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6화 〉 666. 가상 세계(3)
* * *
은현보다 몇 배는 커다란 크기의 바위가 깨끗한 단면으로 잘려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져 지면과 충돌하면서 생기는 작은 진동은 말 그대로 은현이 원했던 경지에 성취를 이뤄냈음을 의미하는 것.
명검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철검으로 자신보다 배는 커다란 바위를 깨끗하게 잘라내는 것은 보통 검사가 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 아니다.
심지어 마력이나 신력, 특수한 신의 무구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기술만으로 그것을 해냈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변화였다.
“이게…신검합일(???一)….”
검술에 일평생을 바치고, 그런데도 많은 검사가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
사림이 검이 되고, 동시에 검이 사람이 되는, 검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검술의 끝을 보기 위한 검사들이 도달하는 새로운 시작점.
은현은 자신의 성취를 확신하고 작게 미소지었다.
드디어 자신의 스승인 시에테가 있는 곳에 발을 들이밀 수 있게 되었다는, 쫓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그것도 본래 자신이 상정했던 것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달성했다.
은현은 본래 이 가상 세계가 유지되는데 남은 시간인 1년을 목표 시간으로 상정하고 있었고 최악의 상황으로는 이 경지를 달성하지 못하고 하계로 복귀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6개월 만에 깨우칠 수 있게 된 것은 재능이 없던 은현에게 막막했던 어둠이 가득한 곳에 밝은 빛이 드리워지는 것만 같았다.
은현은 무심코 철검을 쥐고 있던 자신의 팔을 응시했다.
덜덜 떨리는 팔에서 느껴지는 근육의 피로와 동시에, 검과 하나가 된 듯한 신비로운 감각으로 만들어진 흥분과 고양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해냈구나! 아이야!”
베르단디는 은현의 변화와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야영지에서 가만히 은현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던 차 그 기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은현에게 달려왔다.
“장하다! 정말로 장해!”
곧바로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견스러워하는 칭찬을 하는 모습이 마치 학교에서 1등 성적표를 받아온 아들을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것만 같다.
“감사합니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좀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은현은 지금 기분이 그렇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거나 자신의 노력이 커다란 성취로 결실을 보았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
꼭 끌어안은 베르단디의 스킨십에 호응하듯 여신의 허리에 팔을 둘러 꼭 끌어안았다.
“저희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벌써? 피곤하지 않으냐?”
지금은 해가 지면서 어두운 밤이 드리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늦은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본래라면 이 야심한 시간에 산길을 내려가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해가 진 밤의 기온은 싸늘했고 밤바람은 너무도 쉽게 체온을 빼앗아간다.
게다가 산짐승을 만날 수도 있으니 시야가 제한된 어두운 밤에서는 더욱 불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의 기준에서 통용되는 이야기.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고, 수많은 사선을 넘어왔던 은현에게는 그리 큰 제약이 되지 못했다.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은현은 몸이 조금 노곤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취를 이뤘다는 뿌듯함으로 마음은 고양된 상태로 평소보다 더욱 기운찼다.
“그리고 쉬는 것도 야영보다는 집에서 편안하게 이불을 덮고 자는 게 더 나으니까요.”
“으음…. 그건 나도 동의한다.”
베르단디는 작게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텐트가 있다고는 하지만, 딱딱한 바닥에서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야영을 하는 건 베르단디에게도 썩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베르단디가 이 야영을 참아내려고 노력해왔던 것은 온전히 은현을 뒷바라지하기 위함이었다.
은현이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베르단디도 굳이 이곳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가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다.”
은현과 베르단디는 빠르게 야영장을 정리했다.
처음 산에 올라왔을 때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자면, 점점 인간 여성의 몸에 익숙해져 가는 베르단디였다.
처음 산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20분도 지나지 않아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어 헉헉대던 것을 은현이 업고 올라왔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제 발로 걸어서 하산할 수 있게 되었다.
중간중간 식량과 물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하산하고 등산하기를 반복했던 것이 제법 도움이 된 모양이다.
비록 무거운 짐은 하나도 들지 않고, 은현의 손을 붙잡은 채로 도움을 받아 내려오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베르단디에게는 장족의 발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은현과 베르단디는 자정이 넘어서야 산을 완전히 내려와 영지 안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둘은 곧바로 목욕을 준비했다.
따뜻한 물을 미리 데워두고 먼지와 땀으로 더러워진 옷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이미 더한 것도 잔뜩 했던 사이였기 때문인지, 은현과 베르단디는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게 서로의 몸을 씻겨주고 욕탕에 몸을 담갔다.
“아이야….”
“네. 베르단디님.”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욕탕 안에 몸을 담그자마자 풀어지는 긴장감은 이내 다른 방향으로 둘의 감정을 이끌었다.
서로를 보며 뜨거운 눈동자를 빛내고는 그대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 ◆ ◆
욕실 안에서 몸을 겹치며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은현과 베르단디는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터는 무엇을 할 것이냐?”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요. 그냥….”
은현은 침대에 함께 누워있는 베르단디를 꼭 끌어안았다.
“이 세계가 끝날 때까지 이렇게 베르단디님하고 있고 싶습니다.”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곳에는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가 없고, 자신을 방해하는 악인이 없다.
지키고 책임져야 할 존재는 오직 베르단디뿐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책임감이 사라진 은현은 지금 아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그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베르단디는 이 가상 세계를 만든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 알았다.”
은현의 포옹에 호응하듯이, 베르단디는 은현의 머리를 꼭 끌어안으며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해도 좋다. 이곳은…오직 아이만을 위한 세상이니. 무엇부터 하고 싶으냐?”
“우선은….”
은현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운명의 보정으로 영지 안에서 가장 큰 상회의 주인인 은현의 주머니에는 돈도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6개월이라는 시간은 제법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반면 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아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야만 했다.
“베르단디님과 데이트를 하고 싶네요.”
순수한 호의와 기대가 섞인 은현의 소망을 들은 베르단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나도 기대가 되는구나.”
◆ ◆ ◆
아르미타스 공작령은 오늘도 제법 시끌벅적했다.
많은 종류의 상점들이 위치한 상가의 길거리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 북적였기 때문이다.
물걸을 납품하는 상인들이나, 관광객들, 그리고 휴식을 취하거나 질 좋은 장비를 탐색하려는 모험가들.
눈에 불을 켜고 다양한 시약이나 소재들을 찾아다니는 연금술사나 대장장이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길거리를 누볐다.
그 인파의 규모가 커다란 만큼, 종족들 또한 다양했다.
“이봐! 그 광석은 내가 찜했다고!”
“어림없는 소리! 먼저 손에 집은 자가 임자지!”
“어허, 이 친구? 양심을 망치로 깨부숴 길바닥에 버렸나!?”
“저기…. 계산 좀….”
대부분이 인간이었지만, 그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것은 사람의 허리만 한 짧은 신장을 가진 드워프들이나 가느다란 체구와 길쭉한 귀를 가진 엘프들, 짐승의 귀를 가인 수인들도 적지 않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수많은 종족이 한곳에 어우러져 있는 광경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 가득했지만, 오히려 굉장히 자연스럽기까지 하여 모순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 광경 안에 자연스레 녹아든 에린은 현재 동행한 시에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대, 대스승님….”
에린은 울상을 지으며 시에테에게 간청했다.
“저희…. 언제 돌아가나요?”
“아직 멀었다.”
“멀었다뇨!? 지금 제 양손에 걸쳐진 이 주머니들을 보세요!”
담담히 답하는 시에테의 절망스러운 이야기에 에린이 발작을 일으키듯 시에테에게 양팔을 내밀었다.
에린의 양팔에는 끈으로 매달린 주머니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간단히 훑어만 봐도 열 개가 가볍게 넘어가는 그 숫자 자체가 굉장히 심상치 않았다.
요깃거리로 산 음식, 고급술, 먹는 것만으로도 신체의 변화에 긍정적인 변화들을 가져다주는 영약들.
요깃거리로 산 간식들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억 소리가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을 자랑하는 물건들이었다.
“뭐가 문제냐.”
시에테는 에린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린이 지적하는 것은 구매한 물건들의 가격이 아닐 것이다.
지금 시에테가 하고 있는 쇼핑의 자금은 어디에든,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는 은현의 허락을 받으면서 함께 받았던 은현의 용돈이었다.
“뭐, 뭐가 문제라니…. 도대체 얼마나 더 사시려는 거예요?”
“아직 내가 원하는 걸 찾지 못했다.”
“도대체 뭘…. 하아….”
에린은 따져 물으려던 것을 꾹 참고 한숨을 내쉬었다.
은현이 베르단디를 따라 휴가를 간 다음 날.
그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시에테의 시중을 들고 있었던 에린은 찾는 것이 있다면서 이 상가의 거리를 돌아다닌 지 4시간째였다.
정작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본인도 모른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상가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맛난 노점 음식들을 군것질하여 먹고, 좋아 보이는 술이나 영약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은현의 빈자리를 자신이 대신 채우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지 4시간.
에린은 금새 후회하고 있었다.
“현아…. 보고 싶어….”
베르단디의 권유로 신계로 향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남편의 얼굴이 그리워져만 갔다.
지금의 에린은 어서 시에테에게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에린이 고개를 축 늘어뜨리면서 시에테의 뒤를 따라 천천히 길을 걷고 있을 때, 한 약방의 진열대 앞에서 시에테가 멈칫했다.
“음?”
진열대에 놓인 상품들 중 유독 특별하게 정갈한 기운을 품고 있는 약재가 시에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에테는 그것이 자신이 찾고 있던 영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도, 생김새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영약이 품고 있던 정갈하면서도 강대한 기운 때문이었다.
“주인장. 이건….”
“이거 얼마지?”
곧바로 진열대에 놓여 있던 영약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구매하려던 찰나,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들면서 목소리가 겹쳤다.
“…….”
시에테는 방해가 끼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곧바로 진열대의 영약을 사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끼어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인 여성이 시에테의 손목을 붙잡아 제지했다.
“…뭐 하자는 거지?”
“이건 평범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영약이 아니다.”
“하. 그러는 그쪽은 이걸 다룰 수 있는 존재고?”
“…….”
시에테의 비아냥을 들은 여성이 인상을 찡그리며 시에테와 시선을 맞부딪쳤다.
뒤늦게 여성의 정체를 확인한 에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성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어…. 미호야?”
은현과 일리아나의 노력으로 부활한 신수이면서 그 힘을 계승 받은 에린에게 요술(??)을 가르친 구미호였다.
“미호님! 갑자기 왜 그렇게 뛰어가신…. 어? 에린 양?”
뒤늦게 구미호의 뒤를 따라온 제라드가 시에테와 에린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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