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9화 〉 669. 1 더하기 1은 4(1)
* * *
‘교황님이…현이를?’
에린은 어벙한 표정을 짓고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저어…. 현이는 베스타 신전의 교황님하고도 인연이 있나요?”
“아니. 전혀? 걔는 나 이외에는 베스타 신전의 고위층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그런데 왜 교황님이 현이를…?”
“글쎄다.”
아니에스는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것도 모름을 밝혔다.
“…….”
에린은 살짝 언짢음을 느꼈다.
그녀는 베스타 신전의 교황이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
선인일 수도 있으나, 이 세상에는 마음씨가 착한 선한 이들만이 있지 않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목적도 이유도 모르고서 은현을 베스타 신전의 교황에게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아무리 아니에스가 과거에 은현이나 일리아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옛 동료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 조심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들 중에서 가장 부주의하고 성급한 성향을 가진 에린이었지만, 은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해지는 것이 에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니에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은현과 일리아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옛 동료이기도 하고 엘레노아의 선임이기도 하다.
마음속에 피어오른 작은 언짢음을 감추고 슬쩍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아님은 이걸 허락하시는 건가…?’
그 시건의 의미를 눈치챈 엘레노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 나도 잘 알아.”
역시나 엘레노아는 에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간파했다.
에린의 우려와는 달리 엘레노아는 베스타 신전의 교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
“우리에게 위해를 끼칠만한 분이 아니셔.”
신성력을 처음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엘레노아는 베스타 신전의 본교를 한차례 직접 방문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교황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막 신성력을 각성한 일개의 사제로서는 신전의 최상위 권위자와 얼굴을 대면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엘레노아에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제라는 지위뿐만 아니라, 페르니아스 왕국이라는 강대국의 고위 귀족인 공작 가문의 여식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적어도 엘레노아의 기억 속에서 베스타 신전의 교황은 그렇게 나쁜 인상의 노인이 아니었다.
‘물론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건 이르지만….’
신성한 힘을 다루는 사제라고해서 그들 모두가 선한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엘레노아는 더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추잡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욕망이 가득한 성직자들을, 엘레노아는 끔찍한 경험을 통해서 직접 겪어보기까지 했다.
게다가 신전의 추악한 비리로 인해서 마리우스라는 사령술사의 재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엘레노아는 더는 베스타 신전 자체를 믿을 수가 없어졌다.
엘레노아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은현과 자신에게 직접 신성의 축복을 하사한 베스타 여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성녀인 아니에스 정도였다.
‘아니에스님이 믿고 계신 분이시니까.’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교황을 믿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만약 은현에게 방해가 되는 계획을 세우기라도 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때다.
설령 신전의 최고 권위자인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은현이나 자신들을 방해한다면 망설임 없이 적대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엘레노아가 믿고 있는 신앙심은 베스타 신전과 그 집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은현과 베스타 여신을 믿고 있는 굳센 마음이다.
설령 베스타 신전을 적대한다고 하더라도, 그 신앙심은 진짜였다.
“그리고 나도 따라갈 예정이니까.”
“어, 정말요?”
“나도 베스타 신전의 차기 성녀지 않니. 이번에 그 사람과 함께 신성국으로 가게 되는 대외적인 이유는 내 세례식이야.”
“아.”
엘레노아는 아니에스의 뒤를 잇는 차기 성녀.
신전 본교에 가서 세례식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히 거쳐야 하는 절차다.
은현과 교황의 면담은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진행되는 비공식 일정이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면 우리와 함께 신성국에 가지 않겠니?”
“어…. 저는 괜찮지만…. 일리아나님은요?”
자신이야 프리랜서나 마찬가지로 내킬 때마다 일을 하는 모험가 신분이지만, 현재는 일리아나의 임신으로 움직이기가 어려운 상태다.
그나마 엘레노아와 릴리가 일리아나를 전담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은현과 에린이 대외로 나가서 활동할 수 있었지, 정작 엘레노아가 자리를 비운다면 일리아나의 몸 상태를 케어해줄 사람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곤란하다.
아니에스라면 일리아나의 케어를 부탁할 수 있을만큼 실력과 믿음이 가는 인물이긴 했지만, 이번엔 은현과 엘레노아와 동행할 터이니, 그것도 불가능하다.
“이쪽도 무리하게 일정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출발하는 날짜는 고맙게도 신전 쪽에서 우리에게 전적으로 일임해주셨어.”
이것은 곧 출산을 앞둔 일리아나를 배려해준 아니에스의 호의였다.
“날짜는 일리아나님이 아이를 출산하시고 안정을 취하시면 그 이후로 잡을 생각이야.”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짧으면 2개월에서 늦는다면 3개월이 걸리겠지만, 은현에게는 늦게 출발하더라도 신성국과의 거리를 좁혀 그 거리와 시간을 메꾸고도 남을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아아. 그럼 준비할게요.”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들은 에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은현과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에린이 기대에 부풀어 오른 마음에 헤벌쭉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저는 이만 일리아나님께 가볼께요!”
“음. 가서 쉬어라.”
엘레노아는 웃으며 에린을 배웅했다.
◆ ◆ ◆
“미호님. 꼭 이렇게까지 영약을 고집하신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제라드는 조심스레 구미호의 의중을 살폈다.
구태여 처음 본, 은현의 스승이라고 소개받은 시에테와 좋지 못한 첫인상을 쌓으면서까지 이 영약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이 영약은 땅의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영약으로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신체의 내구력을 올려주는 효과가 있지.”
그냥 복용하는 것도 그럭저럭 좋은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약이 가진 땅의 기운이다.
“지기(??)는 뇌기(雪?)를 다스리고 잡는데 탁월한 성질을 지녔다. 특히나 몸안의 뇌기를 아직 온전히 다스리지 못하는 너에게는 더 높은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약이다.”
제라드가 기린의 마력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는 영약이었다.
“…….”
“뭘 쳐다 보느냐.”
제라드가 발걸음을 멈춰 물끄러미 구미호를 바라보고만 있자, 구미호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절 그렇게 생각해주고 계셨다니….”
제라드는 구미호가 영약을 고집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동어린 표정을 지었다.
“…….”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구매하려 했던 영약을 빼앗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유치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지만, 구미호는 구태여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멋대로 해석하여 멋대로 감동을 받아버린 제라드에게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했다가는 또 멋대로 실망할 것이 뻔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단순한 제라드는 그냥 이대로 두는 것이 더 나았다.
괜히 본심을 말하여 귀찮아지고 싶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미호님! 평생 미호님을 모시겠습니다!”
감격에 어린 제라드가 구미호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앞으로도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열렬한 어필을 보내왔다.
“에이이! 떨어져라…!”
구미호는 이건 이거대로 또 귀찮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치근덕거려오는 스킨십도 스킨십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자신을 꼭 끌어안은 제라드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킨십을 이어나갔다.
“네놈은 어찌되었거나 그 녀석에게서 내가 맡은 상태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하. 예! 미호님의 노력에 반드시 답해 보이겠습니다!”
“…….”
이야기가 통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통하지 않고 있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에휴.”
작게 한숨을 쉰 구미호는 어쩔 수 없이 제라드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 ◆ ◆
머리와 등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는 일리아나의 자상한 손길에 에린이 헤실헤실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히히.”
응석을 부리면서 잔뜩 귀여움을 받았기 때문인지 에린의 기분은 최고로 좋은 상태.
푹신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가득한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면, 오늘 하루종일 시에테의 뒤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면서 쌓였던 피로가 모조리 풀리는 것만 같았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일리아나의 품에 안겨서 잠을 자고 싶었지만, 에린은 그럴 수 없었다.
“저는 그럼 집에 가서 현이를 기다릴게요.”
내일 아침이면 베르단디와 함께 휴가차 신계로 올라간 은현이 돌아온다.
하계의 시간으로는 2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신계에서 그는 약 2년 동안 누적된 심적인 피로를 모두 풀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에린은 현재 아무도 없는 던전 주택을 홀로 지키면서 은현과 베르단디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에밀리아를 비롯한 인형들이 던전 내부를 지키고 주택을 관리하고는 있었지만, 에린은 먼저 은현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 아가. 현이가 오면 바로 저택으로 데려오렴?”
“넵. 알겠습니다.”
일리아나의 말에 에린은 기운차게 대답하면서 집으로 복귀했다.
“에밀리아. 경비 부탁할게.”
“명령을 수락합니다.”
언제나 평소처럼 에밀리아와 인형들에게 던전과 집의 경비를 맡기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다음 곧바로 침대에 몸을 누웠다.
“후우….”
에린은 노곤했던 오늘 하루를 회상하면서 은현이 쓰던 베개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얼굴을 파묻었다.
평소였다면 베개가 아니라 은현의 팔을 끌어안고 냄새를 맡으며 잠에 들었을 테지만, 지금의 에린에게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일리아나와 그녀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 엘레노아와 릴리까지 공작 저택에서 머물고 있는 상황인지라, 다섯 명이 모두 쓰는 킹사이즈의 침대는 에린 혼자만 쓰기엔 너무 넓고 허전했다.
“현이 보고 싶다….”
에린은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베개에 묻어있는 은현의 체취를 킁킁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자신의 앞에 은현이 돌아와있기를 작게 소망하며,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으응….”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에린의 의식을 각성시킨 것은 그녀가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언가를 때문이었다.
“뭐야…?”
자신에게 달라붙어오는 묵직한 무언가를 느낀 에린이 조금씩 몸을 뒤척이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유독 아침잠이 많은 에린은 잠에서 덜 깬 탓인지 의식을 각성하고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눈을 뜨고 이불을 들춰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언가의 정체를 찾았다.
“…….”
에린의 두 눈에 보인 것은 어린애였다.
외모는 약 5살이나 6살 쯤 되어보일까.
화사한 금발에 적색의 눈동자를 가진 어린 소녀가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히 올려다보며 에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니…?”
에린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벙찐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어린 소녀는 활짝 웃기만 할뿐 답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발랄하게 미소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오는 금발의 어린 소녀를 보고 에린은 무심코 숨을 삼켰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 어떤 두 남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 어, 안녕…. 아니. 아니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에린이 잠이 확 달아나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곳은 일리아나와 은현이 만든 결계로 평범한 일반인은커녕 제법 경험을 쌓은 중위급의 마법사들조차도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장소다.
그런데 눈앞의 자신의 위에 올라타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 있는 소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일어났구나. 신수 아이야.”
“…어?”
에린은 온화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베르단디를 발견했고 멈칫하여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을 지었다.
베르단디의 품안에 안겨 있는 백은발의 작은 소녀가 에린의 두 눈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베, 베르단디님…? ”
에린은 너무 놀라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베르단디의 품에 안겨있는 백은발의 소녀를 가리켰다.
“그…. 이 아이들은 도대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다.”
베르단디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아무래도 아이와 나 사이에 생겨버린 것 같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씩이나.
“아니. 아니. 아니! 너무 간단히 줄이셨는데요!?”
어떻게 신계로 둘이 올라갔는데 돌아와보니 네 명이 되어버릴 수가 있을까.
에린은 패닉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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