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79화 (662/730)

〈 679화 〉 679. 인도자

* * *

“…인도자?”

처음 듣는 호칭에 의아함을 느낀 것은 은현 뿐만이 아니었다.

에린은 흘끗 고개를 올려다보며 그의 반응을 관찰했지만, 은현 또한 자신을 부른 그 호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교황 아르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에스. 알베른.”

“응?”

“네. 할아버지.”

“잠시 이분과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구나.”

아르반의 부탁을 들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과 외지인이 둘이서만 독대를 하는 상황은 신전의 사제로서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비공식적인 대면임과 동시에, 이 만남은 처음부터 아르반이 먼저 원했던 것.

게다가 아니에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은현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였다.

“흠. 알았어.”

“알겠습니다. 두 분은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아니에스와 알베른은 엘레노아와 에린을 데리고 교황의 방을 나왔다.

일행들이 나가고 단둘이만 방에 남게 된 은현에게 교황이 자리를 권했다.

“앉아주시겠습니다.”

“…네.”

은현은 자신을 인도자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에 떨떠름함을 느끼면서 일단은 대화를 잇기 위해 교황이 권하는 테이블에 앉았다.

“몸이 불편하여 당신의 앞에 앉을 수 없는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편하신 대로 계셔주세요.”

애초에 이 신성국의 최고 권력자인 교황에게 무례를 따지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비록 자신이 현 성녀인 아니에스의 친구이고,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의 남편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오히려 실례되는 행동.

하지만 아르반은 그런 자신의 권위를 앞에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 대하여 과할 정도로 친절하고 호의를 보내오고 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대면한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마치 이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듯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이상했다.

은현은 아르반에게 물었다.

“…절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하셨었죠.”

“네.”

“제가 20년 전 아니에스와 함께 팀으로 활동했었던 것 때문인가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그 이전, 더 오래전부터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은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르반은 자신을 아니에스가 만나기 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어떻게 자신이 20년 전에 아니에스와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은현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아르반이 ‘누군가에게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누구인가요? 당신에게 제 존재를 알린 자가.”

그것은 대체 누구일까.

은현은 머릿속으로 그것이 누구인지 추측했다.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불멸의 삶을 살아온 은현은 대륙 곳곳을 방랑하며 이름을 바꾸고 정체를 숨기며 살아왔지만, 어렴풋이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은현과 목적과 방식은 달랐지만, 여우 구슬을 이용하여 자신의 후손들에게 영혼을 정착시켜 불완전한 영생을 이어나갔던 페르니아스 왕국의 초대 국왕 오르타스가 그러했다.

은현과 그는 서로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의식하고 있었으면서 서로의 방식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오르타스로서는 은현을 건드릴 이유가 전혀 없고, 은현의 입장에서는 악마들과 흑마법사들을 비롯한 다양한 재앙들을 막아내야 하는데, 페르니아스 왕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미련한 짓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오르타스가 구미호를 배신하고 걷잡을 수 없는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낸 악인일지라도, 하계를 유지해야 하는 은현의 입장으로서는 오르타스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은현은 20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던 자가 아르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흘렸을 것이라 추측했다.

해명을 요구하는 은현의 시선과 마주한 아르반은 작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저를 찾아온 한 신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제 막 성년을 넘겨 20살이 되었을 때, 신전에서 연수를 마치고 견습 사제의 지위를 수여받았을 적의 이야기다.

신전의 말단 인사로서 찾아오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업무를 하던 중, 노파는 아르반에게 말했다.

­약 30년 뒤,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은 소녀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이 대륙의 운명을 크게 좌우할 인도자와 만나게 되지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요. 그저 노파의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밑도 끝도 없이 들어온 노파의 예언을 믿는 것은 그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사실은 다이아몬드의 원석이었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은 짓.

“하지만 그 예언은 사실이었습니다.”

약 3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많은 활동과 실적을 쌓고 상위 사제에 오르게 된 아르반은 한 명의 제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걸 직접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 어떤 사제와 성기사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막대한 신성을 품에 지닌 한 명의 소녀를.

아니에스라는 15살의 작은 시골 소녀가 신성력을 발현시키고 에레니아 신성국으로 인도되었을 때, 불현듯 불꽃이 점화되듯이 노파의 말이 아르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약 30년 뒤,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은 소녀를 키우게 됩니다.

“저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노파의 예언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르반은 아니에스를 자신의 양녀로 맞이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사제로서의 교육을 시작하여 대륙의 운명을 맡길 고위 사제로 성장시켰다.

“그것은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준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신의 축복으로 내려받은 막대한 신성을 활용할 수 있게 된 아니에스는 자연스레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고 은현을 만났다.

“…….”

한 노파에게 들었던 예언의 이야기를 모두 설명한 아르반은 차분히 은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은현이 입을 연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50년 전, 교황님께 예언했던 그 노파는…. 누구였습니까?”

“모릅니다.”

출신도, 가족도, 그 이후의 행적까지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그 생사조차도 모른다.

“상위 사제에 오르고 나서 아니에스를 사제로 교육하고 그 노파의 예언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을 시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죠. 하지만 그런데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30년이나 전에 신전을 방문했던 사람을 이제 와서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노파는…. 정말로 평범한 ‘노파’였습니까?”

은현의 그 물음은 노파의 정체를 묻는다기보다는, 이미 그 노파의 정체를 대략적으로 추측하고 있는 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이 세상을 구원하라는 의지가 담겨있는 베스타 여신의 예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사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나이를 먹고 계속해서 생각을 해보니, 베스타 여신께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베스타 여신은 인간들에게 신성력이라는 은혜를 내려주고 구원의 힘을 베풀어주지만, 세상을 구원할 예언을 내려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예언이라는 것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이었다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수많은 재앙도 어떠한 방법으로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르반은 50년 전에 자신에게 예언한 노파는 베스타 여신의 예언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은현 또한 그 부분에는 동의했다.

그 노파가 정말로 베스타 여신의 대행자였다면, 이미 신계에서 여러 차례 얼굴을 대면했던 은현에게 이러한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들의 사이에서도 이처럼 하계의 일에 간섭하는 등의 행동은 금기시된 만큼, 이것은 신들에게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르반에게 예언을 했던 노파의 존재은 더더욱 불가사의 했다.

신들조차 불가능한 것을 해내는 그 존재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베르단디.’

은현은 아르반이 들은 예언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여신을 불렀다.

[그래. 아이야.]

사도의 부름에 나타나 모습을 드러낸 베르단디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미 아니에스에게서 이야기를 들으셨지 않습니까. 저는…. 20년 전에 한 번 죽었었습니다.”

“네. 그랬죠. 하지만 저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아니에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당신이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그 예언 때문입니까?”

“네.”

아르반이 노파에게서 들었던 예언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인도자는 자신의 목숨을 모두 불태움으로써 더욱 높은 격의 존재로 승화될 것입니다.

노파의 예언 속에는 이미 아니에스의 출현, 은현과의 만남과 그의 죽음, 마지막으로 그의 부활까지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예언에 경악한 것은 베르단디였다.

[말도 안 된다…!]

은현이 부활하여 하계에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계기는 베르단디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신들을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낸 끝에 명계에 있는 그의 혼을 불러와 하계로 되돌려보냈고, 20년 동안 땅에 묻혀 있던 그의 육체에 두 번째 생을 부여했다.

그런 여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은현은 살아있다.

하지만 그 예언 속에 은현의 부활조차 이미 정해져 있던 결과라면, 베르단디의 노력과 행동조차도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경악스러워하는 베르단디의 반응을 본 은현은 확신했다.

‘있어. 여신의 행동과 의지조차 예견하고 조절할 수 있는 상위의 존재가.’

[하지만 아이야.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베르단디는 너무 비약적인 이야기라며 믿지 않았지만, 은현은 이미 이 가능성을 이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베르단디. 예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을 겁니다.’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 위에,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호의를 품은 등장인물들을 배치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역경과 고난을 준비하고 있다.

끝없이 앞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자신의 운명의 실에 누군가가 무수히 많은 실을 엮어나가며 하나의 커다란 줄기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닥쳐올 무언가를 대비해서 은현이라는 존재를 완성시키기 위하며 의도적으로 배치된 사건 사고들.

은현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신계의 신들조차 파악하지 못한 어떤 존재가 자신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

이제는 베르단디도 은현의 생각을 너무 과한 비약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아르반이 들은 예언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당황한 베르단디와 달리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던 은현은 침착하게 그 예언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셔서.”

“저야말로,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대륙을 구원할 인도자시어.”

“저는…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아르반은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는 이미 아니에스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아니에스는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이후로 사제로서 진지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그 아이 눈에는 어떤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죠.”

“…….”

“성격에도 맞지 않아, 평소 신전 내부 활동에 일절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그 녀석이, 전쟁을 마치고 복귀하자마자 다른 사람처럼 열심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저는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아르반은 아니에스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기특하게도 이리 답하더군요. ‘그 녀석이 희생해서 지켜준 세상인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라고.”

아니에스에게 기특한 변화를 가져다준 원인은 틀림없이 은현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변하게 만들어 준 계기인 당신은 틀림없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

은현은 자신에게 향하는 과한 칭송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뭘 고민하느냐?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아이는 훌륭하다.]

오히려 자식이 받은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진 베르단디가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아니에스에게 무리하게 부탁한 이유는 당신이 내가 받은 예언 속의 인도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자이자 딸이나 다름이 없는 아니에스를 잘 이끌어주고, 무사히 돌려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르반은 작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거동이 불편해질 정도로 노쇠한 몸으로 최대한 표현한 감사는 20년 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스승이자 부모로서 은현에게 보내는 무한한 호의였다.

“여신의 가호가 부디 당신께 함께 하시기를….”

이미 신성력이 아닌 상위 개념의 힘인 신력을 몸에 품고 있는 은현에게는 그의 기도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지만, 아르반의 말 속에 담겨있는 그 마음만큼은 절대로 가볍지 않아 절절히 은현의 마음에 전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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