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7화 〉 667. 자존심 싸움(1)
* * *
“세, 세상에…!”
구미호와 제라드를 본 에린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호가 밖을 나오다니…!”
에린은 구미호가 던전 안의 사당에 틀어박혀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부활한 이후로 계속 마력을 정갈하게 갈무리하여 힘을 회복하고 있는 것에 전념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더욱 높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신수의 정양이었지만, 에린의 눈에는 그냥 집에 틀어박힌 히키코모리였다.
사당의 청소도, 요리도 모두 제라드가 맡고 있기까지 하니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에린이 하는 것은 정기적으로 에린의 훈련을 봐주는 것 뿐.
그런 구미호가 외출했다는 것이 에린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쯧.”
에린의 시선에서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읽은 구미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신수의 힘을 이어받은 자신의 후임인 그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공경하여 우러러볼 줄을 모른다.
섭리를 초월한 드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천년을 가까이 수양을 이어왔던 구미호는 누구에게나 우러러보는 신수.
하지만 에린에게는 그저 자신에게 잔소리해대는 귀찮은 스승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저 버릇을 고쳐놓고 신수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게 해주겠다고 굳게 다짐도 했었지만,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그녀의 인성과 성향에 큰 기여를 한 은현이 너무 오냐오냐 받아 키우면서 생긴 문제는 도저히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라드님! 어떻게 된 건가요!? 어떻게 미호가…. 미호가 밖을 나오다니!”
“아, 좀 조용히 해라!”
구미호는 소란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에린에게 짜증을 냈지만, 이미 잔뜩 흥분한 상태인 에린은 구미호의 윽박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수행하면서 잔뜩 얻어먹었던 욕이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내공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순식간에 구미호 쪽으로 몰리기 시작하자 구미호의 기분은 더욱 안 좋아졌다.
에린만큼이나 타인의 시선이나 감정에 민감한 그녀는 에린과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에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페로몬으로 사람들을 홀리기가 쉽다.
이목이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제라드는 구미호의 심기가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다는 것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에린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저 때문입니다.”
“네? 제라드님이요?”
에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구미호님이 제게 먹일 영약을 구해주신다고 이렇게 직접 발걸음을 옮겨주셨습니다.”
제라드는 에린과 마찬가지로 신수의 힘을 몸속에 품은 특별한 인간이다.
그 힘의 본질은 에린이 가지고 있는 구미호의 마력이 아니라, 기린이라는 뇌전의 특성을 가득 품고 있는 사나운 기운.
에린이 가지고 있는 구미호의 힘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사납고 위험한 힘에 가까웠다.
정갈하고 깨끗한 기운의 집합체인 구미호의 마력과 자연의 뇌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기린의 마력은 만들어진 목적과 그 성질부터가 아예 다르다.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 자기 수양을 통해 갈무리된 구미호의 마력은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한 순한 강아지라면, 기린의 마력은 통제가 불가능하여 미친 듯이 날뛰는 망아지와 같다.
기린의 힘을 품게 된 경위 또한 자살에 가까운 무모한 행동을 통해서 아주 우연에 우연을 겹친 결과.
그렇게 제라드는 구미호보다 더 성질이 더러운 기린의 힘을 체내에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미, 미호가 직접….”
에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미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라드가 그 사나운 기린의 마력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은 에린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제라드가 현재 겪고 있는 고초를 해결해주기 위해 구미호가 직접 발걸음을 옮겨 사당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로, 에린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상식으로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구미호는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제라드를 믿고 아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흐흐.”
그것을 먼저 깨달은 에린이 구미호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타인을 생각하고 아끼는 구미호의 모습이 새로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신수의 힘을 컨트롤하는 수행을 할 때마다 항상 자신을 혼내기만 하는 밉상이 아니라, 굉장히 의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뭘 건방지게 히죽거리고 있는 거냐.”
에린의 그 표정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구미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에린을 노려보았다.
“아니? 아무것도오?”
에린은 날카로운 구미호의 시선을 받아넘기고 얄미운 말투와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
이곳이 구미호의 사당이었다면 에린의 괘씸한 태도에 구미호가 진즉에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겠지만, 이곳은 사당이 아니라 아르미타스 공작령이었다.
구미호는 에린이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을 얄밉게 놀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저게 진짜….”
누구한테 배운 것인지 아주 영악했다.
최소한 자신에게서 배운 것은 아닐 터.
아마도 은현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운 것들을 이런 식으로 써먹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에린의 도발로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난 구미호가 에린을 혼내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가려던 찰나, 제라드가 구미호의 앞을 막으면서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자자, 에린 양. 짓궂게 미호님을 놀리시는 건 여기까지만 해주시죠. 그보다….”
제라드는 상점의 진열대에 배치된 영약을 앞에 두고 에린과 함께 자신과 구미호 쪽과 대치해 있는 여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에린 양과 동행하고 계신 여성분의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신사적으로 정중히 부탁하면서, 제라드는 시에테의 모습을 살폈다.
딱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상대를 앞에 두고, 상대방의 역량을 살피고 파악하려는 행동은 제라드의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은 딱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이며, 취하고 있는 자세나 태도로부터는 자신감이 가득 넘쳐 흐르고 있다.
그리고 상대쪽 또한 냉철히 자신을 응시하며 분석하고 있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으니, 시에테의 날카로운 눈매를 느끼고 제라드도 덩달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 강하신 분이네.’
시에테를 보고 관찰한 결과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녀의 정확한 역량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제라드가 알고 있는 한 가장 강한 검사는 은현과 리오드다.
하지만 눈앞의 여성은 그 두 검사와 비교를 해보아도 역량을 측정할 수 없었다.
‘현이 형님이나 리오드 형님과 동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 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생각인가.’
스스로 떠오른 생각이 말도 안 된다며 치부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은현이나 리오드보다 강한 검사가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제라드는 자신의 안목을 믿지 않았다.
“아, 맞다! 제라드님은 대스승님을 뵙는 게 처음이시죠!?”
“…예?”
“대스승?”
에린의 말에 제라드와 구미호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스승이라는 단어는 스승의 스승을 뜻하는 말이다.
에린에게 검술을 비롯하여 다양한 것을 가르친 스승은 단 한 명 뿐이다.
그렇다면 에린이 대스승이라고 칭한 여성의 정체를 추측하는 건 간단했다.
“설마…?”
“혀, 현이 형님의 스승님이시라고요!?”
제라드가 펄쩍 뛰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현에게 검술을 가르친 스승에 관한 이야기는 제라드도 얼핏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약 400년 전쯤에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그런데 지금 눈앞의 그 인물이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접했는데 놀랍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그렇군.”
제라드와 달리 구미호는 동요한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빨랐다.
400년 전의 이미 죽은 인물이 어떻게 부활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파악했다.
“애송이. 네가 한 것이로군.”
구미호는 이전에 인간의 육체로 부활하여 자신을 찾아왔던 백귀들을 떠올렸다.
시간의 섭리를 거스르고 과거에 실존했던 생전의 육체를 현재로 불러와 백귀들의 그 혼을 정착시켜 부활시킨 특수한 케이스.
하계의 규칙을 비틀어 그것을 가능케 했던 이유는 여신의 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에린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 응.”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에테의 소개를 이어나갔다.
“이분은 현이의 스승님이신 시에테님이라고 하셔.”
“…….”
제라드는 뒤늦게 자신의 안목이 정답이었음을 깨달았다.
은현에게 검술을 가르친 스승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긴장케 하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에테 쪽이다.
“이 영약은 내가 먼저 찾았다. 그러니 내가 사도록 하지.”
“…….”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시에테의 발언에 구미호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녀가 은현의 스승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여기서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영약을 놓치는 것은 구미호에게 그리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영약이 아니다. 나에게 넘겨라.”
“싫다.”
“…….”
평행선을 달리는 두 여성 사이에는 날카로운 시선이 맞부딪치며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져 갔다.
‘아, 큰일났다. 이거 어떻게 무마시키지?’
에린은 점점 무거워지다 못해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제라드와 시선을 교환하여 어떻게든 시에테와 구미호를 떨어뜨려 놓고 싶은데, 영약을 사이에 둔 두 여성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저어, 미호님. 저는 괜찮으니까 이 영약은 시에테님께 양보하고….”
“이거 놔라. 난 저 영약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구미호가 이상할 정도로 고집을 보이는 이유에는 제라드를 위함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지만, 저 영약을 양보한다면 시에테에게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시에테가 고개를 돌려 에린을 향했다.
“핏덩이.”
“네, 네…?”
느닷없이 자신을 부르자, 에린이 움찔 놀라며 시에테의 부름에 답했다.
“너는 이 영약을 누가 가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느냐?”
“그래. 애송이. 네 생각은 어떻지?”
“…….”
이 상황에서 결정권을 가지게 되자 에린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 쪽을 고르든 간에 지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나,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선택과는 차원이 틀리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어느 쪽을 골라도 최악인 건 마찬가지.
시에테와 구미호의 압박이 점점 강해지는 시선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에린은 배 속의 위가 강하게 경련을 일으킨다.
‘아…. 위가 아파. 공황장애 올 것 같아.’
아무리 기다려도 에린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죽을상을 짓자, 시에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직접 결판을 내야 할 것 같군.”
“하, 지금 나랑 한번 해보겠다는 거냐?”
구미호가 코웃음을 치며 마력을 일으켰다.
언제라도 숨겨두었던 꼬리를 드러내어 전투태세를 취하려 하자, 시에테 또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겨우살이의 손잡이를 꽉 쥐고 뽑을 준비를 했다.
“미호님! 참으셔야 합니다!”
“대, 대스승님! 여기서 싸우시면 안 돼요! 건물이…! 건물이 무너진다고요!”
하지만 두 여성은 도저히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둘 다 한 성깔을 하는 이들인 만큼 시비가 붙은 이상 자신이 먼저 꼬리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더는 영약을 두고 경쟁을 하는 수준의 싸움이 아니다.
“저, 저어…. 제발 싸움은 나가서 해주시면 안 될까요…?”
분위기에 짓눌려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던 약방 주인이 제발 나가 달라고 애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