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7화 〉 687. 재앙 진압(1)
* * *
사태를 파악하고 에레니움 전체에 퍼진 언데드들을 처리하기 위해, 신전의 모든 인력이 일제히 출동한 신전의 내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몹시 고요했다.
“그럼 우린 간다.”
“묘하게 서두르네?”
“나 이제 애 아빠야. 빨리 처리하고 아기 보러 가야 해.”
원래의 계획은 엘레노아의 세례식이 끝난다면 게이트를 설치하여 곧바로 집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일리아나는 괜찮다고 했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가는 또 엄청 서운해할 것이 틀림없다.
부부가 되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함께 해왔기 때문인지 그녀의 심리를 어느 정도 꿰뚫고 있는 은현의 머릿속에 또 얼마나 쥐어짜일지 자신의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이 갔다.
“…아 그러냐.”
아니에스는 현실적이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유를 듣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 앞에서 짜증이 나는 염장질을 하는 것인지 심기가 몹시 불편했지만, 그럭저럭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친구의 모습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뭐 저 녀석하고 함께 있으니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히 다녀와.”
“네.”
선임의 걱정이 제법 기뻤는지, 엘레노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과 엘레노아가 신전을 나가고, 두 사람을 배웅한 아니에스는 다시 본교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에스님….”
“왜.”
“정말 저 두 분만 보내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우려가 섞인 목소리로 아니에스에게 질문한 것은 알베른이었다.
“지금 신전에 그럴 여력이 없잖아.”
현재 에레니움에 일어난 초유의 비상사태에 대하여, 베스타 신전은 신전을 지키는 방위병력을 포함한 비상 인원 전체가 현재 언데드들을 막기 위해 출동한 상태다.
때문에 현재 신전 본교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직 구조와 전투를 포함한 외부 활동에 미숙한 견습사제들과 아니에스 뿐이었다.
미숙한 견습사제나 견습성기사들을 제외하면 현재 신전을 지킬 수 있는 병력은 아니에스 혼자뿐.
어찌보면 굉장히 무모한 병력의 배치 구성이었지만, 현재 아니에스가 신전 본교 전체에 펼친 결계는 웬만한 공격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 철벽의 요새다.
이처럼 도시 전체에 다수의 적이 출현한 상황에서는 아니에스라는 단독 전력이 움직이는 것보다 똑같이 다수의 전력이 곳곳으로 출동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데에는 알맞은 판단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인에 불과했던 은현의 제안이었지만, 그 효율적인 판단에 신전의 사람들은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하지만…. 엘레노아님은….”
알베른의 우려는 아무런 호위도 받지 못하는 엘레노아의 걱정이었다.
엘레노아는 아니에스의 뒤를 잇는 차기 성녀로서 앞으로의 베스타 신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짊어질 예정인 사람이다.
그런 그를 성기사나 사제들의 호위도 없이 전투에 투입시킨 것은 우책이 아니었을까.
“흥. 넌 눈깔이 삐였냐? 내가 언제 엘레노아를 혼자 보냈어? 옆에 은현이 같이 있었잖아.”
알베른의 우려를 들은 아니에스는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실제로 그녀는 엘레노아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엘레노아님의 남편분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분이 대단하세요?”
알베른은 은현에 대해서 모른다.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에서는 이미 그의 존재와 가치를 입증하였지만, 먼 거리에 위치한 에레니아 신성국에까지 은현의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가 어떠한 평민과 결혼을 했다는 소식만 접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때문에 알베른은 은현의 전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놈. 나보다 강해.”
“네…?”
“너. 20년 전에 나랑 같이 제국 황제를 죽였던 팀원들. 알지?”
“네. 당연하죠.”
20년 전, 악마들을 하계로 소환하는 문을 만들기 위해 세계를 피바람으로 물들였던 제국과의 전쟁을 끝낸 여섯 영웅들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에레니아 신성국 뿐만이 아니라, 이 대륙 전체가 그 여섯 명의 영웅들을 칭송하고,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퍼뜨릴 정도다.
아니에스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리오드보다 강하지.”
“저, 정말인가요?”
알베른은 당황했다.
아니에스가 말하는 리오드라면, 페르니아스 왕국의 아르티아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
그리고 대륙의 현 시점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기사라는 명예를 쥐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대륙 전체가 인정하는, 명실상부 최강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는 강자.
그런 리오드보다 강한 남자라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어째서 지금까지 그런 남자가 눈에 띄지 않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놈 원래 20년 전에 죽었거든. 그래서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고 조용했어.”
“……?”
“근데 작년 쯤인가. 갑자기 무덤에서 기어 나왔다나. 지금은 아내도 넷이나 되고 아주 꽁냥꽁냥 잘 살고 있던데.”
“…….”
알베른은 살짝 짜증이 묻어나오는 아니에스의 중얼거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살아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아니에스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엘레노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저 녀석이 붙어 있는 이상 엘레노아한테는 털끝 하나 못 건드려.”
오히려 은현은 엘레노아가 가진 신성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줄 것이다.
“걔들 걱정보다도 너는 너 할 일이나 잘해.”
“…알겠습니다.”
확신에 차있는 아니에스의 말을 들은 알베른은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 ◆
은현이 엘레노아를 데리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에레니움 안에서 가장 높은 높이를 자랑하는 시계탑의 꼭대기였다.
탁 트인 시야로 확인한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굉음.
성기사들과 사제들, 모험가들이 고군분투하는 전투의 소음이 도시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건….”
시계탑 꼭대기 위에서 엘레노아의 시야에 보인 것은 짙은 사기(死?)로 응집된 거대한 무언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그것을 보고 엘레노아는 얼굴을 굳혔다.
저토록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언데드는 지금까지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팔을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도시를 지키는 성벽따위는 간단하게 짓뭉갤 수 있을 만한 덩치.
그리고 그 스켈레톤을 구성하고 있는 짙은 사기(死?)는 지금까지 몇만 명의 목숨을 희생한 끝에 만들어낸 재앙의 산물이라는 것을 여실히 나타냈다.
“…자이언트 스켈레톤.”
은현은 성벽을 가볍게 넘어서는 높이의 거대한 스켈레톤 상반신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걸…알고 있나요?”
“알지. 싸워본 적도 있었고.”
메디아가 사용하는 사령술 중에는 저런 고위의 언데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소환하는 재앙들이 가득했다.
“…있는 건가. 그 사령술사가.”
이런 재앙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은 은현이 알고 있는 한 메디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에 한차례 맞닥뜨렸던 사령술사, 메디아의 사령술을 이어받고 그녀를 여신이라고 떠받드는 마리우스가 이 도시를 공격한 장본인이라는 뜻을 의미했다.
“…….”
은현의 추측을 들은 엘레노아가 자연스레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과 분노로 뒤섞인 얼굴로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하면 저 거대한 재앙을 쓰러뜨릴 수 있는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니야.”
“저게…완전체가 아닌가요?”
“하체가 없고, 상체만 있잖아. 아직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완전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까지는 가지 못했다는 거지.”
사령술로 소환한 개체의 완성도는 소환자가 사용하는 사령술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마리우스가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상체만을 소환했다는 것은 그가 아직 메디아의 사령술을 완벽하게 이어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메디아는 순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저런 것들을 완전히 소환했어.”
하지만 마리우스가 소환했을 것으로 추측한 저 자이언트 스켈레톤은 다르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망자들의 영혼에서 추출한 에너지, 사기(死?)를 기반으로 소환했다.
본인의 능력이 아직 미숙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끌어온 힘을 이용하여 소환했기 때문에, 소환된 자이언트 스켈레톤 또한 완전한 형태가 아닌 상반신만이 구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메디아라는 여자는….”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간신히 소환할 수 있는 고위의 언데드를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사령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지.”
애초에 자신의 영혼 속에서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리고 스스로 초월자가 된 마녀다.
그녀에게 고위 언데드를 소환하는 정도로는 아무런 리스크도 되지 않는다.
“…….”
엘레노아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응시하고 있는 은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는 과거부터 어떤 싸움을 해왔던 것일까.
반신(半?)이 아닌, 불로장수에 가까운 특성만을 가진 평범한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저런 재앙들과 대적해오면서 살아남아 왔던 남자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하고 고통스러웠을까.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이 도시 하나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은현은 더한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인지 이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아냈다.
“엘레노아. 시작해.”
그녀를 가뿐하게 안고 빠른 속도로 시계탑의 꼭대기까지 올라온 은현은 사전에 미리 정해두었던 대로 엘레노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
고개를 끄덕인 엘레노아가 마침내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자신의 여신인 베스타에게 기도를 올렸다.
[나의 신앙으로, 나의 믿음으로, 나의 여신께 감히 간청드립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으로부터, 당신을 믿고 섬기는 어린 양들을 지킬 수 있는 축복을.]
한 치의 사심도 없이, 경건하고 순수한 자신의 염원을 담아 기도를 읊어 나간다.
[나의 여신께 간청합니다.]
[베스타의 축복]
[강신(??)]
은현의 품을 벗어나 허공으로 몸을 던진 엘레노아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부유했다.
경건한 마음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신성력은 여신에게 올린 기도에 반응하여 점점 더 형태를 갖춰나갔다.
새하얀 깃털을 아래로 흩뿌리는 거대한 날개가 엘레노아의 등에서 뻗어나와 펄럭이면서 그녀의 몸을 공중에 부유할 수 있도록 지탱한다.
[엘레노아 강신(??)]
[치천사 세라핌]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라는 염원으로 생겨난 그녀의 강신(??)은 천사를 연상시키는 성스러움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그녀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깃털 하나하나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도시 전체에 떨어지는 새하얀 깃털에 닿은 모든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누적된 데미지와 피로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천적이나 다름이 없는 언데드들의 사기(死?)를 정화하여 약화시킨다.
목숨을 걸고 언데드들과 맞서는 모험가나 성기사, 사제들에게는 여신의 힘으로 행사하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중심에서, 은현은 자신의 애창인 파트너를 소환했다.
“브류나크.”
[오냐.]
시계탑의 최정상 꼭대기에서 거대한 스켈레톤의 상반신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10km가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은현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했다.
[신화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
[소환, 궁니르]
은현은 브류나크와 함께 또 한 자루의 창을 소환했다.
은현이 소환한 무기들은 본래 과거의 역사나 신화 속에 실존했던 무기들을 현재로 가져와 소환하는 것.
하지만 그것들을 구성하는 힘의 원천은 은현의 신력이다.
즉 형태를 가지고 있는 그릇에 신력이라는 물이 가득 들어 차 있는 상태.
은현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궁니르의 그릇을 없애면서 그 특성을 유지시켰다.
그리고 그 특성을 브류나크의 창대 안에 주입시킨다.
궁니르의 특성은 두 눈으로 인식한 표적을, 그 거리와 상관없이 반드시 명중시킨다.
평범한 무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기적인 보정.
그 보정을 이어받는 브류나크의 강화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은현은 파트너의 상태를 물었다.
“어때?”
[흐, 흐음. 괜찮네.]
사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보다 더욱 존재감이 짙어진 자신의 상태를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브류나크는 애써 당황한 티를 숨겼다.
“그럼 간다.”
[오냐.]
엘레노아의 강신으로 만들어진 세라핌의 깃털 효과로 컨디션이 최고조로 상승한 은현은 성벽과 지면을 부수기 위해 위로 높게 들어 올려진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팔을 정확히 조준하고 브류나크를 던졌다.
[브류나크 창술]
[껍질 꿰뚫기]
퍼엉!
공기가 터져나가는 듯한 굉음을 만들어내며, 투창은 10km가 넘도록 거리가 떨어진 자이언트 스켈레톤의 팔을 관통하여 터뜨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