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80화 (663/730)

〈 680화 〉 680. 재앙 서막(1)

* * *

알베른의 안내에 따라 엘레노아와 에린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신전의 정식 방문 절차였다.

“그럼 이따 보자. 엘레노아.”

아니에스는 먼저 엘레노아의 방문 사실을 알리고 그녀의 세례식을 위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기 위해 먼저 그녀들의 곁을 떠났다.

일머리도 없고, 일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는 아니에스는 어지간히 귀찮아하는 것을 표정으로 티 내며 작게 투덜거렸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과 책무를 다른 이에게 떠넘기지는 않았다.

은현 일행이 에레니아 신성국을 방문한 본래의 목적은 교황의 부탁에 따라 은현과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비공식적인 행사다.

신성국을 방문한 공식적인 이유는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의 세례식이다.

이 공식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사는 엘레노아였기 때문에, 은현과 에린은 그녀의 수행인 같은 인식에 가까웠다.

현재 은현이 교황과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엘레노아는 자신의 공식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으음….”

세 사람이 머무르게 될 객실을 향해 알베른의 안내를 받고 있던 도중, 에린이 신전 내부의 분위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으신가요?”

“응? 아니. 아, 아니요.”

에린은 알베른의 물음에 습관적으로 반말을 하다가 급히 존대를 했다.

현재 신분을 감추고 있는 상태로 평범한 견습 사제에 불과한 소년이지만, 그는 현 교황의 손자이며 차기 교황의 자리를 노리는 후보가 될 예정인 소년이기도 했다.

페르니아스 왕국을 예로 들자면 국왕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왕세자와 비슷하다.

180도 달라진 에린의 대우에 알베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돌변하게 될까 봐 정체를 숨긴 것이었는데, 아니에스가 느닷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한낱 견습 사제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교황의 손자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알베른에게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 그 사실을 숨긴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않을 수가 있다니,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허탈하고 공허하다.

알베른은 열다섯 살도 되지 않은, 너무 이른 나이에 그것을 깨우쳤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뒤늦게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에린의 모습이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에린은 태도가 돌변하긴 했어도,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거나 이익을 두고 움직이는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저를 높게 대해주시는 건 나중에 제가 그런 자리에 올랐을 때 해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그렇게 할게….”

에린은 어쩔 수 없이 처음처럼 알베른에게 반말을 사용했지만, 아직 어색한 감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본래대로 자신을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에 알베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아까는 왜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던 건가요?”

“음, 그게…. 내가 생각했던 신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틀려서….”

“분위기?”

알베른은 에린의 모호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차분하다고 해야 하나? 굉장히 조용해.”

에린이 다시 한번 신전 안의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내부의 화려한 장식들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빛들로 가득한 복도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궁만큼이나 넓다.

그 넓은 복도에는 많은 사제들이나 성기사들이 각자의 용무로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 굉장히 고요하다는 인상이 가득한 복도였다.

사실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지금이 처음도 아니었다.

신성국의 수도인 에레니움에 들어오면서부터 느꼈던 부분.

그때부터 느꼈던 인상을 간단히 표현해보자면 ‘질서가 잡혀있다.’라는 느낌이었다.

“공작령에 있는 신전과는 완전 딴판이네.”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베스타 신전은 꽤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사제의 지원 요청을 바라는 모험가들이나, 필요한 자재를 납품하는 상인들, 그리고 기도를 하러 방문해오는 신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작령의 베스타 신전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에레니움의 베스타 신전 본교는 더 많은 규모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신전 내부를 걷고 있음에도, 작은 소란 하나조차 생기지 않아 고요했다.

“이곳은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본교이니까요.”

그만큼 신전 안에서 일을 하는 종사자들이나, 신전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나, 엄격한 규율과 규칙이 강요된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신전의 내부 상황은 그만큼 신전이라는 집단이 얼마나 견고하고 강인한 집단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도착했습니다.”

넓디 넓은 신전 본교의 내부를 약 10분 정도를 걸은 이후, 드디어 엘레노아와 에린이 머물 방 앞에 도착했다.

“나중에 그분도 이 방으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응! 고마워!”

에린은 친절하게 직접 자신과 엘레노아를 방까지 안내해준 알베른에게 방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발랄한 감사의 인사를 받은 알베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떠났다.

“엘레노아님! 침대가 정말 푹신해요!”

“응. 그러네.”

엘레노아는 마치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는 어린아이처럼 방안의 이곳저곳을 관찰하는 에린을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안내해준 방안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는 넓은 공간을 자랑하여, 누가 봐도 신전을 방문한 귀인에게 내어주는 객실이었다.

“방 진짜 좋다….”

자신은 물론 다른 아내들과 은현이 살고 있는 집의 시설이 최고라는 것은 당연히 바뀌지 않았지만, 모험가 활동을 하면서 외지의 숙소들을 다양하게 경험해보았던 에린의 경험 속에서는 이 방은 다른 여관이나 호텔들과 비교를 해봐도 단연코 최고를 차지했다.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이기 때문에 이런 고급스러운 객실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자, 새삼 엘레노아가 정말로 대단한 인물로 보였다.

“엘레노아님은 정말로 대단하세요.”

“무슨 소리니. 에린이 더 대단하지.”

엘레노아는 작게 웃으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사제들 중에서 그저 여신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뿐이야. 하지만 에린은 아니잖아.”

에린은 인간이면서 신수의 힘을 온전히 이어받은 특별한 존재다.

다시 온전한 여우 구슬을 손에 넣으면서 부활하게 된 구미호를 제외한다면, 특별함만으로는 에린을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억지로 기린이라는 신수의 내단을 삼키면서 구미호나 에린과 같은 존재로 들어서게 된 제라드 조차도 스스로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여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에린은 확실히 특별한 존재가 맞았다.

힘의 출력이나 공격력만을 놓고 본다면 제라드가 압도적으로 우위겠지만, 그 신수라는 특별한 힘을 다루는 안정성에 있어서는 에린이 한 수 앞섰다.

물론 본인은 자신보다 더욱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으음…. 모르겠어요”

에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엘레노아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엘레노아의 품에 안겼다.

“어머. 얘도 참.”

엘레노아는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어리광을 부려오는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엘레노아님이 점점 성장하셔서 아예 이곳에 계시는 건 아닐까 무서워요. 계속 저랑 현이 곁이 있어주실거죠?”

“물론이지. 내가 그 사람을 두고 어딜 가겠니.”

엘레노아는 아니에스에게서 차기 성녀의 직위를 제안받았을 때, 자신이 내걸었던 조건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성녀의 지위를 이어받아도 그녀는 에레니아 신성국을 대표하는 사제보다도, 은현의 아내로서 남아있기를 원했으며 아니에스는 그 조건을 확실히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서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는 모두 자신이 해결해주겠다는 아니에스의 호언장담이 있었기 때문에 엘레노아는 이렇게 이기적인 선택으로 은현과 다른 아내들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엘레노아님. 세례식은 언제쯤 시작될까요?”

“글쎄. 조금 걸리지 않을까? 하고 싶은 거라도 있니?”

“관광해보고 싶어요.”

어차피 세례식의 준비로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니, 세례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 자체는 남아 돌았다.

“그래. 그 사람이 오면 같이 나가보자.”

“히히. 정말 좋아해요! 엘레노아님!”

자신의 어리광을 곧바로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인지, 에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엘레노아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나이차이가 조금 나는 여동생을 키우는 기분이 드는 엘레노아는 에린의 웃음에 호응하듯 미소를 지어주었다.

◆ ◆ ◆

어두운 밤.

에레니움 전체를 수호하고 있는 거대한 결계를 유지하는 24개의 결계석들 중 하나를 지키는 초소의 병사가 가까이 접근해오는 한 명의 인영을 발견했다.

그는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상위 사제로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정기적으로 초소를 찾아와 방위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결계석에 신성력을 공급해주는 상위 사제였다.

“사제님?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두 병사 중 선임 병사가 초소로 나와 상위 사제를 맞이했다.

의아했던 것은 이런 새벽 시간대에 혼자서 상위 사제가 초소를 찾아왔다는 점이다.

신성력을 공급하는 업무는 주로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낮에 일과로 진행될 진데, 어째서 혼자 초소를 찾아온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조만간 결계석들을 점검하게 된다는 통보를 받아서 급하게 확인을 해보러 나왔습니다.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병사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 에레니움 전체를 수호하고 있는 거대한 방위 결계는 대다수의 상위 사제들이 불어넣은 신성력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만큼 터무니없는 방어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수십 개의 복잡한 술식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결계석이라도 이상을 일으킨다면 방위 결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계의 관리 및 총 책임을 맡은 본교에서도 정기적으로, 또는 불시적으로 결계석을 점검하는데 이번 경우에 대비하여 자체적으로 담당 사제가 점검을 나온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들은 병사는 상위 사제를 호위하며 결계석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결계석 앞에 도달한 상위 사제가 결계석을 만지며 신성력을 발동시켰다.

우우웅

작은 공명음과 함께 신성력이 발현되는 것을 느낀 병사는 별일이야 있겠냐는 표정으로 경계를 풀었다.

우우웅

하지만 짧게 끝날 것 같았던 점검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고, 이변을 눈치챈 병사가 뒤늦게 반응했다.

“어?”

거칠게 진동하는 방위 결계가 점점 얇아지며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사제님!? 지금 뭐하시는…!?”

결계석을 관리하는 사제가 결계석에 이상을 일으켜 스스로 결계를 파괴하려는 이상 행동을 보이는 경험을 처음 해보는 병사는 당황하여 재빨리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쩌저적!

결국, 에레니움을 지키고 있던 방위 결계가 깨져버렸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십니까!? 사제님!”

“…….”

병사가 뒤늦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며 겨누고 상위 사제에게 해명을 요구했지만, 상위 사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뒤를 돌아 병사와 마주했다.

“미안합니다….”

상위 사제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 사과는 눈앞의 병사에게만 향한 사과가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재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무고한 생명에 대한 사죄.

얼굴을 일그러뜨린 상위 사제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서 손에 꼭 쥐었다.

“정말로…미안합니다. 저를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오.”

상위 사제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넣으며 자결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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