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64화 (647/730)

〈 664화 〉 664. 가상 세계(1)

* * *

은현이 베르단디와 함께 여신이 만든 허구의 세계로 들어온 지 1년의 세월이 지났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현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부쩍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해오는 베르단디와 애정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아이야? 이것은 무엇이냐?”

베르단디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은현이 자신에게 내미는 상자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퇴근하고 장을 봐왔는데, 베르단디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습니다.”

은현이 사 온 것은 기다란 베르단디의 머리를 올려 고정해줄 머리핀이었다.

집게의 형식으로 보석의 장식은 없었지만, 일반적인 평민이 사용하기엔 꽤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물가에 대한 개념이 없는 베르단디라도 이것이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 아이에게 돈이 어디 있다고….”

베르단디는 적잖게 당황하며 은현이 건네준 선물을 사양하려 했지만, 그 마음과 달리 여신의 두 손은 선물을 꼭 쥔 채로 떼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반대로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며 은현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저 이 정도는 괜찮을 정도로 벌고 있으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고맙다. 아이야.”

베르단디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되어 감동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항상 베풀어주기만을 했지,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본 적은 베르단디에게 사실상 처음이었다.

여신인 그녀에게는 하계의 물건 따위 크게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상태로 고정된 현재 상황에서는 이런 사소한 머리핀 하나가 얼마나 기쁜지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내 베르단디가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틀어 올려 선물 받은 머리핀으로 고정했다.

“어떻느냐? 잘 어울리느냐?”

“네. 아주 잘 어울리세요.”

“후후. 고맙구나.”

하지만 베르단디는 곧바로 머리핀을 뽑고 다시 기다랗고 고운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이윽고 요염하면서도 은은한 표정으로 은현을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기다려라. 금방 씻고 오마.”

“…예?”

은현은 느닷없는 베르단디의 말과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욕실로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여신을 보고, 은현이 다급히 베르단디를 말리려 했다.

“자, 잠시만요. 베르단디님.”

“음? 왜 그러느냐?”

“왜 씻으시려는 겁니까?”

베르단디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웃어 보이고 은현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후후. 아이에게 이런 근사한 선물을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나는 아이에게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

은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선물로 인해서 베르단디가 기뻐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머리핀을 사 온 것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베르단디는 처음으로 은현에게 무언가를 받아보았다는 기쁨을 느끼면서 그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물의 효과가 너무 강했다.

“그…. 그냥 감동까지만 하시면 안 될까요? 왜 뭔가를 더 하시려고….”

“…내가 씻지 않았으면 좋겠느냐?”

은현은 베르단디에게 자신의 말뜻이 전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안 씻으셔도 됩니다.”

“아이도 참…. 알았다. 아이가 바란다면 안 씻으마. 이리 오거라.”

베르단디는 요염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은현의 손을 붙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이 얘기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말뜻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그날 밤, 은현은 편하게 잠을 자지 못했다.

일을 쉬는 날에도 변함없이 그러했다.

“아이야. 오늘은 늦게까지 자는구나. 점심은 어떻게 하겠느냐?”

“오늘은…. 조금 피곤하네요. 조금 더 침대에 있고 싶습니다.”

“정말이냐? 후후.”

아무래도 그냥 편하게 하루를 쉬고 싶다는 은현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듯 보였다.

“…….”

그날 밤 또한 은현은 베르단디와 정을 나누는 것에 하루를 모조리 사용했다.

그렇게 정을 교환했던 적이 요 1년 사이 비중이 작지 않았다.

이 세계에 다른 아내들이 없다는 점이나 인간의 상태로 고정되어버린 탓인지, 베르단디는 은현의 애정을 모조리 독점했고 갈구했다.

자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이 상황을 가장 즐기고 있는 것은 베르단디일지도 모른다고 은현은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은현은 많은 일을 시도했다.

농장과 광산을 꾸준히 나가서 일하고 그렇게 번 돈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업을 시작했다.

영지 안의 상가에 점포를 내고 거기에서 다양한 상품들을 취급했다.

비록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영지였기 때문에 돈의 흐름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지만, 적지도 않았던 만큼 영지 안에서 키우는 작물과 식료품들을 꽉 쥐기 위한 자본은 충분했다.

그렇게 상권을 장악하고 점점 규모를 부풀려 작은 가게는 어느샌가 상회라고 불릴 만큼 몸집이 커졌다.

은현이 1년 만에 영지 안에서 가장 큰 상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그가 가지고 있는 사업적인 수완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이 가상 세계에서 오직 은현에게만 작용하고 있는 운명의 보정 효과 때문이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집을 샀다.

“사려고 하면 더 일찍 살 수 있었지만…. 너무 늦어졌네요. 죄송합니다.”

본래 은현의 목표는 지금보다 3개월 일찍 집을 사는 것이었다.

자신만이라면 몰라도, 베르단디를 초라한 초가집 안에서 생활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르단디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아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고 있는데, 은현을 탓할 마음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시작하는 것이냐?”

“네.”

은현은 베르단디의 물음에 진지한 표정을 띄우고 긍정했다.

이 1년의 시간 동안 은현이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이유는 베르단디를 편하게 모시고 싶은 의도도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했던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온전히 자신의 검술 수련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굳이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상회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일정의 큰돈이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니, 은현은 온전히 검술의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도 참…. 고집은 정말 완고하구나.”

베르단디는 은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지만, 이내 작게 쓴웃음을 짓는 표정은 은현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휴식 자체는 충분히 쉬었다.

그것은 육체의 휴식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 가상 세계에서 구현된 은현이나 베르단디의 육체는 어디까지나 허구에 불과한 가상의 것.

정말로 중요한 것은 멋대로 갉아 먹혀 위태로운 은현의 마음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이 1년 동안 악마(??)도, 악인(?人)도 없는 평화로운 곳에서 마음껏 휴식을 취한 은현은 남은 1년의 세월을 유용하게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은현이 자신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고른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베르단디로서는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몸을 혹사시키는 훈련을 고집하다니, 정말로 미련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현답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베르단디님. 다녀오겠습니다.”

“어디를 혼자 가려는 것이냐.”

홀로 수련을 위해서 떠나려는 은현의 목 뒷덜미를 베르단디가 붙잡아 제지했다.

“…예?”

“설마, 나를 두고 혼자 가려 했던 것이냐?”

베르단디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은현을 흘겨보았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아이는 정말…. 어떤 때는 배려심이 넘치면서도 정말 무신경하구나.”

은현은 한숨을 내쉬는 베르단디가 자신을 따라오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여신을 설득했다.

“베르단디님. 위험합니다. 제가 가려는 야산에는 들짐승이 있을지도 모르고 척박한 땅에서 야영해야 하는 생활이 이어지니 굉장히 불편할 겁니다.”

은현이 하는 말은 백번 옳았다.

게다가 1년 동안 열심히 일하여 상회를 키우고 집을 산 것은 베르단디가 이 집에서 편안히 자신을 기다려줬으면 하는 은현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고용된 사용인들이 집안을 정기적으로 청소해주고 식사를 차려줄 터이니 베르단디는 그저 이 집에서 은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베르단디는 그 호의를 거절했다.

“내가 아이를 두고 혼자 이곳에서 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베르단디에게는 편안하게 호사를 누리는 것보다, 은현과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베르단디님의 체력으로 산을 오르는 건 무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물리적인 한계를 지적해오자, 베르단디가 움찔 몸을 떨었다.

“…….”

인상을 찡그리면서 은현에게서 시선을 피했지만, 그러면서도 베르단디는 그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 은현만큼이나 고집이 세서 도저히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녀를 보고, 은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죠.”

은현은 자연스레 베르단디를 끌어안아 들었고, 베르단디도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자세를 고정했다.

처음에는 은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런 배려조차도 사양했지만, 이런 거로 쉽게 지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베르단디는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자신을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라는 여신의 어리광 섞인 태도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산행에 필요한 장비들과 적당한 철검을 허리춤에 착용하고, 은현은 아침 일찍부터 베르단디를 안은 채로 인적이 드문 험한 산길을 올랐다.

“이럴 거였으면 집 사는 게 아니었는데….”

“괜찮다. 영영 저 집을 쓰지 않을 건 아니지 않느냐.”

“뭐…. 그렇긴 하죠.”

은현은 하산하는 일정을 약 1개월 뒤로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돈은 많이 필요하고 편안한 거점을 만든 지금의 노력이 아예 쓸모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베르단디와 잡다한 잡담을 나누면서, 은현은 산길을 올랐고 인적이 드문 적당한 평지에 텐트를 설치해 야영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검술의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은현은 야영지의 간이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베르단디를 흘끗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냥 지켜보시는 거로 상관없으신가요?”

“후후. 괜찮다. 나는 원래부터 아이를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으니.”

신계에서나, 하계에 직접 내려와서도 항상 곁에서 은현을 지켜보았던 베르단디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오히려 전혀 질리지 않는다는 듯 미소지으며 답했다.

“…네.”

은현은 그렇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여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쥐고 있는 검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무작정 검을 휘두르는 것이 이번 수련의 목적이 아니다.

지금의 은현에게는 조언을 해줄 스승인 시에테도 없었으며 혼자에 불과했으나, 은현의 앞에 제시되어 있는 길은 명확히 존재했다.

그 길은 또 다른 평행세계의 은현이 만들었고 걸어갔던 길이었다.

시에테에게 검술을 배우고 800년이라는 시간의 노력 끝에, 검성이라는 칭호를 계승 받은 또 다른 평행세계의 은현이 도달했던 곳.

유피테르가 부여했던 세 번째 시련 속에서, 시에테를 뛰어넘기 위해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은현은 또 다른 평행세계에서 자신이 도달했던 미래의 일부를 자신의 육체에 강림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스승인 시에테를 뛰어넘었다.

검성의 칭호를 거머쥐었던 또 다른 자신은 스승인 시에테가 그토록 바라고 있었던 ‘검술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었던 최강의 검사였다.

‘내 목표는 그 경지야.’

스승인 시에테를 따라잡는 것이 아니다.

시에테를 뛰어넘었던 또 다른 자신을 따라잡는 것.

그것이 지금 은현의 목표였다.

강제로 또 다른 자신의 일부를 강림시켰을 때 남아있던 기억과 감각 일부를 다시 떠올렸다.

그 경험과 기억, 감각은 현재의 자신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아득한 경지에 있는 것.

은현은 마치 또 다른 자신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따라올 수 있겠나?’

800년에 걸쳐 도달한 자신의 경지를, 네가 따라올 수 있겠냐고.

몸 안에 남아있는 감각과 기억들이 자신을 도발하는 것만 같았다.

은현은 그 도발을 느끼고 웃어 보였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판단하는 시점은 이미 지났다.

지금 은현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반드시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망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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