으로 게이트를 타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에레니움으로 넘어와 보수작업을 해주었다.
당연히 후한 임금과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직장 상사와 부하와도 같은 관계 이전에, 장인 정신이 투철한 드워프들은 압도적인 야금술의 기술을 가진 은현을 최고의 대장장이로 생각하며 존경을 표한다.
그의 부탁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줄 의향이 가득한 드워프들의 노동력으로 인해 에레니움의 복구 작업은 정말로 빠르게 이어졌다.
파손되기 그 이전보다, 더 견고하고 쾌적하게 정비되는 수준에 오히려 에레니움 쪽에서 더한 보수를 줘야 할 판이었다.
“작업 상황은 어때?”
“음. 이 속도라면 아무래도 1개월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소.”
몹시 면목이 없다는 투로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다른 건설 현장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다.
“쉬엄쉬엄해가면서 해. 그렇게 급한 건 아니니까.”
“허허. 야장께서 부탁하신 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드워프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부탁을 하는 입장이니까. 너희에게는 언제나 고마울 따름이야.”
“그렇다면 가끔 야장께서 직접 만든 흑맥주를 베풀어주셨으면 좋겠소.”
역시나 드워프들이 은현을 따르는 이유 중에는 대장장이로서의 기술과 인망 때문은 아니었다.
술 중에서 보리를 가공하여 주조한 양조주인 맥주류를 굉장히 좋아하는 드워프들 중에는 오크통 한통을 통째로 들이키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만큼 술을 먹지 못하면 몸에 열이 오르지 않아 망치를 두들기는 흥도 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말술의 종족이다.
최근에는 은현이 제공하는 흑맥주에 푹 빠져 있었다.
“뭐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하하! 야장의 그 말을 다른 드워프들에게 전달한다면 오늘은 작업이 더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소!”
힘을 좀 빼면서 쉬엄쉬엄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힘을 내버리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은현도 헛웃음을 지었다.
◆ ◆ ◆
“알베른…님이…. 교황 예하의 손자이셨다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사실에 다수의 사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알베른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알베른은 그렇게 많은 이목이 자신에 쏠리는 것이 처음 있었던 일인지라 살짝 긴장했지만 애써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회의실 안에 있는 사제들 한명 한명이 지금껏 신전 본교에 많은 헌신을 해왔던 고위, 상위 사제들이었던 만큼 가지고 있는 지위와 권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시선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
알베른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등을 꼿꼿하게 펴고 그 시선들을 응대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경계와 견제가 어린 경쟁자들의 시선이 아니었단 점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몰랐던 현 교황의 손자라는 사실에 관하여 관심과 관찰의 시선에 가까웠다.
그들이 알베른을 관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맞아. 그리고 나는 알베른을 차기 교황으로 추천하고 싶어.”
“…….”
아니에스가 알베른을 차기 교황 후보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흐음. 저는 그 의견은 조금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고위 사제가 손을 들어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그리고 당연히 모두가 만장일치로 알베른의 차기 교황 후보 추천에 찬성을 할 것이라고는 아니에스 또한 생각지 않았다.
“이유는?”
“저는 아직 그 아이를 잘 모릅니다. 그 아이가 어떤 결단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과연 지금의 위태로운 신전을, 에레니아 신성국을 책임질 수 있는 위정자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을 확인해보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를 교황으로 인정할 수는 없죠.”
조곤조곤 이유를 설명하는 고위 사제의 지적은 올발랐다.
교황의 자리는 베스타 신전의, 에레니아 신성국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곳.
다른 국가라면 국왕의 자리와도 같다.
결정하는 안건과 선택 하나하나가 나라와 신전에 속한 백성들과 사제들, 성기사들의 앞날이 좌지우지되는 만큼 크나큰 책임이 잇따르는 자리다.
제아무리 교황의 혈통을 이어받은 손자라고 할지라도 그런 자리에 열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경험이 부족한 소년 사제를 앉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
알베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직접 들어도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역시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알베른을 교황의 자리에 앉히자는 이야기가 아니야.”
아니에스는 흘끗 알베른을 보며 눈짓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한 알베른이 회의에 참석한 많은 사제의 주목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무작정 교황의 자리에 앉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성인이 될 때까지는…. 저를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과 실적을 쌓고 현 교황인 아르반의 손자로서, 차기 교황 후보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당당한 태도는 제법 기품이 있고 늠름했다.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는 소년은 타고난 듯 많은 고위 사제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런 소년의 태도를 보고 사제들은 감탄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교황의 손자는 손자가 맞았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걱정거리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저희에게는 그때를 차분히 기다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신전은 많이 위태로운 상태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 다른 고위 사제가 현재 에레니아 신성국과 베스타 신전이 직면한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를 입에 담았다.
사령술사의 습격과 그동안 외면해왔던 부패한 사제들을 척결하면서 신전의 위상은 하루가 지날수록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타국의 귀족이나 왕족들이 항의문을 보내오는 것은 당연하며 이대로 가다가는 에레니움 안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심의 바람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현 교황인 아르반은 수명의 한계로 병상에 누워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타이밍도 이렇게 최악일 수가 없었다.
“현 교황 예하에게는 정말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지금 신전과 성국에는 새로운 교황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음….”
솔직하게 지적해오는 적나라한 현실에 많은 사제들이 침음을 흘렸다.
“시간이라면 벌 수 있어요.”
그렇게 사제들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회의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레노아가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잃어버린 신전의 권위를 되찾는 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 집행될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질 거란 점이었으니까요.”
이 부분은 페르니아스 왕국과의 동맹이 성사되면서 막대한 원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신성국과 신전의 운영 예산에 타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기부금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근본적인 예산 재편성을 하고 본래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시간은 어느 정도 확보한 셈.
“그리고…. 지금은 제 남편이 에레니움과 인근 도시들의 유지 보수를 위해 바쁘게 움직여주고 있으니까요.”
놀랍게도 은현이 게이트라는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은 미공개 기술을 이용하여, 책 속에서만 접했던 드워프라는 신비로운 종족을 데려와 빠른 속도로 피해를 입은 도시들의 재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번 사령술사 습격 사건으로 발생한 사망자들의 가족을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시민들이 품게 될 신전에 대한 의심과 민심은 불안정했던 치안과 함께 차차 회복될 조짐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저는 기다려 보는 쪽에 찬성하고 싶어요.”
“…….”
엘레노아의 발언에 회의에 참석한 많은 사제들이 서로의 안색을 살피며 눈빛으로 의중을 교환했다.
이 회의에서 엘레노아의 발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막대한 원조를 보내주고 있는 페르니아스 왕국과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사람이며, 이번 사령술사 습격 사태를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내는데 일조한 일등 공신.
게다가 외부에서 드워프들을 진두지휘하며 빠르게 도시의 재건 작업을 바쁘게 진행하고 있는 은현의 아내이기도 하다.
“차기 성녀님께서는….”
한 고위 사제가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그냥 엘레노아 상위 사제라고 불러주셨으면 해요. 그 칭호를 이어받기에는…. 저는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이 자리에서 엘레노아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녀 본인의 요망에 따라 고위 사제는 호칭을 조정했다.
“엘레노아 상위 사제는 알베른이라는 이 소년을 차기 교황으로서 지지하고 있습니까?”
고위 사제의 물음에 많은 사제들이 침묵을 지키며 엘레노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현 시점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엘레노아가 알베른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시한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알베른은 엄청난 세력을 등에 업은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는 어느 분이 교황이 되던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예?”
엘레노아의 대답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신전이 다시는 부패하지 않고 베스타 여신님의 상징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만약 알베른님이 신성국을, 신전을 대표하는 교황의 자리에 어울리는 분으로서 성장한다면 당연히 지지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알베른에게로 시선을 옮긴 엘레노아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지지하지 않겠죠?”
“…….”
특정의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자리에 걸맞은 이를 선택하여 지지하겠다는,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고했으나, 그 의사를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니 더욱 부담스럽고 무섭게만 느껴진 건 알베른 뿐만이 아니었다.
교황에 어울리지 않는 이라면 누구라도 적대하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돌려 말하는 압박은 알베른이 아닌 신전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에 가깝기도 했다.
“이야~. 아주 지 남편을 닮아서 똑 부러졌네. 내가 후임 하나는 정말 잘 골랐다니깐?”
자연스레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엘레노아의 경고를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긴 건 아니에스가 유일했다.
“최,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경험을 쌓도록 하겠습니다….”
알베른은 작게 긴장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험난한 길을 새삼 직시했다.
◆ ◆ ◆
보수 작업 현장을 둘러보며 간단하게 보고를 받고, 은현은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신전 본교로 복귀했다.
이미 신전 안에서도 적지 않게 얼굴이 알려진 은현을 제지하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상위, 고위 사제들을 대하듯이 깍듯이 예의를 차릴 정도다.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의 남편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사령술사의 습격 당시 엘레노아와 함께 에레니움 곳곳을 뛰어다니며 언데드들을 처리했던 활약상이 벌써부터 퍼지기 시작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은현은 자신들의 동료를, 가족을, 시민들을 지키는데 크게 일조한 은인이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것은 당연했다.
당연하듯이 본교 안으로 들어간 은현이 향한 곳은 회의가 한창 진행중일 터인 회의실이었다.
때마침 회의가 끝났는지 회의실에서 다수의 사제들이 나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오셨어요?”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회의실에서 나온 엘레노아가 은현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응.”
은현은 자연스럽게 엘레노아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들이 봐요.”
“그럼 하지 말까?”
장소를 가리지 않는 스킨십에 얼굴을 붉혔지만 부끄러워하는 말과 달리 엘레노아는 은현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현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강하게 껴안는 엘레노아의 모습을 보고 다른 사제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의실 안에서 많은 사제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남편과 애정을 교환하고 있는, 사랑에 빠진 여자였다.
“저녁은?”
“아직이요. 지금 막 회의가 끝난 참이니까요.”
“그럼 같이 먹을까?”
“…아니요.”
엘레노아는 은현의 저녁 식사 권유를 거절했다.
당연히 받아들일 줄 알았던 은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따라 오세요.”
“어디 가는 거야?”
곧바로 그녀는 은현의 손을 붙잡고 그를 어딘가로 이끌면서, 은현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앞서 걷는 엘레노아를 따라 은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에린과 함께 세 사람이 머물고 있는 방이었다.
엘레노아는 문을 열자마자 은현을 방안으로 끌어들였고 그의 몸을 밀치며 침대에 눕혔다.
“…엘레노아?”
갑자기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으면서도, 은현은 엘레노아의 가녀린 손에 실린 힘에 저항하지 않고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이윽고 엘레노아가 은현의 허리 위에 올라타며 자신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헤치면서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었어? 유독 적극적이네?”
“저는 이제 당분간 신전 쪽 일을 하느라 바빠질 예정이잖아요. 그리고…. 당신도 무척이나 바쁘겠죠.”
원래 은현은 굉장히 바쁜 사람이다.
어떨 때는 짧게는 2주, 길게는 1개월이 넘게 집에 들어오지 못했을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곤 했으니, 아내들과도 함께 시간을 가지는 경우도 극히 드물 때가 있었다.
그것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의 아내로서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아마도 에레니움의 재건 작업이 끝난다면, 은현은 페르니아스 왕국 쪽과의 협상에도 신경을 기울여야 하고 일리아나와 육아에도 신경을 써야 할 테니,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마 그리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그러니까….”
새하얀 사제복 상의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새하얀 속살을 완전히 드러낸 엘레노아는 상체를 숙여 은현의 입에 입을 맞추어 키스했다.
열기를 띤 홍조로 물든 그녀의 눈빛에는 남편의 애정을 갈망하는 열기가 묻어나왔다.
“오늘은 저를 잔뜩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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