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1화 〉 681. 재앙 서막(2)
* * *
교황과의 대면을 마치고, 은현은 왔던 비밀통로를 다시 걸어가며 신전의 초입 부근에 복귀했다.
“오셨군요.”
비밀통로의 입구에서 은현을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는 알베른이었다.
“엘레노아님과 에린님은 먼저 머무르게 되실 방으로 안내해드렸습니다. 은현님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은현은 발걸음을 옮기는 알베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은 교황이 해주었던 예언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여 복잡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을 예언했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만약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행동과 겪었던 사건 사고들이 모두 예정되어 있던 것들이라면….’
자신은 도대체 뭘 해왔던 걸까.
그런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많은 인연들도 자신을 떠나버리게 된다는 것도 이미 예정이 되어 있었다는 뜻.
허무함과 회의감으로 은현의 마음은 복잡해져 갔다.
이전부터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그것의 존재를 점점 더 확실하게 실감하고 나니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무언가가 또 자신에게 불합리한 운명을 강요하게 된다면, 자신은 그것을 거부하고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가 있을까.
[아이야….]
베르단디가 알베른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은현을 꼭 끌어안으며 그를 위로했다.
[아이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예언에 관한 이야기는….]
솔직히 말하면 베르단디에게도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은현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현의 부활에 관한 것도 예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온 자신의 행동조차도 이미 그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신인 자신조차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가 은현에게 어떠한 역할과 운명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정체을 알아챌 수도, 운명을 강제로 부여하는 그 정체불명의 무언가에게 저항할 수단도 없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미안하구나….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이상하게 의기소침해진 베르단디의 목소리를 들은 은현은 빠르게 상념에서 깨어나 베르단디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베르단디. 앞으로라도…. 함께 생각해보죠.’
은현은 일단 자신의 고민을 뒤로 밀어두고 자신을 위로하려다가 의기소침해지는 베르단디를 역으로 위로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만 했다.
신계에서 베르단디가 만들어낸 가상 세계에서 2년 정도 함께 부부로 생활해본 결과, 베르단디는 정말로 의기소침해지기가 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은현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무엇이든 해보려는 의욕은 엄청 앞서지만, 인간의 몸에 익숙하지도 않고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좌절될 때 급격히 풀이 죽는다.
인간 부부로서 함께 생활하면서 베르단디에 대하여 더욱 많은 것을 알게 된 은현은 여신의 심리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은현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우르드님과 스쿨드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아, 스쿨드와 언니는….]
은현이 하계로 복귀하게 되고, 베르단디는 은현과 자신의 신력이 뒤섞이면서 탄생한 새로운 반신(半?) 둘을 자신의 자매 여신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금월과 은월은 은현의 영혼 일부와 동화되어 무기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베르단디와 은현의 신력을 품게 되면서 반신(半?)의 격을 가지게 된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다.
베르단디가 평범한 인간들처럼 배 아파 낳은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금월과 은월은 명백히 베르단디와 은현 사이에서 생겨난 딸들이 맞았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자각하고 있기 때문인지 금월과 은월도 은현과 베르단디를 부모로 인식하고 따르고 있으니, 이것은 노른의 세 자매 여신 사이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긴급 사태와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반응은 각기 달랐다. 스쿨드는…. 두 아이들을 보고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지.]
스쿨드는 자신들의 신력 일부를 이어받은 새로운 신이 태어났다는 것에 흥미를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 만큼, 이것 또한 새로운 미래로 이어질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첫단계일지도 모른다면서.
하지만 반응이 각기 달랐다는 것은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스쿨드와 달리, 우르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니한테는…. 잔뜩 혼났지. 어떻게 아이를 만들 수가 있냐고…. 미친 게 아니냐며 한 대 얻어맞았다.]
베르단디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우르드에게 어깨부근을 손바닥으로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
마치 예고도 없이 사고로 아이를 만들어버린 딸을 훈계하는 어머니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만 같아 뭐라 반응하기가 곤란했다.
은현은 신격을 획득함으로서 일부나마 신이 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반쪽인 인간인 부분이 어디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과 인간이 정을 나누어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경우는 대부분 좋은 사례로 인식되지 않았다.
인간 사이에서도 귀족과 평민 사이의 비밀스러운 정사로 태어난 아이는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하니 그렇게 이해못할 반응도 아니었다.
단지 은현으로서는 조금 서운할 뿐이었다.
‘아쉽네요. 저희의 관계를 인정해주신 줄 알았는데….’
[어, 언니도 나쁜 뜻이 있어서 혼낸 것이 아니다. 단지 예고도 없이 아이가 생겨버린 것에 당황해서 나를 혼낸 것 뿐이니, 아이는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이미 진즉에 어느 정도 베르단디와의 관계를 인정한 이상,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벌어질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예언에 관한 고민을 털어버리고 여신과 잡담을 나누던 차에, 은현은 알베른의 안내로 아내들이 먼저 들어가 쉬고 있는 객실 앞에 도착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불러주세요.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가능한 선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에스의 영향력은 물론,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와 그녀의 남편인 자신이라면 과연 어디까지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감사합니다.”
꽤 악질적인 상상이었지만, 은현은 작게 웃음만을 지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할 생각은 없었다.
알베른이 떠나가고 방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자, 엘레노아의 품에 안겨서 앙탈을 부리고 있는 에린이 은현 쪽을 바라봤다.
“현아. 왔어?”
“오셨어요?”
마치 그루밍 해주는 펫과 주인을 연상시키는 두 아내들이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은현을 맞이했다.
“무슨 이야기 한 거야?”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진 것에 대하여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냥 별 얘기 아니었어. 아니에스에 관한 이야기였거든. 뜻하지 않게 감사의 인사도 받았네.”
하지만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던 은현은 그 부분을 제외하고 교황과 있었던 이야기를 가볍게 이야기했다.
“현아! 우리 밖으로 나가자! 관광하자! 관광!”
“그래. 알았어.”
은현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하는 에린의 어리광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맑은 아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까까지 고민으로 가득했던 은현의 기분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다행이구나. 아이의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베르단디는 작게 안도했다.
비록 자신이 노력하여 이끌어낸 결과는 아니지만, 은현의 기분이 좋다면 베르단디는 그걸로 족했다.
◆ ◆ ◆
신전 본교 밖으로 외출한 은현과 두 아내는 신전 안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먹었다.
관광의 기분으로 느껴본 에레니움이라는 도시는 제법 괜찮은 관광지였다.
신성력을 기반으로 상시 유지되고 있는 방위 결계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시민들을 안전히 지켜주는 것은 물론, 시민들의 신체 능력은 물론 컨디션 자체를 최상으로 유지시켜주는 축복의 효과가 적용된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병사나 성기사들이 순찰을 돌아주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치안이 굉장히 좋다.
많은 모험가들과 상인 등 외지에서 유입되는 인구의 숫자가 적지 않음에도, 다른 영지나 도시에 비하여 발생하는 문제의 질이나 숫자 자체가 굉장히 적었다.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엄격한 규율로 통제되어 법과 질서가 정돈되어 있는 에레니움은 정말로 낙원이라는 표현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아, 배부르다.”
레스토랑에서 혼자서 3인분을 가깝게 무지막지한 식사량을 소화한 에린이 만족스럽게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맛있었어?”
“네! 릴리 언니가 해준 요리만큼 맛있었어요.”
신성국의 수도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식당이라는 명성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에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고기의 식감.
그리고 입안에 가득 퍼지는 향신료의 향기와 어우러진 조화는 미각을 즐겁게 만들었다.
릴리의 요리와 비슷한 수준의 요리라는 것은 에린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응. 정말 맛있었지.”
관광의 기분을 만끽하며 즐기고 있던 찰나.
우우웅
“어?”
갑작스레 공기의 흐름이 변하는 것을 느낀 에린이 위를 허공을 응시했다.
감각이 예민한 에린이 먼저 이변을 느꼈고, 뒤따라서 은현과 엘레노아도 그 이변을 눈치챘다.
쩌저적
거칠게 요동치던 방위 결계가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결계가…깨졌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여 엘레노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깨져버린 것 자체는 인식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수십 년 동안 단 한번도 깨지지 않았던 신성의 결계가 허무하게 해제되어버린 것에 대한 의문.
어째서 해제된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생긴 당혹감에 엘레노아의 사고가 아주 짧은 순간 정지했다.
“아…!”
짧고 커다란 탄식을 내뱉으며 허공을 바라보던 에린이 한쪽 방향을 응시했다.
결계가 해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소름이 끼치는 기운.
“이건…!?”
그것은 주위의 모든 것을 오염시켜버리는 짙은 사기(死?)였다.
“…에린!”
“알았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에린이다.
다리를 굽혀 몸을 웅크리고 튀어오르듯 이변이 일어난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어두운 밤길를 달리기 에린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엘레노아. 우리는 신전으로.”
“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급히 신전으로 복귀하는 것이 급선무.
몸을 굽혀 엘레노아에게 등을 내보여주자, 엘레노아가 곧장 그의 등에 올라탔다.
엘레노아를 업은 은현은 곧바로 권능을 발동시켰다.
[은현 고유능력]
[시간 가속]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은현은 곧바로 신전을 향해 내달렸다.
달리면서 은현은 또 한번 생각했다.
‘이게 우연이라고?’
하필 지금.
하필 자신이 있는 이곳에서.
하필 또 한 번 사고가 터지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에게 누가 무엇을 어째서 강요를 하던지, 은현은 일단 사태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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