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7화 〉 697. 괴물의 경고(2)
* * *
“끝났다.”
일을 마친 엘빈은 곧바로 은현이 있는 장소로 복귀했다.
신전 본교 안의 엘레노아 은현, 에린이 받은 특실 안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차, 갑작스럽게 은현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엘빈이었지만, 누구도 그의 등장에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등장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은 함께 저녁을 먹고 있던 아니에스였다.
“…여기 신전 본교의 중심인데?”
새삼 느낀 거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방위결계를 뚫고 침입해왔다.
도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결계석의 복구로 현재 바쁘다고는 하지만, 신전 본교의 결계는 별개의 문제다.
“물리적으로 넘어온 게 아니니까.”
엘빈은 인간이 아니라 조영술이라는 그림자를 조종하는 것이 특징인 흑마법 속에서 탄생한 인공 정령이다.
본래 강력한 능력을 자랑했던 만큼 그 페널티 또한 만만치 않았었지만, 인간이 아닌 정령이 된 그는 이제 조영술을 아무런 페널티도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공간과 시간의 물리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그림자 안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게 된 그의 조영술은 이런 분야에서 특출나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고 있냐. 지금?”
아니에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쳐다보았다.
엘빈이 정령이 된 계기까지는 그녀 또한 미리 전해 들은 게 있어서 알고 있었다.
과거 동료였던 이중에도 정령술을 사용하는 앨리스가 있었으니 정령술이라는 능력 자체도 그렇게 생소한 분야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이 어떻게 정령이 될 수가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거기에도 은현과 일리아나가 개입해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설명이 붙는다면 납득이 가는 자신의 이성도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어떻게 니 주변에는 제대로 된 녀석이 없냐.”
“그건 너도 당연히 포함되는 이야기 같은데.”
“야. 니 친구들 중에서 내가 제일 정상이야.”
“…….”
저녁을 먹고 있던 은현이나 다른 두 아내도 따로 반박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박했다가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레노아의 경우에는 자신의 선임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때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에린이 엘빈에게 말을 걸었다.
“에휴.”
아니에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눈앞의 이 녀석과 적이 아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은현은 무력적인 면에서도 자신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지만, 정말로 무섭고 짜증 나는 것은 손에 들어온 패를 활용하는 능력이다.
특히나 이런 음지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모략 쪽은 아니에스가 전혀 가질 수 없는 분야의 능력.
만약 은현이 진심으로 신전을 부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신전이라는 집단 자체를 부수고 와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전투 능력에만 특화된 자신은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아니에스는 자신할 수 없었다.
“허서하! 호하!(어서와! 오빠!)”
입안에 음식을 가득 우겨 넣고 자신을 반긴 에린을 보고, 엘빈은 인상을 찡그렸다.
“…적어도 입안에 있는 걸 다 먹고 말해.”
아무리 친한 사람들만 있어서 굳이 격식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편한 자리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은현이나 엘레노아나 그저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에린을 보고 신경을 쓰기는커녕 귀엽다고 하는 것을 보자니, 결혼한 후 얼마나 오냐오냐 응석을 받아주면서 생활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원래 공작가문의 여식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왔던 엘레노아도 필요할 때는 에린에게 혹독하게 예의범절을 가르쳤지만, 이런 사석에서는 역시나 에린에게 너무 물렀다.
엘빈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저렇게 오냐오냐 응석을 받아주면서 자라는 여동생이 살짝 부끄러웠다.
“수고했어. 엘빈.”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는 에린을 대신해, 은현이 엘빈에게 수고의 인사를 건넸다.
엘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엘빈에게 있어 이번 일은 딱 그정도의 인식이었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여동생인 에린까지 도움을 준 은인인 것을 떠나서, 엘빈은 어디까지나 정령이며 은현은 자신과 정령 계약을 맺은 주인이다.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것에 아무런 수고나 불만도 느끼지 않았다.
“그래도 갑작스럽게 불렀는데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확실히…. 그건 좀…. 그랬지.”
엘빈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에리스가 울었다. 날 따라오고 싶다면서….”
은현의 부탁을 받아 신성국으로 이동을 하려 했을 당시, 엘프의 숲에 거주하고 있었던 엘빈은 자신을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린 엘프 소녀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을 떠올렸다.
에리스의 부모인 데르킨과 앨리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신성국으로 오는데에도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건…. 미안하다고 전해줘.”
은현도 쓴웃음을 지으며 갑작스럽게 엘빈을 부른 것에 대하여 엘프 소녀인 에리스에게 심심찮은 사과의 말을 대신 부탁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지?”
“그 사제와 결탁했던 나라의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경고했고 성공적으로 서명도 받았다. 그리고 그 고위 사제에게도 제대로 경고를 해주고 왔지. 네 부탁대로 이제는 신전 안에서 멋대로 설치지는 못 할 테지.”
물론 엘빈은 자신이 어느 수준으로 경고를 했는지까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숨통을 끊어놓지만 않았을 뿐이지 그가 했던 경고의 수준은 끔찍하고 참혹했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의 앞에서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 움직여줘서 고마워.”
적당한 타이밍에 저녁 식사가 끝났고, 엘레노아와 에린이 후식으로 차를 준비하러 자리에서 일어난 사이.
은현은 아니에스와 함께 곧바로 다음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아니에스.”
“왜.”
“알베른의 차기 교황 입후보 계획.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냥 선언해버려.”
“…진심이냐?”
아니에스는 은현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보였다.
현재 알베른의 나이는 아직 15살도 안 된 소년.
그런 그가 차기 교황의 자리를 정하는 경쟁에 입후보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을 선언해봤자, 돌아올 반응은 뻔하다.
많은 고위 사제들이 알베른의 입후보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알베른은 현 교황의 핏줄을 이어받은 손자이기 때문에, 그 부분을 고려해보았을 때 강력한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이가 너무 어리고, 이렇다 할 지위나 실적도 없다는 것을 핑계로 알베른의 평가를 깎아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아니에스는 적어도 알베른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가 교황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서 문외한인 그녀가 차기 교황을 목표로 삼고 있는 알베른을 지키기 위한 수단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현은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발표하려면 지금이 적기지.”
“적기라고?”
“신전의 내부 상황이 엄청나게 흔들려서 혼란한 지금이니까. 게다가 유력한 경쟁자들도 사라질테고.”
“사라진다고? 도대체 무슨…. 아.”
아니에스는 은현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아니지?”
“뭐가?”
“너 지금 저 녀석 시켜서 교황 자리를 노리고 있는 다른 고위 사제들을 암살할 생각이냐고.”
아니에스는 손가락으로 그림자 정령인 엘빈을 가리키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그건 안돼. 그건 신전이 파멸하게 되는 길이야.”
실제로 교황 후보로 거론되는 고위 사제들 중에는 정말로 청렴결백하게 여신을 모시는 신실한 사제들도 존재했다.
출세욕이나 야심에 차 다른 마음을 품고 비리를 저지른 개자식에 쓰레기 후보들이야 죽어 마땅하단 것에는 아니에스도 동의하지만, 적어도 교황 후보 선정 과정에서 피가 튀는 싸움만큼은 피해야만 했다.
“누가 죽인데? 그런 강경한 수단은 나도 쓰고 싶지 않아.”
피로 얼룩진 끝에 더럽혀진 왕좌 따위는 다른 곳은 몰라도 여신을 모시는 에레니아 신성국에서는 절대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평화와 구원의 상징인 여신의 신전 전체를 책임지는 자리다.
경쟁은 이루어지되, 칼부림이 난무하는 그런 경쟁 끝에 쟁취한 교황의 자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적어도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판은 만들어줄게.”
은현은 딱히 알베른을 교황 후보로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를 교황 후보로 밀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니에스의 판단.
은현은 알베른과 만나고 말을 섞어 본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을 잘 이끌고 신성국을 잘 통치할 수 있는 청렴결백한 인간이면 누구든 좋았다.
현재로선 거기에 알베른이라는 소년이 가장 가까웠을 뿐이다.
은현이 해주려는 것은 이번에 거침없이 더러운 야심을 드러냈던 벨라스 고위 사제처럼 비리가 가득한 교황 후보 고위 사제들을 후보 경쟁 속에서 치워버리는 것 정도다.
알베른이 차기 교황이 되느냐 마느냐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능력에 달린 문제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내가 하는 제안인데. 신전 안의 제도와 교리 손 좀 볼 수 있겠냐?”
“그건….”
아니에스가 쉽게 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현 교황의 승인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바로 답변하기가 꺼려졌다.
“할배한테 물어볼게.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건데?”
“적어도 그 사령술사같은 끔찍한 재앙이 또 다시 태어나지 않도록, 손은 봐야지.”
“…….”
마리우스의 시작점은 베스타 신전이었으며, 이 집단이 가지고 있는 부조리한 부분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피해자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여신께서 내린 은혜로운 신성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용하고 기만한 결과로 이어진 재앙.
명백히 신전이 가지고 있는 어둠으로인해 태어난 재앙이었다.
은현은 신전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방치하고 외면해왔던 아픈 그 부분을 지적해왔다.
“할배한테 얘기해볼게. 한번 바꿔보자고.”
물어본다는 것이 아니라, 꼭 바꾸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아니에스의 확답을 듣고, 은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일단 한번 시작한 청소를 시작해야겠지.”
“꼭 이렇게 암살같이 뒤가 구린 방법을 계속 쓰게?”
“아니. 이번이야 그놈이 워낙에 앞에서 설쳤으니까 급하게 약을 친거고. 지금부터는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가야지.”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다리안님이라고 그랬나. 그 이단심문관장이라는 분.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데 부탁드려볼 수 있겠냐?”
“그거야 쉽지.”
다리안은 아니에스가 알고 있는 본교의 사제들 중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은 이들 중 하나다.
전쟁이 끝나고 신전 본교로 복귀한 그녀가 대주교가 되기까지 마음을 열고 친교를 다진 몇 안 되는 사제 중 한명이기도 했다.
게다가 신전의 이름을 걸고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정의로운 성정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단심문관에 지원한 이상한 남자이기도 했다.
“당장 불러올게.”
방을 나간 아니에스에게서 은현이 시선을 옮겨 향한 곳은 엘레노아와 함께 차를 준비하고 있던 에린이었다.
“에린.”
“으응?”
“슬슬 일할 준비 하자.”
“응! 알았어! 뭘 하면 되는데?”
“나쁜 놈들 싹 잡아오면 돼.”
“알았어! 나만 믿어!”
정말로 알아들은 걸까.
에린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들은 엘빈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여동생이 또 무슨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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