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94화 (677/730)

〈 694화 〉 694. 선의 속 속내(1)

* * *

싸움은 끝났다.

도시 전체에 드리웠던 끔찍한 사기(死?)는 사제들의 신성력에 의해 완전히 정화되었고, 신전은 시민들의 구조 활동에 전념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아침을 맞이하고 나서야 암울하고 소란스러웠던 도시의 분위기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신전의 인사들과 달리, 본교의 회의실은 굉장히 고요했다.

회의가 시작된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몇 군데 있었다.

도시의 구호작업이 한창이기 때문에 바쁜 업무로 참석하지 못한 자리도 있었지만, 이번 사령술사의 공격 사태에 대처하다가 결국 사망해버린 탓에 공석이 발생한 자리도 존재했다.

“…피해는?”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니에스였다.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한 성기사가 무거운 입을 열고 보고를 시작했다.

“시민의 사상자 숫자는….”

이번 사태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약 1만 5천 명 정도.

에레니움의 총 인구수가 약 100만명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비율은 제법 적은 숫자에 속했지만, 그것이 이번 사태에 대하여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젠장.”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피해로 그친 게 다행입니다. 만약 엘레노아님과 일행분들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피해는 더 확대되었겠죠.”

아마도 그 피해는 최소 10만 명 이상을 가뿐히 넘었을 것이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언데드는 시체가 시체를 불러모으며 그 사기(死?)를 흩뿌리고 확산시킨다.

게다가 웬만한 성기사와 사제들만으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데스나이트들을 최우선적으로 정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은현과 에린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엘레노아의 강신(??)으로 만들어진 기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피해에서 그칠 수 있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구하지 못한 생명에 대해서 위안을 가질 수는 없어.”

“…그렇죠.”

아니에스의 말에 성기사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라도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태를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외부의 침입자로 인해 발생한 재앙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드러난 사실들이 너무 무겁다.

그 침입자가 사령술사였고, 역사상 단 한 번도 해제된 적이 없었던 방위 결계가 해제되었으며, 신성력의 가호를 받는 이 도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졌다.

재앙의 침입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하지 못했고,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시민들을 모두 돕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신전의 명예와 권위는 너무도 쉽게 실추된다.

“신전 쪽의 피해는 어느 정도야?”

“저희 쪽 피해는….”

주로 이제 막 견습을 뗀 젊은 성기사나 사제들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직 실력이 미숙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을 베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경험 쪽이 문제였다.

그들은 언데드로 전락한 시민들의 시체를 보고 주저했고 그 주저함은 전투 속에서 치명적인 실수로 작용했다.

엘레노아의 강신으로 언데드들의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리의 동요를 억누르지 못한 것은 생각보다 큰 패착으로 작용했다.

특히나 상대였던 마리우스가 그런 감정을 악랄하게 농락하고 조롱하며 즐기는 사이코 기질이 가득한 사령술사였기 때문에, 운이 나빴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 수고했어. 특이사항이 있으면 바로 보고해줘.”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성기사는 회의의 참석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들은 참석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이렇고, 이제는 앞으로의 상황을 이야기해볼까?”

사령술사의 공격 자체는 어찌어찌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 고민하는 것은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였다.

“으…음….”

아니에스가 첫 운을 떼기는 했지만, 회의에 참석한 상위, 고위 사제들 중 입을 여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솔직히 그들 또한 자신이 신전 본교에 들어와 부임한 이래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번 사건은 앞으로도 정치적인 문제로 복잡하게 엮일 것이 확실한 만큼, 회의는 길게 이루어졌다.

◆ ◆ ◆

잠시간 눈을 붙이며 얕은 잠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엘레노아가 슬며시 눈을 떴다.

후각을 자극하는 향긋한 홍차 향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엘레노아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행색과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하얀 네글리제를 입은 자신의 행색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특실을 확인하고,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고 있는 에린을 발견했다.

“음…. 히히.”

기분 좋은 향을 맡았는지 실실 웃으며 엘레노아의 허리에 더욱 얼굴을 비비는 에린의 행동을 보고, 엘레노아는 피식 웃으며 에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마치자마자 곯아떨어지듯 침대에 누웠던 자신과 에린의 모습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침까지 이어졌던 전투가 그만큼 격렬했고 피로를 누적시켰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린은 몇 시간을 가까이 바쁘게 도시 곳곳을 뛰어다니며 데스나이트를 처리했고, 엘레노아는 강신(??)을 사용한 이후 밀려오는 정신적인 탈력감으로 작지 않은 피로가 쌓였던 전투.

이 싸움 속에서 가장 큰 활약을 했던 것은 은현과 엘레노아, 에린의 세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니에스가 특단의 조치로 이렇게 신전 안의 특실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같이 침대에서 잠을 청하여 휴식을 취했을 은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엘레노아는 자연스레 자신의 후각을 자극하는 향긋한 홍차의 향이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은현이 말끔한 상태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엘레노아의 시선을 느낀 은현이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레노아를 보며 은현은 웃었다.

“잘 잤어?”

“네…. 당신은…. 안 주무셨던 거예요?”

“아니. 그냥 좀 일찍 일어났어. 눈이 그냥 떠지더라고.”

사실 어젯밤 에린 못지않게 가장 많이 움직여 에너지를 소비했을진대, 아이러니하게도 평소와 다름없이 가장 먼저 기상한 것은 은현이었다.

“깨워주시지 그랬어요.”

“많이 피곤했는지 너무 곤히 자고 있더라고. 게다가….”

은현은 엘레노아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단잠에 빠져있는 에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떼어놓을 수가 있어야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에린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에린이 일어날 때까지 적당히 기다렸어. 지금은…. 밖도 아직 많이 바쁜 것 같고.”

“회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나요?”

“응.”

엘레노아는 특실로 안내받기 이전에 아니에스에게서 회의 일정이 잡혀있다고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마도 현재 도시와 신전의 피해 현황을 보고 받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한 회의일 것이라 추측했다.

사태가 사태였던지라 회의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으리라는 것도 그리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흘끗 천장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아침 일찍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부터 잠에 빠졌던 것을 생각하면 제법 부지런한 성격인 엘레노아로서도 꽤 오래 잔 편이다.

“…무슨 회의가 오가고 있는 걸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긴 시간 동안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엘레노아는 신경 쓰였다.

“…흐음.”

솔직히 이 다음에 벌어질 전개야 대강 예상이 가기는 했지만, 은현은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으응….”

꼬르륵

뱃속에서 울리는 신호와 함께 인상을 찡그린 에린이 조금씩 몸을 뒤척였다.

“배고파아….”

정말이지 솔직한 반응이었다.

엘레노아는 때가 되자 잠꼬대로라도 솔직하게 공복을 호소해오는 에린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에린. 우리 밥 먹어야 하지 않을까?”

“바압…. 네….”

엘레노아의 제안이 제법 솔깃했는지 에린은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눈가를 비비며 비몽사몽 했던 정신을 조금씩 일깨우고 벌써 일어나 말끔한 상태인 은현을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현이 안 잤어?”

“그냥 일찍 눈이 떠졌어.”

“와아…. 난 진짜로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은데….”

유독 아침잠이 많고 평소에도 게으른 성향을 가진 에린으로서는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성실함이었다.

“씻고 준비해. 늦었지만 뭔가는 먹어야겠지.”

“응.”

에린은 양팔을 위로 쭉 뻗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은현이 상황을 살피고 먹을 음식을 받으러 간 사이, 엘레노아가 이제 막 일어나 나른한 에린의 옷을 갑아입혔다.

“에린 옷 갈아 입자.”

“…그냥 있으면 안 되요? 밥도 여기서 먹을 거잖아요.”

“안돼. 누군가가 들어올 수도 있잖아. 몸단장은 항상 깔끔하게 해둬야지.”

“…치.”

에린은 엘레노아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툴툴거렸지만, 엘레노아의 귀에는 당연히 들렸다.

마치 말 안 듣는 여동생을 돌보는 언니의 기분을 느낀 엘레노아는 그저 에린이 귀여울 뿐이었다.

“이리와. 머리 빗어줄게.”

“네에.”

엘레노아는 에린의 부스스했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어주며 단장을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아예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도 시키고 싶었겠지만, 이곳은 집이 아니라 베스타 신전의 본교였기 때문에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 ◆

“회의는 끝났을까.”

은현은 신전 본교를 홀로 걸으며 중얼거렸다.

평소였다면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와 그녀의 가족인 은현과 에린의 시중을 들기 위해 상시 대기해야 하는 견습 사제가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어수선한 에레니움의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관계로 아무도 대기하지 않았다.

엘레노아는 오히려 그런 대우가 부담스럽다면서 그 양해를 흔쾌히 수락했다.

식당을 향해 걷던 도중, 오랫동안 이어졌던 신전의 사제 회의가 끝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측으로 회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회의실 쪽에서 많은 고위, 상위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나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발견한 은현은 회의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회의실에서 나오는 이들 중 아니에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은현은 뿔뿔이 흩어지는 사제들의 사이를 지나치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성기사들이 은현의 모습을 발견하고 흘끗 쳐다보았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아니에스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이나, 엘레노아의 남편이라는 점을 비롯하여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은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신전 소속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아니에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보고 흥미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이윽고 은현은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에 앉아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니에스를 발견했다.

“…역시 그렇지?”

“그렇겠죠. 저희 쪽에서도 무언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니에스.”

“오. 일어났냐? 몸 상태는 좀 어때.”

“나쁘지 않아. 엘레노아와 에린도 괜찮고. 바로 푹 쉴 수 있도록 배려해줘서 고마워.”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것보다….”

회의가 끝났음에도 살짝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니에스의 안색을 살폈다.

마치 생각하기 귀찮은 골칫덩이 문제를 떠안았다는 표정이다.

“회의가 제대로 마무리된 게 아닌가 봐?”

“아니. 회의 자체는 잘 끝났어. 그냥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신경 쓰이는 일?”

“그게….”

“…잠시만요. 아니에스님.”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아니에스를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남자가 그녀를 제지했다.

약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사제복을 입고 있으며 굉장히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더는 말을 아끼고 고개를 살짝 가로젓는 그의 제스처를 이해한 아니에스가 남자 사제에게 말했다.

“얘는 괜찮아. 오히려 조언을 구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대지. 믿어도 좋아.”

“…아니에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남자 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현의 앞으로 다가왔고 아니에스의 친구인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사안이 사안이었던지라….”

“괜찮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였다는 거겠죠.”

은현은 남자 사제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그는 은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신전 본교 안에서 이단심문관장을 맡고 있는 다리안이라고 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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