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5화 〉 695. 선의 속 속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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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스는 천천히 자신과 다리안이 가지고 있던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아마 타국에서도 많은 항의와 문의가 들어올 거야.”
에레니아 신성국의 가장 큰 특징은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중심 체제로 돌아가는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에레니아 신성국은 타국과의 외교를 통해서 지금까지 큰 성장을 거둬왔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와 성기사들을 해외로 파견하고 그를 통해서 지원금을 받는 식의 운영이 가장 대표적인 예.
그리고 그와 함께 들어오는 수많은 기부금들이 에레니아 신성국의 운영자금 중 3할에 육박한다.
에레니아 신성국이 다른 타국과 비하여 부유함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기부금들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에스는 앞으로 신전의 운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만한 문제가 생겨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항의인가.”
은현은 아니에스의 말을 곱씹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대충 예상이 됐다.
아마도 이번 사태로 신전의 힘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하나둘씩 속출할 지도 모른다.
많은 국가와 영지들이 에레니아 신성국에 막대한 기부금을 전달하고 그 대신 사제와 성기사들을 지원받는 이유는 그들이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사제는 부상을 치료하고 데미지를 회복시키는 분야에 특출남을 보이는 최고 인력이며, 성기사는 강력하게 단련된 신체 능력으로 전투에서 그 능력을 여김없이 발휘한다.
비슷한 전력으로는 모험가를 예로 들수 있느나, 돈과 계약에 얽매인 개인주위의 성향을 띠는 모험가들과 달리 신전의 병력에는 공공성을 띄우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수가 있는 훌륭한 전력.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신전의 전력에 대하여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올 것이다.
그만큼 사령술사의 침입을 막지 못한 이번 실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심지어 침입을 한 장소가 베스타 신전 본교가 있는 에레니아 신성국의 수도, 에레니움이라는 것이 더더욱 문제다.
적지 않은 수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죽었고 1만 명이 넘는 숫자의 민간인 사상자가 생겨났단 이 사태에 대하여 많은 타국의 인사들이 의문을 품고 항의를 할 것이다.
‘정말로 사제와 성기사들의 전력을 믿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
결국, 누군가는 그 의문과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신전에 항의를 할 것이며, 누군가는 신전에 보내고 있던 기부금을 철회할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사제와 성기사들을 잃은 신전은 초토화가 되어버린 도시를 복구하는데에도 많은 자원이 소모되어 내정은 불안정한 상태.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부금도 끊어진다면 운영은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은 괜찮겠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둘은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방법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운영과 재정 문제는 지금 그렇게 위태로운 수준은 아닙니다. 문제는…. 대륙에 퍼져있는 신전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거죠.”
강대국 중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지금은 아직 버틸만 하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믿음과 신뢰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성장을 이룩해온 신전과 에레니아 신성국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장 문제시 되는 건 이번 사태의 원흉인 사령술사의 출신입니다.”
재앙의 근원인 사령술사, 마리우스 홀튼이 본래에는 베스타 신전의 사제였다는 사실은 신전 내부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이 사실이 외부로 퍼지기라도 한다면?
점화된 불씨는 점점더 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그 사실을 어떻게든 감추고는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고 감춰질 비밀이라고는 생각 안해.”
그러기엔 벌어진 일의 크기가 너무 크다.
아무리 꽁꽁 싸매고 감춘다고 할지라도 그 비밀이라는 것은 언젠가 흘러내리기 마련이라는 걸 아니에스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터졌을 때,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하는 이야기.
“그 새끼가 노리고 있던 게 이거겠지.”
신전의 명예와 권위의 실추.
그로인해 가져오는 대륙의 혼란이 마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노림수다.
신전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악감정을 풀어낸 결과는 너무나도 무거워서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두통을 유발했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신전 안의 알력 다툼도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어요.”
사실 지금 아니에스와 다리안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도 이것이었다.
혼란해진 상황 속에서 한 고위 사제가 전면적으로 앞에 나서기 시작했다.
“알력 다툼이라….”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이 집단조차도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낸 단체.
집단을 이끄는 수장의 자리가 존재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런 부분은 페르니아스 왕국이나 에레니아 신성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시작을 알린 것은 교황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고위 사제들중 하나가 외부로부터 많은 자금을 끌어와 신전의 재정을 지원하기 시작해서부터입니다.”
본래 가지고 있던 재산은 물론, 외부로부터 자신이 가지고 만들어온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신전을 지원하고 그 공적을 어필한다.
“…속내가 뻔하네.”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많은 이들이 신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의심의 연기를 피우고 있을 때, 이들이 신전을 지원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신전의 내부를 자신의 세력으로 채워넣고 베스타 신전을 장악하기 위해서.
지금은 엄청난 피해로 인해 권위와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주춤하더라도, 신전의 위상이 복구가 되기만 한다면 그 이후에 만들어질 막대한 이익은 자신들의 주머니와 배를 불려줄 것이 틀림없다.
고위 사제들과, 그들과 결탁한 신전 외부 세력들이 노리는 것은 교황의 자리와 신전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이익을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이다.
마치 저점일 때 주식을 사서 의도적으로 값을 올린다면 고점일 때 이익을 보려는 투기와 비슷하다.
“안 그래도 바빠죽겠는데 진짜….”
신전을 지원해주는 막대한 원조 자체는 아니에스나 다리안으로서도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 더러운 속내를 알고 보니 짜증밖에 치밀어오르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성질머리 같아선 그 같잖은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외국과의 외교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는 에레니아 신성국의 특성상 그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위기를 기회로 보고 자신들의 입지와 권력을 다지려는 고위 사제들도 견제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던 차였다.
적어도 현 교황의 손자인 알베른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었건만, 차기 교황을 정하기 위한 내부의 알력 다툼은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인해 너무도 빠르게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외교 차원으로 들어오는 그 지원을 거절할 명분도 마땅히 없을테고?”
“…짜증나게도 그렇네.”
“…그렇습니다.”
“흐음. 도와줄까?”
“방법이…있는 겁니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은현이 뜻밖에도 손을 내밀어주자, 다리안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요컨대 교황의 자리를 차지하고 크게 한탕 해 먹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그 고위 사제하고, 그놈하고 결탁한 외부 세력을 견제하면 된다는 거지?”
“…그렇지.”
아니에스나 다리안도 대주교나 이단심문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만큼 신전 안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그 원조는 겉보기에는 순수한 호의로 포장되어 있는 깨끗한 돈이다.
아무런 증거나 명분도 없이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와 정황을 모두 들은 은현은 품에서 통신용 수정 구슬을 꺼내어 어딘가에 통신을 걸었다.
[…무슨 일이죠?]
“오랜만입니다. 여왕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은현의 통신을 받은 이는 몇 달 전에 대관식을 마치고 정식으로 여왕이 된 유리아 페르니아스였다.
유리아는 오랜만에 듣는 은현의 반가운 안부인사에 기가 차서 짜증이 섞인 말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하…. 잘 지내냐고요? 네. 아주 잘 지내고 있죠! 누구 덕분에…!]
유리아의 목소리에는 피곤과 짜증이 찌들어있었다.
현재 그녀는 복잡한 왕국의 내정을 정돈하고 외교 문제를 처리하면서 국력의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에 4~5시간을 자면서 밤잠을 설쳐가며 일하고 있는 이유는 그녀를 여왕의 자리로 밀어넣은 은현이 최근에도 많은 일거리들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뭐에요? 설마 또 뭔가 일이 생긴 건 아니죠?]
“죄송하지만 좀 부탁드릴 일이 생겼는데요.”
[아오 진짜….]
유리아는 어째서 슬픈 예감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는지 스스로를 한탄했다.
불만을 가지고 표출은 하더라도, 유리아는 은현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마치 직장 상사가 내리는 업무 명령과도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 어마어마한 일거리들을 던져주는 직장 상사를 한 대 후려치고 싶어주는 충동과 달리 그것을 실행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은현은 자신보다도 더 많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유리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을 잘못 탔어…. 그나마 살길이 열리는 동앗줄인줄 알았는데…. 끊어지지만 않지, 그냥 영원히 끊어지지만 않는 썩은 동앗줄이야.]
마치 원치도 않는 고급 외제차를 선물 받고 다달이 값아야하는 할부금이 생긴 기분이다.
어쩌다 보니 여왕이 되었고, 그 지위에 맡겨진 역할과 책무를 소화하느라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고 바쁜 일상으로 가득했다.
“여왕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나 빨리 씻고 자고 싶으니까 빨리 말하세요.]
그렇게 통신을 하고 있는 은현을 보고 있던 다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아니에스에게 물었다.
“아니에스님. 저분은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겁니까?”
원거리로 통신을 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잠시, 통신을 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궁금해진 다리안의 물음에 아니에스는 그 대상에게 살짝 동정심을 가지며 답했다.
“있어. 요즘 굴릴 수 있는 부하직원이 하나 생겼다면서 저놈이 아주 좋아하던데.”
세상에 일국의 여왕을 저런 식으로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건 아마 은현이 유일하지 않을까.
‘어, 이거 주무른다고 하니까 뭔가 야하네.’
사령술사의 습격과 그로 인해 이번 위기를 틈타 신전 내부를 장악하려는 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개판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전해 들은 유리아는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당신은 항상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거예요?]
“억울합니다만. 저는 주로 휘말린 쪽인데.”
[당장 개명하세요. 코난이나 김전일이라는 이름으로. 그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여왕님. 혹시 일리아나한테 무사히 축하 선물 보내셨습니까?”
[…….]
느닷없는 은현의 질문에 유리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해보니 일리아나가 무사히 출산을 마치고 예쁜 딸을 낳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이후로 한번도 찾아가보기는커녕 선물조차 전하지 못했다.
[바, 바빠서 그동안 정신이 없었어요. 스승님한테는…. 잘 좀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설마 겨우 이런 걸로 일리아나가 서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상상에 유리아는 적잖게 당황했다.
하지만 은현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이번일 잘 처리해주시면 제가 일리아나한테 잘 말해둘게요.”
[다, 당신 지금 그걸 협박이라고…!]
“하지 말까요?”
[…씨이.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유리아는 수면 시간이 3시간으로 줄어들 것만 같은 예감이 적중하자, 괜히 은현에게 역정을 냈고 신경질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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