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0화 〉 670. 1 더하기 1은 4(2)
* * *
“…….”
에린은 멍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굳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침대 위에서 자신에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금발의 소녀와 베르단디의 품에 안겨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은발의 소녀다.
화사한 금발과 백은발의 머리카락은 에린의 머릿속에 은현과 베르단디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쏙 빼닮았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아무래도 아이와 나 사이에 생겨버린 것 같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아무래도 아이와 나 사이에 생겨버린 것 같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아무래도 아이와 나 사이에 생겨버린 것 같다.
베르단디의 그 짧은 설명이 계속해서 에린의 머릿속에 오버랩되어 맴돌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신계에서 복귀한 은현과 베르단디와 함께 나타난 두 명의 소녀가 무엇인지 자연스레 추측되었다.
“그러면 정말로…. 이 둘이…. 현이랑 베르단디님의…?”
“…그렇지.”
“하….”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베르단디의 대답을 확인하고, 에린이 숨을 토했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할 말을 잃어버린 상태.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잡은 에린이 다시 베르단디에게 물었다.
“…현이는요?”
“지금 왔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알맞은 타이밍에 은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계로 복귀하자마자 아침을 준비했는지, 이틀 만에 맡는 은현의 옷에서는 향긋한 스프의 냄새가 베어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베르단디의 짧은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에린이 곧바로 은현에게 사정을 물었다.
“어쩌다 보니…이렇게 됐어. 얘들아.”
“네. 아빠!”
“……!”
에린의 품에 파고든 금발의 소녀가 활기차게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은현을 향해 점프하여 뛰어들자, 에린이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갑작스러운 금발 소녀의 도약도 당황스러웠지만,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은현을 부른 소녀의 호칭이었다.
베르단디를 통해서 사실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마음속 한쪽으로는 부정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복잡한 생각이 가득 피어올랐다.
이내 에린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변화에 또 한 번 두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은현을 향해 뛰어든 금발 소녀과 베르단디의 품에 안겨 있던 은발 소녀의 몸이 새하얀 빛을 뿜어내더니 그 형태가 변화했다.
은현에게 집중되는 두 개의 새하얀 빛은 에린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은현의 손에 착 쥐어지는 검은 에린의 눈에도 익숙한 검들이었다.
최근에 제작하여 평소부터 은현이 자주 애용하는 두 자루의 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관이 몰라보게 변화했다.
본래는 적색과 청색으로 밝은 빛과 날카로운 예기를 갖추고 있던 외관은 금색과 은색으로 빛나며 이전보다 더욱 존재감을 과시했다.
에린은 지금 은현이 보여준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사람이…. 검이 된 거야…?”
“정확히는 검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거지.”
“…….”
그게 대체 무슨 말인 걸까.
사람이 검으로 변할 수가 있는 걸까.
아니, 은현은 검이 사람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그거 아니야?’
뭐가 다른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실재하는 존재가 스스로 그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부족한 에린의 지식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에린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정리하지 못해 몹시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설명을 마친 은현이 양손에 쥐고 있던 두 자루의 검을 놓았다.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던 두 자루의 검이 다시 빛을 뿜어내더니 처음 보여주었던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변화했다.
“…….”
다시 봐도 두 소녀는 은현과 베르단디를 쏙 빼닮았다.
두 소녀가 은현의 다리를 한쪽씩 붙잡고 물끄러미 에린을 바라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적색의 똘망한 눈매들이 왠지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금발 소녀의 머리카락은 베르단디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 아름다웠고, 은발 소녀의 경우에는 은현의 머리카락을 물려받은 듯 그 특징이 도드라졌다.
적색의 눈동자는 모두 은현에게서 물려받은 듯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은현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고, 어렸을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지금의 두 모습이 딱 그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 귀여워….”
그 생각을 가지게 되니 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얘들아. 가르쳐 준 대로 한번 인사해볼래?”
“네~!”
“네. 아빠.”
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두 소녀들이 자신들의 배꼽에 손을 올리고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막내 엄마. 금월이에요.”
“…은월이에요.”
“어, 엄마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호칭에 에린이 몸을 떨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일리아나처럼 아이를 갖게 되고 엄마라고 불리게 되는 날을 바라며 상상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불리게 된다니 예상치 못한 기습을 받은 것처럼 가슴 속의 기분이 근질거렸다.
게다가 은현과 베르단디를 쏙 빼닮은 구석도 있었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싫지가 않았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닌데도, 적의가 아닌 호의를 품게 되는 자신의 마음이 되려 신기할 정도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에린이 두 소녀에게도 다가와 조심스레 손을 내뻗었다.
작게 침을 삼키며 긴장한 그녀의 태도에서 호의를 읽은 금월과 은월이 에린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다시, 다시 한 번만 불러볼래? 내가 누구라고?”
어째서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인지, 금월과 은월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에린의 부탁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막내 엄마요!”
“엄마….”
“헤헤. 맞아! 엄마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러야 해!”
에린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호칭에 적응이 빨랐다.
베르단디와 은현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설령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에린의 생각과 마음은 그 정도로 굉장히 단순했다.
게다가 그 외모 또한 제일 좋아하는 은현을 닮았기 때문인지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일단…. 베르단디.”
은현은 흘끗 베르단디를 바라보며 불렀다.
헤벌쭉해진 표정으로 에린의 품에 안겨 있는 금월과 은월을 향해 눈짓하자, 베르단디도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아이들아. 이만 가자꾸나.”
“네에~.”
“네….”
베르단디가 나서서 금월과 은월의 손을 하나씩 붙잡자 셋의 모습이 반투명하게 변화하면서 점차 희미해져 갔다.
실체를 풀고 딸들과 함께 신계로 올라간 것이다.
“베르단디님하고 같네?”
“금월이랑 은월이는 하계에 실재하는 육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어…. 그건 그 두 아이도 베르단디님하고 비슷한 여신이라는 뜻이야?”
“그건….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은현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빠졌다.
“나와 같은 ‘반신(半?)’의 격이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은현의 모습은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법 신선했다.
“그리고 베르단디님하고 더 가까워졌네.”
“내가?”
“베르단디님을 부를 때 ‘님’자가 빠졌잖아.”
“…….”
그 작은 미세한 변화를 에린은 놓치지 않았다.
하계에서는 이틀의 시간이었지만, 은현이 휴가차 갔다 온 신계에서의 시간은 약 2년이 넘는다.
그동안 함께 했을 베르단디와 더 가까운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에린의 추측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추측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기까지 둘씩이나 만들어 왔으니까.
“실망 안 했어?”
“응? 내가 왜?”
“갑자기 애를 만들어 왔잖아.”
“음…. 글쎄? 생각보다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에린은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언짢지 않았다.
솔직히 베르단디를 제외하면 아내가 넷이나 있는 이 상황만으로도 이미 정상이 아니다.
언젠가 일리아나를 따라서 엘레노아와 릴리도 아기를 가지고 낳게 된다면 아내들 모두가 합심하여 아이들을 키우기로 이미 이야기도 되어 있었다.
은현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아내들 사이에서 오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랑 베르단디님을 닮아서 애들도 이쁘고, 언젠가는 나도 엄마가 되고 싶었으니까.”
이미 일리아나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육아를 해야 할지 아내들끼리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와중인데, 베르단디의 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 그래도 일리아나님은 모르겠네. 일리아나님은 현이를 엄청 좋아하니까.”
“…나도 그게 제일 걱정이다. 하아.”
에린의 우려에 은현도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일리아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른 누구와도 나누지 않을 정도로 독점욕이 굉장히 강한 여자다.
지금은 그 성격이 많이 유순해지고 정이 많아졌지만, 처음에는 남편인 은현이 다른 여자와 맺어진다는 것을 허락해주었다는 것부터가 기적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
“그래도 베르단디님의 아이들이니까. 무릎 꿇고 싹싹 빌면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주시지 않을까?”
“무릎 꿇고 비는 건 확정이야?”
하지만 그 정도로 일리아나가 용서해준다면 정말로 싸게 먹히는 사실.
그것은 은현도 동의하는 바이며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갑자기 어떻게 저 아이들이 태어난 건지는 나도 이해가 안 돼.”
“그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줄게.”
◆ ◆ ◆
가상 세계가 끝나기 전까지 약 2개월의 시간이 남았을 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은현이 중얼거렸다.
“…하계로 내려가기 싫네요.”
이곳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가 없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악인이 없다.
자신들을 핍박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겨 질투하는 사람들조차 없으며 운명의 ‘보정’ 효과가 붙은 이 가상 세계에서는 은현이 조금만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나 그 이상을 볼 수가 있었다.
은현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낙원이나 다름이 없는 세계였다.
휴가의 기분으로 딱 2년만 즐기고 하계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에는 변함이 없지만, 끝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여신의 사도였지만, 결국엔 은현도 인간이었다.
함께 침대 위에 누워있는 베르단디가 은현을 꼭 끌어안으며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다. 아이야.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이곳으로 아이를 데려와 줄 테니.”
“베르단디….”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은현과 베르단디는 하루도 몸을 겹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횟수가 많아지고 시간이 늘어나면서 은현은 어느샌가 베르단디를 더욱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가 존칭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쉽구나….”
“아쉬워요?”
“나도…. 마녀 아이처럼 아이의 아기를 가질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여신과 사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사람으로서 부부의 관계를 맺고 태어난 아기의 성장을 지켜보는 평범한 가정의 생활.
여신인 베르단디가 그것을 바랄 수 없는 것은 모순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베르단디도 저도,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은현은 베르단디의 팔을 붙잡아 이끌고 침대 위에 눕혔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따스한 햇볕이 새하얀 속살을 비췄다.
베르단디의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지며 진한 스킨십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즐길까요?”
은현의 권유에 베르단디가 기쁜 듯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주 좋다.”
◆ ◆ ◆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생겼더라고. 아기가.”
그것도 하나가 아닌 쌍둥이가 뱃속에 생겨났다.
“…응?”
에린은 갑자기 급전개되는 이야기에 숟가락을 멈칫했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에린의 시선을 받은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1년을 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몸을 섞은 날이 가득했는데도 베르단디는 임신을 하지 않으셨거든. 그런데….”
“…베르단디님이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바라시자마자 임신을 하셨다고?”
“맞아.”
그곳은 오직 베르단디의 신력으로 구현된 가상의 세계다.
비록 인간의 몸으로 강제가 유지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가상의 세계에서는 몇 번이고 몸을 겹치고 부부의 생활을 이어나간다고 한들 베르단디의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가상 세계의 유지 시간을 1개월밖에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베르단디는 갑작스레 뱃속에 쌍둥이 딸을 가지게 되었다.
은현은 그 이유를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 놓고 안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걸었던 ‘법칙’이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계기는 그 가상 세계에 적용되고 있던 운명의 ‘보정’ 효과 때문이었을 거야.”
은현이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운명이 보정되는 법칙.
그 법칙은 은현뿐만이 아니라, 법칙을 만든 베르단디에게도 적용이 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