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3화 〉 693. 신성과 타락(4)
* * *
무너지려는 건물 아래에서 지붕의 낙하로 직접 공격을 받으려는 찰나.
집 안에 있었던 민간인 가정의 사람들이 연신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는 괜찮습니다! 이곳은 위험하니 어서 피하세요!”
하지만 정작 감사의 인사를 받은 성기사는 다급히 소리치며 그들의 피난을 유도했다.
급박한 성기사의 소리를 들은 민간인들은 성기사들을 뒤로하고 다급히 피난했다.
딸아이인 어린 소녀가 아내와 함께 피난하는 아빠의 품에 꼭 안겨서 뒤의 성기사들을 꼭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언데드들을 막아내고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들은 소녀의 모습에는 영웅처럼 비쳐졌다.
마음속에 가득 채워진 어떤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소녀가 목청껏 소리쳤다.
“성기사님들! 힘내세요! 다치면 안 돼요!”
소녀의 목소리는 당연히 언데드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성기사의 귓가에도 들렸다.
“들었냐?”
“들었지.”
함께 옆을 나란히 서서 검을 휘두르던 성기사가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절대로 다치지 말라는데.”
“말이야 쉽지. 이 상황에서.”
하지만 불평을 토로하는 그 말과 달리, 성기사의 입꼬리는 이미 올라가 있었다.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시민에게, 그것도 저런 어린아이에게 응원을 받고 어떻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자연스레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다치면 10년 놀림감이다.”
“니나 잘해.”
이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어째서인지 웃음이 났다.
“그나저나….”
그들이 이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사령술사가 만들어낸 언데드가 들끓는 이 재앙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기사는 검을 휘둘러 언데드 하나를 처리하고는 물끄러미 어떤 방향 쪽을 응시했다.
“정말…. 대단하네.”
“…그렇지.”
성기사들이 응시하고 있는 방향에는 백은발을 흩날리는 검사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언데드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은색과 금색으로 빛나는 검신은 그 빛만을 발하고 있을 뿐 검의 궤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검속을 자랑하며, 성기사나 사제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데스나이트들을 구성하고 있는 사기(死?)의 갑옷을 간단하게 절단내버리는 절삭력까지.
속도와 힘, 밸런스가 갖춰진 기교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는 검술은 같은 검을 연마하는 자로서 경악하게 만들 정도의 극에 달한 달인의 경지다.
“사실 응원을 받아야 하는 건 저쪽 아니냐?”
“아니. 진짜로 그게 맞지.”
자신들 둘보다, 더 압도적인 전력의 차로 몇 배나 되는 언데드들을 처리하고 있는 백은발의 검사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겨우 이런 걸로 풀이 죽어서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하지 않는 것도 어리석은 일.
성기사들은 생각을 다시 잡으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한편 언데드들을 차례차례 베어 넘기고 있던 은현은 냉정하게 현 상황을 분석했다.
감지를 통하여 주변의 지형지물은 물론 적군과 아군의 숫자와 위치까지 모조리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차, 그의 감각에 들어온 무언가의 존재를 느꼈다.
‘신전의 본교로 향하는 길. 저 힘은….’
지금까지 느낀 어떤 언데드보다도 강한 사기(死?)를 가진 무언가가 신전 본교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강력한 사기(死?)를 지닌 개체는 총 다섯.
그 주위를 둘러싼 언데드의 무리.
그리고 다섯 개체의 가장 중심에서 호위를 받듯이 움직이고 있는 무언가.
‘찾았다.’
아마도 데스나이트와 언데드의 무리를 이끄는 이 재앙의 원흉.
사령술사일 것이라고, 은현은 확신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재앙의 원흉이나 다름이 없는 저 사령술사를 최우선으로 처리하는 것이 이 재앙을 막는 최선의 방법일테지만, 멀리서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신성을 품은 여성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에스?’
아니에스가 사령술사를 직접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역할은 비상 병력까지 모두 동원하여 출동시킨 탓에 경비가 허술해진 신전 본교를 수호하는 것.
이것은 신전의 사람들과 은현, 엘레노아가 사전에 회의를 통해서 정한 내용이었다.
비상 병력을 모두 소집하여 도시 전체의 언데드들을 정리하여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출동시키고, 아니에스를 신전 본교에 배치한 것은 은현이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니에스가 은현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움직였다.
“…흐음.”
원래 아니에스는 은현이 내린 지시에 의문이나 불만을 품을 수는 있어도 거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년 전에도, 수많은 격전 속에서 그가 내렸던 판단과 지시는 모두 효율적이고 올바른 판단이었으며 팀원들을 생존과 승리의 길로 이끌었다.
아니에스 또한 처음에는 신전 안에서 가장 강한 전력인 자신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냐고 주장했지만, 이처럼 넓은 도시 전체에 퍼진 언데드들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서는 강한 전력 혼자가 나서는 것보다, 다수의 전력이 곳곳으로 퍼지는 것이 인명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에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은현은 아니에스가 움직인 현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아니에스가 움직인 이유에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은현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이 상황에서 ‘자신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였다.
언데드의 정리를 끝내면서도 멈추지 않는 사고의 흐름으로 생각을 마친 은현은 곧바로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보조하고 있던 엘레노아에게 향했다.
“엘레노아.”
“네.”
“아니에스가 움직였어.”
“…아니에스님이요?”
엘레노아 또한 예정과 달리 아니에스가 움직여 신전 본교를 벗어났다는 이야기에 살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예정 변경이야. 우린 곧바로 신전 본교로 향할게.”
“알겠어요.”
엘레노아는 은현이 내린 결정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아니에스가 자리를 비운 지금, 신전의 경비는 분명 온전치 못한 상태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녀가 비운 자리를 자신이 대신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은현의 의도를 곧바로 눈치챘다.
“그럼 여러분. 모두 힘내주세요. 저는 이만 본교로 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성기사와 사제들의 태도를 느끼고 엘레노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은현의 품에 안긴 엘레노아는 애써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엘레노아를 안고 신전 본교를 향해 달려가던 도중, 은현은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왜 그래?”
“그냥…. 조금 어색해서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녀’라고 떠받들어주는 것이 어딘가 기쁘면서도 마음속이 근질거렸다.
지금까지 아니에스의 후임으로서 자신의 위치도 자각하고 있었고,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몸소 체험하는듯한 기분이 들어서 쑥스러웠다.
“진짜 ‘기적’을 보여줬으니까 당연하잖아.”
은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많은 사제와 성기사들이, 그리고 이 도시의 민간인들이 엘레노아가 일으킨 기적을 몸소 체험했다.
치명상에 가까웠던 데미지를 회복시키고, 언데드에게 공격받아 썩어 문드러지던 살점이 정화되어 복구됐다.
전신에 누적되어 쌓여있던 피로는 물에 씻겨나가듯 사라진 끝에 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드는 기적.
그 기적의 근원이 하늘 위에 떠오른 성녀 등에 돋아난 한 쌍의 새하얀 날개에서 떨어진 신성의 깃털이었다는 것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적을 직접 없애는 것에 모든 신성력을 동원하는 아니에스의 강신(??)도 사제로서 정점에 올라있는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특별한 기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수호하는 엘레노아의 강신(??)은 특히나 더 기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 기적을 일으킨 엘레노아를 떠받들고 추앙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더라도…. 구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아요.”
단 한 번의 기적으로 족히 수천 명의 인명을 구했음에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운 듯 보였다.
꽉 쥔 주먹과 동시에 슬픔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너 혼자서 짊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은현은 엘레노아를 위로했다.
그의 말대로 이 사건은 엘레노아 뿐만이 아니라, 은현도, 에린도, 그리고 신전 전체가 짊어져야 하는 문제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아무리 빠르게 나서서 사태를 진압했다고 한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는 재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죠.”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적인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당신은…. 이런 경험에 익숙해진 건가요?”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무뎌진 걸까.”
4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보았고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그 시간 속에서, 하계를 위협하는 재앙을 배제하라는 여신의 사명을 수행해왔고 이런 경험도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리아나님이 옳았네요.”
엘레노아가 웃으며 은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사실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니까 우리가 곁에서 잘 봐줘야 한다고 그랬거든요.”
“…일리아나가?”
“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은현도 곧바로 이해했다.
불멸의 삶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하다.
수명이 짧은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고 그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들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게 된다면 남는 것은 언제나 은현 쪽이었다.
그런 그를 평생 동안 지탱하고 함께하기 위해서, 일리아나는 스스로 여신의 눈에 들 정도로 드높은 위업을 달성하는 것에 도전했고, 그 결과 신목(??)이라고 불리는 세계수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금 은현의 영혼과 사도의 권속 계약을 맺은 일리아나는 은현이 죽지 않는 한 그와 영원한 불멸을 함께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 목적 안에는 자신의 행복을 쟁취하는 것과 동시에 남편인 은현을 외롭게 홀로 두지 않기 위해서라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정말로 나한텐 과분한 여자들이야.”
거기에는 엘레노아는 물론, 릴리와 에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솔직한 쓴웃음이 묻어나오는 은현의 얼굴을 본 엘레노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기뻐요.”
그리고 타이밍 좋게 위에서 다른 아내의 외침이 들려왔다.
“현아아아!”
“에린!”
어두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던 와중의 한창, 하늘 위에서 들려오는 에린의 목소리에 은현과 엘레노아가 달리기를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하여 두 사람에게로 달려온 에린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쉬지 않고 언데드들을 처리하던 도중, 근처에서 은현과 엘레노아의 냄새를 맡고 곧바로 달려온 것이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엘레노아님은요?”
보자마자 두 사람의 상태를 걱정하는 에린의 시선을 느끼고 두 사람은 작게 웃으며 아무런 이상도 없음을 설명했다.
“괜찮아. 에린은?”
“전 괜찮아요! 헤헤! 엘레노아님 덕분에 멀쩡하거든요!”
엘레노아가 일으킨 치천사의 날개로 몸의 컨디션을 한차례 회복시킨 덕인지, 에린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이내 얼굴을 굳힌 에린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것보다 그 사령술사 말인데….”
“알아. 아마도 이곳에 와있는 건 본체가 아니겠지.”
“…그게 가능해?”
“적어도 그 사령술사한테는 자신의 영혼 일부를 떼어내어 시체에 빙의시키는 걸로 분신처럼 조종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거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엘레노아도 동의했다.
애초에 처음 그 사령술사를 만났을 때, 그는 고룡의 사체를 아주 잠깐 몇초 동안 움직이는 것을 대가로 자신의 영혼이 소멸되는 리스크를 아무렇지 않게 짊어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방식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친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만약 그 사령술사에게 그 페널티의 부담을 줄일 수단이 존재한다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수준이 아니라,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으로 바뀌는 이점이 존재한다.
“…진짜 짜증나는 놈이었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마리우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비치는 것을 보고 엘레노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린? 그 사령술사랑 무슨 일 있었니?”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에린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묘하게 당황하는 에린의 태도가 수상쩍었기 때문에 은현과 엘레노아가 고개를 갸웃하였지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도 전에, 세 사람이 곧바로 이변을 눈치챘다.
“어?”
제일 먼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에린이었다.
이윽고 은현이, 그 다음으로 엘레노아가 같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기(死?)의 기운이…사라졌어?”
아니에스가 있는 방향 쪽에 있던 짙은 사기(死?)가 일제히 정화되어 사라지는 것을 느낀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것의 의미를 눈치챘다.
도시 전체를 위협했던 사령술사가 아니에스에 의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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