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5화 〉 665. 가상 세계(2)
* * *
맑은 공기가 가득한 산속에서 은현은 계속해서 철검을 휘둘렀다.
한 시간에 이어서 두 시간, 네 시간을 지나 여덟 시간을 쉬지도 않은 채로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힘을 실어 휘두를 뿐인 지극히 단순한 훈련.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그 훈련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간단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좀 더. 좀 더 정확하게.’
반복하여 휘두르는 검술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두 눈으로 인식하기조차 빠른 속검이 아니었다.
검술은 물론 싸움 자체에 문외한인 베르단디의 두 눈에도 보일 정도로 느린 검술.
은현은 시에테의 가르침과 또 다른 평행세계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감각을 떠올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빠르기만 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속도와 힘, 그리고 정확도의 완벽한 조화가 갖춰지기만 한다면, 그 기술을 체득한 검사는 단 한 자루의 철검으로도 커다란 바위를 일격에 베어낼 수 있다는 시에테의 가르침.
과거의 은현은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은현이 그 가르침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시에테가 죽고 약 200년 뒤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 때였다.
나는 스승님의 검술을 완벽히 계승하고 완성할 수 없다.
시에테의 경지는 자신이 따라잡을 수 없는 아득한 경지에 위치해 있었다.
재능이 없었던 은현은 그녀의 발끝조차도 따라갈 수 없었고, 그런 그가 완벽한 조화가 갖춰진 극한의 속검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가 은현이 그 정도로 검술에 재능이 넘쳤었다면, 좀 더 발악하면서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늦췄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은현이 시에테에게서 그나마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속검의 특성과 사람의 신체를 갈라버리는 강력한 절삭력뿐이었다.
하지만 그 속도와 공격력은 시에테가 발휘하는 검술의 수준과 비교해본다면 현저히 낮았다.
하계에서는 반신(半?)으로 격을 끌어올리면서 향상된 힘을 이용하여 신체 능력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그 위력과 속도를 재현할 수 있었지만, 순수한 기술의 수준만을 놓고 본다면 은현은 아직도 자신의 검이 시에테의 검에 비하여 많이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검술로는 막강한 공격력를 갖춘 결정적인 한 방을 가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은현은 강해지기 위해서 다른 방법들을 강구해야만 했다.
브류나크에게서 창술을 배웠고, 이전에 배웠던 차한성에게서 배웠던 체술을 활용하여 다양한 싸움법들을 만들어냈다.
은현이 지구에서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검술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싸움 방식을 연구하고 갖춰나가며 다양한 활로와 수단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한계는 명확했다.
무엇 하나를 완성해 극에 달했다면 은현의 인생도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이 아니라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가상 세계는 은현에게 있어 좋은 기회였다.
시에테의 검을 다시 한번 처음부터 탐구하고 자신이 놓친 것을 다시 한번 찾아볼 수 있는 기회.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 또 다른 평행세계의 자신을 강림시켰던 감각을 가지고 있는 현재의 은현이라면.
그때는 볼 수 없어서 포기해야만 했던 시에테의 뒤를 쫓는 것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은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시에테가 그토록 바랬으면서, 또 다른 평행세계의 자신이 이룩한 경지다.
은현은 그 경지를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후우….”
바람을 가르는 철검의 묵직함이 팔을 타고 전해져 전신의 근육에 피로를 쌓는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자세로 검을 휘두른 횟수를 세는 것은 포기했다.
이미 8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횟수만 이미 만 번을 돌파했으리라.
겉보기에는 똑같은 동작의 반복일지라도, 그 행동을 하는 것에는 의미가 존재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힘을 얼마나 싣는지, 어떤 타이밍에 가속하여 휘둘러야 하는지, 사용하는 근육의 차이가, 그것을 0.01초의 단위까지 나누는 미세하고 정밀한 조정 끝에 만들어지는 최적의 기술을 찾기 위한 작업이 수천, 수만 번이고 반복되어 이루어진다.
시에테나, 리오드처럼 검술에 대하여 재능이 넘치는 검사였다면, 본인에게 맞는 이 최적의 기술을 구사하고 만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리라.
그것은 이쪽에 특화된 재능을 가진 검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영역이다.
재능이 있는 자들은 그들의 몸이 알아서 행동하여 그 최적을 향해 맞추어지고 완성된다.
하지만 재능이 없었던 은현은 그런 본능과 감각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술의 완성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 수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남들은 한 번을 휘두를 때, 은현은 백 번 천 번을.
언제나 그래왔으며 그 끝에 나름대로 답을 찾아왔다.
비록 이 가상 세계가 유지되는 시간은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은현은 자신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이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거라.”
도합 9시간을 가까이 검만을 휘둘렀던 은현을 베르단디가 제지했다.
이대로 말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몸 어디 한군데가 부서질 때까지 검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베르단디가 적절한 타이밍에 은현을 제지했다.
“…네.”
다행히도 은현은 베르단디의 제지를 받아들였다.
이미 땀으로 절어있는 옷을 벗어 던지고 근처의 계곡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텐트가 있는 야영지로 복귀하자 은현은 적당한 전신의 피로와 노곤함을 느꼈다.
“아이야. 어서 저녁을 먹고 쉬자꾸나.”
“네.”
이윽고 흘끗 나무와 나무 사이에 매달아 놓은 줄에 걸러져 있는 빨랫감들을 확인하니 어딘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베르단디가 걸어둔 빨래들이었다.
요 1년 사이에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을 말하자면, 바로 베르단디의 가사 능력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간 여성의 몸을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았고 체력도 저질이었던 여신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사 일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베르단디는 여신이었지만,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라는 말을 증명해주듯이 베르단디는 조금씩 성장했다.
아직 기초적인 요리와 빨래, 청소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지만, 온전히 수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그 행동만으로도 지금의 은현에게는 충분했다.
“아이야. 어떻느냐?”
베르단디는 천천히 스프를 떠먹는 은현을 보며 작게 긴장했다.
이미 이 산에 올라와서 몇 번이고 먹여주는 밥이었지만, 베르단디는 은현이 자신이 만든 밥을 먹을 때면 계속 긴장했다.
“맛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간이 많이 싱거운 편이었지만, 간이 센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괜찮았다.
그리고 자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가사 일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베르단디의 의욕을 꺾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저, 정말이냐? 후우….”
베르단디는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것에 작게 안도하며 한숨을 흘렸다.
이내 긴장이 풀리자 웃음이 가득해진 여신이 은현의 그릇에 스프를 더 담아주었다.
“많이 먹어라. 아이야.”
“네.”
계속해서 스프를 담아주는 베르단디의 모습에 은현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기쁨보다는 무언가 복잡한 생각이 담겨있는 쓸쓸한 웃음에 가까웠다.
계속해서 은현을 지켜봐 온 베르단디가 그 표정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이야? 왜 그러느냐?”
“그냥요. 이렇게 절 챙겨주시는 베르단디님을 보니까…. 예전 생각이 나서요.”
“예전?”
“저희 엄마 생각이요.”
평소였다면, 다른 사람이었다면 은현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만 베르단디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스프를 떠먹던 수저를 쥐었다 폈다를 생각하면서, 은현은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앞에 밥과 반찬을 푸짐하게 차려주고 자신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미 떠나 보낸지 40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지만, 은현은 정확히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즐겁고 슬픔이 공존했던 기억을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나 마찬가지다.
베르단디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은현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까지 은현이 스스로 자신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베르단디로서도, 다른 아내들도 모두 피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은현의 가족들은 모두 악마에게 몰살당했으며, 그 사건은 베르단디가 은현을 발견하게 된 사건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아이는…. 아이는 아이의 어머니가 보고 싶은 것이냐?”
“…글쎄요.”
은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단번에 보고 싶다고 답하지 않은 자기 자신의 속마음에 도리어 놀랄 정도였다.
아마 진심으로 원하고 마음을 먹는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었던 시에테조차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비록 소생시키는 것은 바라지 않아도 다시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망자의 영혼들을 관리하는 명계의 여신인 프로세르피나 또한 은현에게 어느 정도 호의를 보이고 있으니, 그 특혜를 받는다면 은현이 그의 어머니와 다시 재회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없지 않았다.
“아이가 원한다면 내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베르단디님.”
은현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얼마나 많은 특혜를 받고 있는지 잘 압니다. 이 이상 욕심을 부리는 건 사치겠죠.”
이미 은현은 베르단디나 다른 자매 여신들은 물론이고 다른 신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받았다.
사적인 부탁으로 신계의 질서나 규율을 어지럽힐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베르단디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과 부탁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반신(半?)’으로서 위업을 쌓고 정당한 격을 갖추게 되었을 때. 제가 정식으로 프로세르피나님께 직접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베르단디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이뤄내고 싶었다.
그 의지가 대견한 여신은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가…. 나도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도우마. 그러면…. 더욱 노력해야겠지.”
“네.”
베르단디가 차려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은현은 곧바로 텐트 안에 들어가 베르단디와 함께 잠을 취했다.
그렇게 검술의 수련만을 반복하고, 하산하여 물자를 보충하여 다시 산을 올라 수련을 재개하기를 반년의 시간이 지났다.
서걱
거대한 바위가 매끄럽게 잘려나가 지면으로 떨어졌다.
쿠웅!
그 바위의 무게와 단단함을 지면과 충돌하면서 생긴 거칠게 진동했다.
“드디어….”
은현은 절단되어 지면으로 떨어진 바위의 단면을 보고,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또 다른 평행세계의 자신이 빙의하면서 잔류한 감각과 경험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도달하지 못했을 경지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스승과 같은 위치에 드디어 발을 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은현은 자신의 검술이 성장했음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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