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9화 〉 689. 재앙 진압(3)
* * *
유치한 실랑이가 벌어지던 와중, 브류나크의 창대가 다시 반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인 은현에게로 복귀하기 전의 전조 현상임을 눈치챈 에린은 곧바로 브류나크를 불렀다.
“…브류나크.”
[왜. 또 뭐.]
“현이한테 전해줘. 그 사령술사. 내가 반으로 두 동강을 내기는 했는데…. 아마도 살아있는 것 같아.”
[…….]
단번에 진지해지는 이야기를 전해오자 브류나크도 에린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전해주지.]
브류나크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은현의 곁으로 복귀했다.
다시 혼자가 된 에린은 고꾸라져 있는 거대한 크기의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응시했다.
은현이 쓰러뜨려 주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건 이것은 인간이었던 망자의 혼에서 뽑아낸 사기(死?)로 만들어진 고위 언데드.
이대로 버려두었다가는 사기(死?)가 흘러나와 도시 전체를 좀먹게 될지도 모른다.
에린은 정화의 불꽃을 다시 사용하여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파손된 두개골에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두개골로 옮겨붙은 정화의 불꽃은 이내 상반신 전체로 퍼지어서, 짙은 사기(死?)를 모조리 불태워 정화해나갔다.
“으…. 조금만 쉬자….”
긴장이 탁 풀어진 에린은 그대로 구석진 곳의 벽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갑자기 마리우스가 했던 고백이 머릿속에 떠올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령술사의 애정이 어린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소름이 끼치고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하아, 빨리 현이한테 열심히 했다고 칭찬받고 싶다….”
빨리 이 사태가 끝나고 침대에서 뒹굴며 남편의 냄새를 가득 맡고 싶었던 에린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은현은 강신(??)을 마치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엘레노아의 몸을 받아내며 지면에 착지했다.
“괜찮아?”
“물론이죠.”
엘레노아는 웃으며 은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신(??)의 반동으로 인해 머릿속에 전해지는 두통이 장난이 아니다.
“힘들면 무리 안 해도 돼.”
“아니요. 괜찮아요. 그리고…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어요.”
도중에 다시 한번 강신(??)을 사용할 여력도 남겨두었다.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둔 엘레노아에게는 아직 신성력이 많이 남아있었다.
“…알았어.”
은현은 구태여 그녀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에레니움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언데드 습격사태에 대하여 사람들을 구하고 신전을 지키려는 그녀의 사명감 때문이다.
이윽고 은현이 투창으로 내던졌던 브류나크가 부름에 응하여 다시 은현의 손으로 복귀했다.
[야. 네 여우 기집애가 할 말이 있다는데.]
“…너희 또 싸웠냐?”
은현은 심드렁한 브류나크의 말투 속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아, 됐고. 그것보다 걔. 사령술사 죽였데.]
“그런데?”
[죽였는데, 죽인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더라네.]
“…….”
은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기사와 사제들이 고군분투하며 언데드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에린이 전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정말로 죽은 걸까요?”
은현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던 엘레노아가 물었다.
“아마도 아니겠지.”
확실히 사령술사가 죽었다면, 그가 소환한 이 대규모의 언데드들도 사라져야 마땅할 텐데, 언데드들은 아직도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활개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사령술사는 모종의 방법으로 에린에게서 도망쳐 이 도시 안에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뭐가 목적일까?’
이 도시 전체를 괴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강력한 최고전력을 한 장소에 밀집시켜 몰아붙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알맞았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방위결계가 해제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신전 측의 뒤늦은 대응과 언데드의 무리라는 시너지로 밀어붙였다면, 적어도 도시 안의 구획 하나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터.
하지만 사령술사는 자신의 언데드들을 한점에 모아 공격해오지 않고, 도시 전체 곳곳에 언데드들을 광범위하게 출몰시켰다.
대량의 시체를 조달하기 위함일 수도 있었겠지만, 신경 쓰이는 점은 언데드를 처리하기 위해서 신전의 병령들이 일제히 도시 곳곳으로 출동했다는 점이다.
신전을 지키는 경비 병력은 물론 비상 병력까지 모조리 동원시킨 현재 신전은 경비가 가장 허술한 상태.
“…놈의 목적은 베스타 신전 본교인가?”
“그런….”
은현이 머릿속으로 도달한 추측을 들은 엘레노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하기에는 너무도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는 언데드의 처리에 집중하자.”
하지만 은현은 신전을 지원하는 것보다, 성기사와 사제들을 도와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언데드들을 정리하는데 집중하자는 판단을 내렸다.
“네.”
엘레노아도 은현의 그 결정에 전혀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지금 신전에는 아니에스님이 계시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인명피해를 최우선으로 줄이자는 현실적인 판단과 홀로 신전 본교를 지키고 있을 아니에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그녀를 망설이지 않게 한다.
“그럼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쫓아올 수 있겠어?”
은현의 우려에 엘레노아는 웃으며 답했다.
“전 당신의 아내에요. 당연하잖아요.”
그 대답에는 자신감이 차있어서, 피식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그래.”
이윽고 전방에서 성기사들과 교전을 하고 있는 언데드들을 응시하며 은현은 자신의 영혼 일부를 소환했다.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검은 본래 적색과 청색의 빛을 발하던 검이었으나, 자신과 베르단디의 신력을 받아들여 새롭게 탄생한 신검(??).
영롱한 금색과 은색 빛을 발하는 두 자루의 쌍검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부르르 떨었다.
“얘들아. 잘 부탁할게.”
[응! 아빠!]
[네.]
베르단디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들은 힘차게 주인이자 부모인 은현의 요청에 응했다.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양손에 힘을 실은 은현의 두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은현 고유능력]
[시간 가속]
[사고 가속]
신체의 능력을 가속시켜 극대화시키고, 전방위에 마력을 흩뿌려 지형지물과 언데드의 위치를 파악한다.
머릿속으로 수집되는 막대한 정보의 양은 자칫 잘못하면 과부하를 일으켜 뇌를 불태워버릴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양.
하지만 사고 능력 또한 향상된 탓인지 그 막대한 정보를 큰 무리없이 차례차례 정리해나갔다.
언데드와 신전 병력의 위치.
가장 효율적인 최적의 루트의 계산.
우선 순위와 효율을 차례대로 정리해나가기까지 도달한 사고의 영역은 통상 일반인의 몇십배나 되는 수준.
생각을 마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여신이시어. 저의 반려를 수호할 가호를 내려주시옵소서.]
[베스타의 축복]
[헤이스트]
[디바인 프로텍트]
거기에 막대한 신성력이 깃든 축복은 엘레노아가 기도한 끝에 발현된 단 한사람만을 위한 축복이다.
“잘 따라와.”
“네!”
전신을 가득 채우는 신성한 기운을 느낀 은현은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큭…!”
언데드의 무리를 차례차례 베어넘기며 있던 성기사가 작게 신음했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다.
팔을 베고 복부를 찌르며 목을 베어넘겨도, 망자(?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자(?子)를 공격해온다.
싸움을 이어나가면 나갈수록, 피가 말리고 가지고 있던 기력이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성기사가 끝이 없는 언데드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찰나, 순간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윽!?”
아주 잠깐동안 보인 빈틈이 치명적인 실수로 다가와 언데드의 무리가 일제히 성기사를 덮쳤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참선]
성기사를 향해 뻗은 언데드의 팔을 시작으로, 얼굴을 비롯한 언데드들의 몸통이 모조리 썰려나갔다.
“어…?”
바람을 가르며 언데드들의 목에 그어지는 실선들을 뒤늦게 눈치챈 성기사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압도적인 숫자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는 언데드들의 몸통이 나무에서 과일이 떨어지듯 투둑하고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성기사는 자신의 눈앞에서 단 한순간에 수십의 언데드가 도륙나는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자각하지 못했다.
다리를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던 치명적인 실수로 빈틈을 내보였던 성기사는 아까까지 죽음을 가까이 경험했던 자신의 경험을 망각하고 멍하니 시선을 위로 올려다 보았다.
“당신들은….”
이내 갑작스레 전장에 난입한 은현을 보며 성기사가 중얼거렸다.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의 얼굴은 이미 성기사와 사제들 사이에서도 유명하게 퍼진 상태.
그렇다면 금색과 은색으로 밝게 빛나는 특별한 두 자루의 검을 쥐고 있는 백은발의 남자가, 엘레노아의 남편이라는 것도 눈치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기사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성기사의 말을 들은 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금월의 칼날로 언데드들을 향해 가리켰다.
이윽고 곧바로 사라지는 은현의 모습이 금월로 가리키던 언데드들이 있는 곳에서 나타났다.
“이럴 수가….”
적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가속하여 달려나가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에 성기사가 경악했다.
폭발적인 속도도 속도지만, 성기사를 경악스럽게 만드는 것은 은현이 펼치고 있는 검술이다.
언데드의 몸통을 깔끔하게 갈라버리는 단 한번의 검격.
그리고 그 검격의 연속이 쌓이고 쌓여 무수한 언데드들의 시체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광경은 도저히 자신은 따라잡지 못할 아득한 경지에 위치한 검사의 영웅담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괜찮으신가요?”
성기사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채로 넋을 놓고 언데드들을 도륙하고 있는 은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성기사의 정신을 일깨웠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자, 성기사는 자신에게 말을 건 여성을 발견했다.
은현을 보조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온 엘레노아였다.
“에, 엘레노아님!?”
멀찍이서 얼굴만 본적이 있지만, 단 한번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던 차기 성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다니, 멍했던 성기사의 정신이 번뜩였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장비와 상태를 점검하는 성기사를 보고, 엘레노아는 작게 미소지었다.
“심각한 외상은 없으신 것 같네요.”
엘레노아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성기사의 가슴팍으로 스며들어갔다.
[베스타의 축복]
[큐어]
피로로 쌓여 전반적으로 노곤했던 몸상태가 말끔하게 낫는 기적을 경험한 성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이게…. 성녀의 축복.’
다른 사제들과는 그 신성력이나, 그로부터 발현되는 기도도 차원이 다른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다른 곳에 지원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엘레노아의 축복으로 컨디션이 말끔히 회복된 성기사는 곧바로 다른 곳에 지원을 가기 위해 달려나갔다.
‘나도…저렇게 될 수 있을까.’
도시 안을 뛰어다니는 성기사의 머릿속에는 아까 전에 보여주었던 은현의 검격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본 검격들이었지만, 그 위력은 물론이고 빠르고 정교한 검술의 기교가 성기사의 마음 속에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 ◆ ◆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사기(死?)를 이용한 빙의를 푼 마리우스는 작게 안도와 비슷한 숨을 흘리며 실실 웃었다.
갑작스러운 신성의 기적과 함께 어딘가에서 날아온 장거리 공격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경험은 정말이지 오싹하다는 표현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큭큭.”
자신의 어깨를 만지니 어깨부터 허리부근까지 사선으로 갈랐던 에린의 검격이 그 통증과 함께 생생히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황급히 시체에 빙의시키고 있었던, 사기(死?)로 구성되어 있던 자신의 영혼을 이탈시키지 않았다면, 자신의 영혼은 그 시체와 함께 에린의 불꽃에 의해 정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껏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였다.
정말로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공포를 안겨준 그 여자를 머릿속에 떠올리니,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를 않는다.
“이것이 사랑….”
처음 자각한 그 감정을 느끼며 마리우스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정말 곤란하군.”
마리우스는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사라지지 않는 에린을 생각하며 웃었다.
정의감에서 비롯된 분노와 적개심 가득했는 그 아름다운 눈빛.
죽음이 가득한 그 공간 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던 남청색의 머리카락.
레이피어를 휘두르던 고고하고 아름다운 자태.
하나부터 열까지 에린이라는 존재 자체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진다.
자신이 이렇게 욕망이 강한 인간인줄을 처음 자각하고 곤란한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여신인 메디아를 이 세상에 소환한다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신이 내려준 자신의 사명감을 내팽겨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지금 마리우스의 머릿속에는 에린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가지고 싶다…. 죽이고 싶다….”
그녀의 영혼을 평생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
마리우스는 행복한 생각을 품으며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