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3화 〉 683. 재앙 서막(4)
* * *
은현과 엘레노아가 전속력으로 달려온 베스타 신전 본교는 평소답지 않게 어수선한 분위기로 가득하여 몹시 분주했다.
“서둘러! 어서!”
사제들이나 성기사들 모두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광경에는 질서와 규율을 중시하는 신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의 상황이 그만큼이나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많은 이들이 각자의 역할로 신전 안을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때, 한 사제가 입구 쪽에 도착한 은현과 엘레노아를 발견하고 맞이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긴급사태입니다. 방문은 나중에….”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사제는 엘레노아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상위 사제인 엘레노아 아르미타스입니다. 현재 도시 안에 벌어진 이상 사태를 파악하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아니에스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자 사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차기 성녀님이신 줄도 모르고…!”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앳된 인상이 남아있는 사제는 엘레노아의 본교 방문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그 얼굴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불경을 저질렀다는 자각이 있는지, 젊은 사제는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라도 할 기세였다.
“일어나주세요. 지금은 이럴 상황이 아니시잖아요.”
엘레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젊은 사제를 용서했다.
“그, 그렇지요….”
젊은 사제가 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아직도 엘레노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하여 죄송함과 민망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역할만큼은 잊지 않고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은현과 엘레노아를 안내했다.
이윽고 신전 본교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회의실로 두 사람을 안내한 사제가 방문을 열었다.
“대주교님. 차기 성녀님. 엘레노아 아르미타스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방안을 손짓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제의 말에 따라, 은현과 엘레노아는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은현은 곧바로 아니에스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물었지만, 그녀를 포함한 다른 사제들은 일제히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수십 년 동안, 아니, 결계석을 이용한 신성의 방위 결계를 도입한 이래로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던 결계가 허무하게 깨져버린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말이 깨져버렸다는 것이지, 사실은 해제되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에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누군가, 즉 신전의 내부 관계자가 의도적으로 에레니움을 수호하는 방위 결계를 해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자로서, 에레니움을 방위 결계를 스스로 해제했다는 것은 에레니움에 있는 시민들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것만으로도 중죄에 해당한다.
“…갑작스럽게 결계가 이상 현상을 일으키면서 깨져버린 건 알고 있지?”
“바로 느꼈지. 그리고….”
“맞아. 짙은 사기(死?)까지 올라왔어.”
은현도 그것을 느끼고 곧바로 에린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이 회의실 밖에서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분주하게 신전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리라.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모든 신전들의 중심인 본교가 있는 곳에, 너무도 당당히 언데드가 쳐들어 왔다.
이것은 베스타 신전에서는 방위 결계가 해제된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치욕스러운 사건 그 자체다.
아니에스를 비롯한 다른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임을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도시 곳곳에서 언데드들이 일어나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니, 신전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듯 분주히 움직였다.
“일단은 내 쪽에서도 에린이 계속해서 움직여주고 있어.”
“…신경써줘서 고마워.”
지금의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뚱한 표정을 짓는 것과는 달리, 은현에게 전한 감사는 진심이었다.
현재 결계가 깨져버리고 언데드들이 도시 내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다급하게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출동시킨다고 하더라도, 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한 곳이 아닌 곳곳에서 출몰하는 언데드들을 모조리 커버하기에 에레니움이라는 도시의 규모는 커도 너무 컸다.
에린이라면 은현이 직접 키워낸 제자로, 웬만한 베테랑 성기사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만큼 지금 상황에서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녀가 먼저 현장을 뛰어다닌다고 하더라도, 모든 언데드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100명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 사건을 50명으로 줄여주기만 하더라도 굉장히 고마운 일이었다.
“대주교님! 깨져버린 결계석 쪽의 초소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던 병사가 신전으로 복귀했습니다!”
드디어 아니에스와 다른 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찾아왔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네!”
소식을 가져온 사제는 곧바로 병사를 회의실 안으로 데려왔다.
아니에스가 곧바로 다른 사제들에게 눈짓을 하여 은현과 엘레노아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엘레노아는 이 회의실에 합석할 자격이 충분했지만, 그녀의 남편이라고 하더라도 외부인에 불과했던 은현까지 본교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신원을 현 성녀인 아니에스와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가 보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외부에서 활약하여 시민들과 병사의 구조를 최우선으로 하여 뛰어다니고 있는 에린 또한 은현의 아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의 합석은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듣게 된 사정은 이러했다.
그는 결계석을 지키는 초소에서 경계근무 임무를 수행하던 병사였다.
여느때와 같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평화로운 근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늦은 새벽 시간에 결계석의 관리 임무를 맡고 있던 상위 사제가 초소를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신전 본교에서 결계석들을 긴급 점검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아 급하게 결계석에 이상이 없는지 미리 사전 점검을 위해 찾아왔다고 사정을 설명했고, 병사는 결계석을 관리하는 상위 사제가 결계석을 점검하겠다는데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이라면 그 긴급 점검의 통보였다.
“긴급 점검이라니…저희는 그런 걸 통보한 적이 없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몇몇 사제들이 당황하며 말했다.
그 긴급 점검의 일정이나 명령도 신전 본교의 상층부에서 내리는 오더.
하지만 정작 본교의 상층부는 그런 일정을 통보한 적이 없었다.
“하, 하지만 저희는 그것이 사실인줄로만….”
아마도 결계석을 조작하기 위해서 상위 사제가 내뱉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을 테지만, 초소 경계 근무를 하는 병사들로서는 감히 상위 사제의 말을 의심하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으리라.
“알아. 계속 얘기해봐.”
아니에스는 일단 병사에게 보고를 계속 진행시켰다.
“그래서….”
아무런 경계없이 상위 사제가 결계석을 조작할 수 있도록 안내를 했고, 상위 사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결계를 해제할 수 있었다.
“…그 상위 사제는?”
“그 사제님은….”
사제는 사죄하며 스스로 단검으로 목을 찔러넣어 자결했다.
자결하기 전까지 몇 번이고 사죄의 말을 반복했던 상위 사제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병사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밖의 바닥에서 검은 기운들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점점 형체를 갖춰 나타난 검은 기사가 무시무시한 각력으로 도약하여 도시의 성벽에 도달했다.
“검은 기사?”
“네, 네! 검은색의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였습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아주 기분 나쁜 검은색 마력이 흘러넘쳐 나오고 있었어요! 그건, 그건 마치….”
인간이 아니었다.
“…데스나이트.”
그 정체를 곧바로 파악한 아니에스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언데드 중에서 상위계에 속하는 데스나이트의 등장은 이번 사태가 가면 갈수록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주었다.
자신과 함께 근무하고 있던 선임 병사가 검은 기사의 칼날에 목을 꿰뚫려 죽은 것이 한순간, 겁에 질린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여성 모험가가 자신을 구했다고 병사는 말했다.
레이피어를 들고 데스나이트의 목을 관통하여 터뜨려버리는 강력한 일격을 선보인 여성 모험가는 백은의 아홉 꼬리가 달린 매혹적인 여성.
그녀의 도움으로 인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병사는 황급히 신전 본교를 향해 달려왔고 지금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들을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
모든 보고를 들은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고민했고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모든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비상소집하겠습니다.”
“알았어.”
아니에스는 고위 사제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은현과 엘레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너희한테 도움을 받은 것 같네.”
자초지종을 횡설수설하여 보고한 병사를 구한 것이 에린이라는 것을 깨닫고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먼저 에린을 보내둔 은현의 판단은 신전 본교가 사태를 파악하는데 아주 큰 도움을 만들어냈다.
“도와줄까?”
“…그래 줄 수 있냐?”
사양하지 않고 서슴없이 은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아니에스를 보고 회의실 안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 아니에스님!”
“이건 신전이 해결해야하는 문제입니다.”
현재의 사태가 결계석으로 도시를 수호한 이래 단 한번도 없었던 초유의 사태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의 문제.
비록 은현이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의 남편이라고 하더라도, 차마 꺼려지는 문제였다.
외부인의 도움을 빌리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면목이 서지 않는다.
한마디로 유치한 자존심의 문제였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신전의 체면을 위해서, 이 도시의 시민들의 목숨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냐?”
“…….”
“우리가 지켜야하는 건 신전의 자존심과 체면 같은 게 아니야. 시민들의 목숨이지.”
정치적으로 챙겨야할 체면과 이익 따위는 둘째치고, 아니에스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전이 수호하고 보살펴야하는 생명들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한명이라도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사실.
“의뢰라는 형태로 도움을 요청하는 건 불가능할까요?”
회의실의 상위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의견을 제시한 것은 조심스레 손을 들은 알베른이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아 나이 어린 견습 사제는 본래 이 회의에 참석할 권한 같은 것은 없었지만, 대외적으로 아니에스의 시종 역할로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알베른에게로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몰려들었지만, 알베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지금 쯤 사태를 눈치챈 모험가들도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에요.”
성문을 뚫고 도시 안으로 침입해온 언데드들은 생기(??)에 이끌로 상대를 불문하고 공격하는 망자(?子)들.
평범한 시민들은 물론 모험가들 또한 이 망자들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들 또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우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발벗고 뛰어다녀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에린도 싸우는 것을 택했으니 후자 쪽에 가깝다.
“흐음. 그래서?”
본래라면 견습 사제의 발언 따위 이 상황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대주교인 아니에스가 관심을 가지며 물으니 아무도 반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어떤 의견을 내놓는지 조용히 답변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일단 당장 모험가 길드에 의뢰해서 사제님들이나 성기사님들과 함께 모험가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력이었다.
이 거대한 도시의 방방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언데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도시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인력을 투입하고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이곳에 모험가들이 연합을 해준다면 시민들을 지키는 것은 더더욱 수월해진다.
이렇게 하면 모험가인 에린을 비롯하여 은현에게도 도움을 구하는 것에 자연스럽게 명분도 생긴다.
“괜찮네. 당장 모험가 길드에 사제를 보내서 협조 요청해.”
“알겠습니다!”
결정 사항을 들은 사제 하나가 곧바로 회의실을 나갔다.
“그럼 부탁 좀 하자. 보수는….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냐?”
“그건 나중에 생각해볼게. 그럼….”
은현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