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6화 〉 696. 괴물의 경고(1)
* * *
“후우.”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고위 사제, 벨라스 마체드는 의자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휴식을 취했다.
“크크.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는 신전 본교 안에서 교황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고위 사제 중 한 명이다.
그저께의 회의에서 신전의 복구에 필요한 많은 원조를 약속하면서 자신의 공헌을 인정받은 것에 크게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신전의 명예와 권위는 현재 이례적인 수준으로 위험을 맞이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위태로운 신전의 내부 상황은 역으로 벨라스 고위 사제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지금껏 형성해온 인맥과 배경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높게 끌어올려 줄 것이라 확신했다.
내부에서 자신이 신전을 장악하기만 한다면 교황 후보로서 쌓아온 공헌도를 조작하는 것은 일도 아니니, 벨라스 고위 사제는 이미 승리에 취해 있었다.
“원조는 순조롭다.”
자신에게 약속한 수많은 외국 귀족들의 원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조만간 막대한 물자를 실은 마차들이 에레니움으로 도착할 예정이니 벨라스 고위 사제는 그에 따라 사전에 정해둔 계획들을 진행시키기만 하면 됐다.
“흐음. 문제는…그들에게 치러야 할 대가로군.”
당연히 외국 귀족, 왕족들이 약속한 원조는 대가 없는 호의가 아니다.
그들은 벨라스 고위 사제의 위상과 권위를 상승시켜주는 원조를 보내주는 대신, 자신들에게 다수의 사제를 보내오길 원했다.
물론 자국의 이익이나 영지를 안전하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 같은 훌륭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여사제’들 뿐.
신전의 젊은 여사제 중에는 대부분 순결한 여성들이 많이 있다.
원조를 대가로 귀족들이나 왕족들이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더러운 이유에 불과했다.
현재 사령술사와 다수의 테러 조직들이 대륙에서 날뛰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배와 욕망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가관인 것은 차기 성녀로 거론되고 있는 엘레노아 아르미타스를 원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니에스의 후임으로 지금도 베스타 신전 안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게다가 동시에 페르니아스 왕국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여식이기도 하니, 자연스레 페르니아스 왕국과도 연줄을 만들 기회까지 얻게 될 터.
또한 그녀의 외모 또한 매우 아름다워 페르닌의 꽃이라고 불리는 여자이기 때문에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들로서는 탐이 날 수밖에 없다.
설령 그녀가 이미 결혼한 유부녀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로는 욕심을 접을 인간들이 아니었다.
“…쯧. 욕심이 그득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이미 자신 또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다수의 여사제를 타국에 팔아넘기는 쓰레기이지만, 이들의 욕심은 끝을 모른다.
벨라스 고위 사제는 혀를 차며 고민했다.
지금 상황에서 엘레노아를 건드리는 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엘레노아가 가지고 있는 신전 안의 지위나 영향력도 그렇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의 남편인 은현이라는 남자다.
이번 사령술사 습격 사건은 사실상 엘레노아는 물론 은현이나 그의 또 다른 아내인 에린이라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에 경미한 피해 수준으로 넘길 수가 있었다는 것을 신전의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
벨라스 고위 사제는 적어도 엘레노아나 은현 부부를 건드리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뭐 그 인간들에게는… 적당히 다른 사제들을 던져주면 되겠지. 음…?”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벨라스 고위 사제는 책상 위에 놓인 편지 다수를 발견했다.
밀랍으로 봉해진 고급스러운 봉투는 곧바로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누구지?”
저택의 사용인은 오늘 자신에게 온 편지 같은 걸 언급한 적이 없었다.
“쯧. 잊어버린 건가.”
한 통도 아니고, 총 여섯 통의 편지가 온 것을 말하지도 않고 빼먹다니, 사용인들의 방만한 태도에 짜증이 났다.
나중에 단단히 다시 한번 주의를 주며 교육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벨라스 고위 사제는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살폈다.
편지는 자신과 결탁한 외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보낸 것이었다.
한통을 뜯어 차근차근 내용을 읽어보았던 벨라스 고위 사제의 두눈이 크게 떠지며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갑자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벨라스 고위 사제는 이윽고 아직 뜯어보지 않은 다섯 통의 편지를 쳐다보았다.
“설마…!?”
거칠게 편지 봉투를 쥐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다른 편지들의 내용을 확인했다.
여섯 통의 편지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너에게 약속했던 신전의 원조를 철회하겠다.’라는 내용.
편지 안을 가득 채우는 미사여구는 모조리 집어치우고 간결히 정리한 내용은 그러했다.
하지만 여섯 명이 동시에 똑같은 의사가 전달된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다.
“당장…. 당장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 해!”
벨라스 고위 사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황을 파악해보려 몸을 일으켰고, 곧바로 큰 목소리로 사용인을 부르기 위해 소리치려 했다.
“이봐…! 읍!?”
갑작스레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옥죄이고 목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벨라스 고위 사제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용히 해.”
목소리는 들리지만, 그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벨라스 고위 사제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발끝에서 생겨난 새까만 그림자가 뱀처럼 구불거리며 기어 올라와 자신의 전신을 옥죄었다.
“읍! 으읍!”
그림자로 뒤덮인 입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을 움직여 발버둥을 쳤지만, 그 반항을 제압하기 위하여 그림자는 더더욱 벨라스 고위 사제의 몸을 강하게 조였다.
“크…으윽!”
“조용히하라고 했을텐데,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군.”
마치 생각대로라는 듯 그림자는 움직였다.
전신을 옭아맨 그림자가 벨라스 고위 사체의 오른손을 휘감았다.
콰직!
손가락을 압박하다 못해, 뒤틀리는 관절이 기형적인 형태로 꺾였고 새끼손가락의 뼈마디가 분질러진다.
“읍!? 으으읍!”
격렬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것조차 그림자에 입을 봉인 당하여 자유롭지 못한 상태.
고통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몸부림이 더욱 거세지자, 그림자는 새끼손가락에 이어 약지 손가락까지 망설임 없이 꺾어버렸다.
콰직!
“크으으읍!”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중지 손가락을 아예 뽑아버릴 수 있어.”
“읍! 으읍!”
그림자의 사나운 경고에 벨라스 고위 사제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끔찍한 고통은 다시는 느껴보고 싶지 않은 공포 그 자체였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 입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
그림자의 제안을 들은 벨라스 고위 사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두 개가 분질러진 격통은 아직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이 위기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그림자가 풀어졌음에도, 벨라스 고위 사제는 다행히 비명을 지르며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기습을 당한 처음의 패닉상태와 달리, 그는 어느 정도 냉정함을 되찾았다.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나?”
“선물이라면…. 설마 저 편지들은…!?”
“내가 보냈지. 하지만 편지들은 위조가 아니야. 모두 그들에게서 직접 자필로 받아낸 서명이다.”
“어떻게 그걸….”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지금처럼 이렇게 저택에 침입해서….”
전신을 옭아매고 있던 그림자 일부가 정면으로 튀어나와 날카로운 칼날을 형성했고 벨라스 고위 사제의 목을 겨눴다.
“조금 부탁을 하니까 들어줬을 뿐이지.”
실제로 물리적인 거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그림자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곳을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이전에는 그림자 속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몇 주간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
그는 인공적으로 탄생된 마법이자, 정령인 그림자.
“…….”
벨라스 고위 사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것이 허세가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왕족이건, 귀족이건, 이 그림자는 대상의 공간 안에 잠입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암살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자신과 결탁했던 여섯 명의 왕족과 귀족들은 강대국으로 손꼽히는 페르니아스 왕국처럼 강력한 전력이나 마법사들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법적인 수준 높은 침입 수단에는 취약하다.
그림자의 말은 사실이다.
“…….”
벨라스 고위 사제는 고민했다.
이 그림자는 언데드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신성력으로 기적을 발휘한다면, 이 위기는 타개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자신이 신성력으로 기적을 사용할 때까지, 이 그림자가 가만히 기다려줄 리가 없다.
물리적인 전투 능력을 갖추지 않은 벨라스 고위사제는 아무런 호위병력도 없이 전신을 구속당한 현재는 이미 사면초가의 상황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벨라스 사제는 빠르게 상황을 인정했고 그림자에게 굴복했다.
덜덜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하여 설설 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치졸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림자 정령 엘빈은 그렇게 벨라스 고위 사제에게 경고했다.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경고다. 신전 안에서 불필요한 외부 세력을 개입시키지 마.”
“하, 하지만 지금 혼란스러운 신전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내 설명을 못 알아들었나? ‘불필요한’ 외부 세력을 개입시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 네가 끌어들인 이 중소국의 왕국과 귀족들은 모두 더러운 속내를 감추고 네 야망에 탑승한 쓰레기들이지. 너와 이들이 신전 내부에 개입함으로써 상황이 얼마나 개판으로 돌아갈지는 설마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나?”
“…….”
“네가 하려는 짓은 몸 안에 쓰레기 같은 병균을 스스로 집어넣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너 같은 놈이 차기 교황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용납이 되지 않아.”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듯, 엘빈은 벨라스 고위 사제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는 그림자를 더욱 강하게 조였다.
“허…윽…!”
목이 졸려 기도가 막혀버린 벨라스 고위 사제는 제대로 된 호흡도 하지 못해 움직이지 못하는 전신을 버둥거렸다.
“다시 한번 경고하지. 내 경고를 무시하면 죽는다.”
“커…윽….”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압박에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엘빈의 경고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엘빈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나대면 죽는다. 이번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도 죽는다. 나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말해도 죽는다. 또 한 번 쓸데없는 생각을 품고 앞에서 설쳐도 죽는다.”
“알, 알겠…. 알겠습니다…!”
옥죄어오는 공포 속에서, 벨라스 고위 사제는 간신히 대답했다.
대답하지 못한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여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소리를 내어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 대답이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전신과 목을 조이고 있던 그림자가 조금씩 느슨해져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한 번 서늘한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또, 또 무슨 용무가….”
“너는 고위 사제에 오르기 위해서 온갖 더러운 일들을 행해왔다지? 막 견습 생활을 마친 젊은 여사제들을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 같은 유력자들에게 팔아넘겼다던가.”
그리고 그 여사제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경험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 그것은…!”
“쓰레기 같은 놈.”
느슨해졌던 그림자가 다시 벨라스 고위 사제의 전신을 옭아매어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신의 관절과 뼈마디들을 사정없이 비튼다.
콰직!
손가락은 물론, 발가락과 발목부터 전신에 이르는 모든 관절을 엮으로 꺾어버리며 분쇄시킨다.
근육이 비틀리다 못해 끊어지고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여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전신을 덮쳤지만 또다시 그림자로 입을 틀어막힌 벨라스 고위 사제는 비명 한번을 지르지 못했다.
“읍! 으으읍! 으으으으!”
마침내 전신의 모든 관절을 부숴버린 그림자가 느슨해지며 그의 전신에서 떨어져 나갔다.
“크, 으윽….”
온몸이 부서진 벨라스 고위 사제는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팔다리는 물론 손가락과 발가락의 마디마디와 관절이 모조리 분쇄된 그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저 고개만을 살짝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는, 그의 앞에 칠흑 같은 검은색의 로브로 전신을 뒤덮은 사람이 한 명 존재했다.
저것은 사람인가? 그럴 리가 없다.
저것은 괴물이다.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몸이 공포로 벌벌 떨렸다.
“그 시선은 아주 잘 알고 있지.”
자신을 괴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은 엘빈에게 아주 익숙했다.
하지만 가소롭기 짝이 없다.
괴물같은 특성과 능력을 가진 인공정령인 자신과, 괴물과도 같은 인성과 사고방식을 가진 이 사제라는 쓰레기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이윽고 엘빈은 재차 경고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내 경고를 무시한다면….”
푸욱
그림자로 만들어진 칼날이 벨라스 고위 사제의 목에 드리워졌다.
“그때는 정말로 죽는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네 목에 나의 그림자를 꽂아 넣을 수 있다.”
“알, 알겠습…니다….”
벨라스 고위 사제는 힘없이 답했다.
그의 확답을 들은 그림자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깨끗하게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사라졌다.
“젠…장…!”
그림자가 사라지자 전신의 격통으로 벨라스 고위 사제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황급히 신성력을 일으키며 전신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지만.
“어…?”
기적을 일으켜주는 근원인 신성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어, 어째서…?”
마치 자신의 몸에 존재했던 신성력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은 점점 불안감을 낳았고 이내 확신으로 변했다.
베스타 여신이 자신의 몸 안에 깃들어 있는 신성력을 거둬갔다.
“아, 안돼…! 안돼!”
여신의 은총을 사적으로 남용하고 있던 사제로서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을 맞이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