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1화 〉 661. 장기 휴가(5)
* * *
“으하하! 기분 좋다아…!”
노을이 지고 어둑해진 저녁을, 취한 광부들이 실실 웃으며 걸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하하 호호 웃으며 노래를 부르면서 주위에 적잖은 민폐를 끼쳤다.
하지만 그런 광부들을 제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 영지는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편도 아닌 그런 무난한 규모의 영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술과 밥을 먹으며 잠에 빠지는 것은 광부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게의 손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가 지고 저녁의 시간이 다 되어서까지 활기가 넘치는 것은 어느 의미로 이 영지의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음정도, 박자도 전혀 맞지 않는 엉망진창의 노래를 흥겹게 부르고 있으면, 길거리를 걷다가 마주친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 실실거리며 그 노래에 편승했다.
“오. 자네도 오늘 좀 마셨나?”
“마셨지!”
“2차 어떻지?”
“마셔! 마셔!”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들은 광부들과 안면이 있는 것도 모자라 제법 친한 술친구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끝나기는커녕 2차의 각을 잡고 있는 광부들의 사이에 끼어서 은현은 곤란한 상황이었다.
기분이 한껏 업된 광부들은 은현이 인상을 구기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흥얼거리며 술주정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였다면 은현도 이렇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여 대놓고 인상을 구기지는 않았으리라.
몇 년간 시에테에게서 검을 배우면서 시중을 들었던 동안, 그녀의 술주정을 모두 받아주었던 경력이 어딜 갔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렸다.
“…큰일이네.”
기회를 봐서 빨리 도망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베르단디를 보러 가고 싶은데, 이 빌어먹을 양반들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은현은 지금쯤 베르단디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아마도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
“어허, 은현! 가만히 서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빨리 2차로 가자고!”
“보나 마나 또 아내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겠나?”
광부들은 은현을 보며 낄낄거리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원 참! 누구는 마누라가 없냐고!”
“우리 마누라는 집에 일찍 들어가면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냐고 도리어 화를 내던데….”
어떤 광부는 아내에게 극성인 은현을 놀리기도 했고, 어떤 광부는 새삼 저런 부부가 있을 수 있는 건지 신기함과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봐. 저 녀석은 이제 그만 보내줘.”
“예?”
“아니. 반장님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은현을 이만 보내주자는 작업반장의 말에 광부들이 자신들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냐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 달려야죠! 이대로 빠지는 건 안 됩니다!”
누가 그런 문화를 만든 건지, 은현은 그 원흉을 찾아낸다면 진심으로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아, 좀 보내줘. 내 딸 좀 집에 보내는데 혼자 보내기가 뭐해서 그래.”
“어. 그렇습니까?”
작업반장의 딸은 이 우락부락한 남성들의 무리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일과를 하면서 더러워진 광부들의 옷을 세탁하거나 시간마다 새참을 만들어주는 역할.
“흠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아버지인 작업반장보다 제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는지 굉장히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
“아이, 아빠도 참! 혼자 갈 수 있다니까!”
이제는 다 큰 성인 여성이었지만,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아버지의 말에 화가 난 작업반장의 딸이 거세게 항의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굉장히 거침이 없는 태도와 말은 우락부락한 아버지의 성향을 쏙 빼닮은 듯 보였다.
“안돼. 이 밤길이 얼마나 위험한데.”
“맞아. 아가씨! 혼자 이 밤길을 걷는 건 위험해! 이 시간에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은 다 늑대야! 차라리 저 녀석에게 안전하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라고!”
작업반장의 말에 술에 취한 다른 광부들이 옳다구나 동의했다.
은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도 남자입니다만?”
“결혼한 유부남이잖나.”
은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작업반장이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자신을 딸의 귀가를 부탁하고 맡길 정도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반장의 눈에 은현은 굉장히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남자였다.
아내와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을 하여 몸을 혹사시키는 은현의 모습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믿음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결혼도 했기 때문에 자신의 딸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들어가 있었다.
결혼의 여부를 떠나서, 은현은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일에 미쳐 있었다.
‘뭐, 소문으로는 아내도 엄청난 미인이라고 하던데.’
설마 은현이 그런 아내를 두고 자신의 딸에게 손을 대려는 천하의 쓰레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설마, 손댈 거냐?”
장난식으로 물어본 한 광부의 짧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술에 취하여 흥겨웠던 광부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바뀌어 은현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럴 리가요.”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다.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돌변한다는 것은 그들이 작업반장과 그의 딸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직장 내 동료들 사이의 정이 굉장히 끈끈하게 맺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면 데려다드리고 저도 집에 가보겠습니다.”
“그래. 딸을 잘 부탁한다.”
은현은 그렇게 작업반장의 딸을 바래다주기 위하여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미안해요…. 괜히 아저씨들이나 아빠 때문에….”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일찍 들어가고 싶었는데, 좋은 구실이 생겼죠.”
“아내분은 굉장히 행복하시겠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은현은 느닷없는 작업반장의 딸이 한 말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갑자기 어째서 베르단디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이런 잘생기고 멋진 남편분을 가지셨으니까요.”
“…그럴 리가요.”
은현은 어이가 없어 그저 쓴웃음만을 지었다.
“아무래도 모르고 계신 것 같네요?”
“뭘 말인가요?”
“은현님은 지금 이 영지 안의 농장이나 광산 쪽의 마을 처녀들 사이에서는 인기세요.”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꾸하기도 곤란한 애매한 칭찬이었다.
하지만 작업반장이 하는 말은 은현이 관심이 없을 뿐이지, 사실이었다.
퍼진 소문으로는 결혼한 아내의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게 해줄 정도로 지극히 아껴준다던가, 그리고 혼자서 하는 노동의 양과 그로 인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마인지.
게다가 그에 못지않게 잘생긴 외모는 농장과 광산 인근 마을의 처녀들에게는 인기가 있을 만했다.
항상 배가 나온 우락부락한 아저씨들만을 보다가, 건장한 체구에 남성미가 물씬 흘러넘치는 젊은 청년의 등장은 마을 처녀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렇습니까.”
“딱히 상관없다는 얼굴이시네요?”
“뭐…. 실제로 그렇네요.”
자신에 대한 소문이 이상하게 나 있다는 것을 들은 은현의 반응은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은현이 이 세계가 베르단디의 힘으로 구현된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오로지 은현에게 형편이 좋은 흐름으로 운명이 강제되는 공간.
그 강제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여 어떤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지는 은현도 알 수 없었지만, 이것도 그 효과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었을 뿐이다.
‘여자들의 호감을 사기 쉬운 게 운명의 보정 효과라니….’
은현이 품은 감상은 그냥 어처구니가 없다 정도였다.
작업반장의 딸에게는 당연하다고 당당한 반응을 보이거나, 과장된 헛소문이라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정말로 그런 소문이 나돌든 말든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만 보였다.
‘정말로 신기한 남자네.’
만약 은현에게 아내가 없었다면, 결혼한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한번 대시를 해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그런 매력을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쉬운 생각을 품으며 걷고 있을 때, 작업반장의 딸이 바닥의 돌부리에 걸려 다리가 엉키면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그녀 또한 술이 약간 들어간 탓인지, 어두운 밤길에서 다리의 균형이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은현은 가느다랗고 짧은 하이톤의 비명을 듣자마자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여 넘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괜찮으신가요?”
“아, 네. 감사해요. 저도 모르게 취해버린 탓인지….”
“…아이야?”
익숙한 목소리의 싸늘함을 감지한 은현의 몸이 멈칫하여 딱딱하게 굳어갔다.
조심스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은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베르단디님?”
두 눈을 껌뻑거리며 다시 확인해봐도, 베르단디가 맞았다.
평소였다면 자신을 마중 나와준 것에 기뻐해야 할 상황.
‘아, 큰일났다.’
은현은 본능적으로 현재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그는 자칫 잘못하여 넘어질 뻔했던 작업반장의 딸을 부축하면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황급히 작업반장의 딸에게서 손을 뗀 은현이 쏜살같이 베르단디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아이가 너무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으니까, 직접 찾으러 왔다. 그런데….”
베르단디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끼고는 은현을 흘겨보았다.
안 그래도 풍만한 가슴이 팔짱을 끼면서 모여져 더욱 강조된다.
순간 남자의 본능으로 그곳에 시선이 갔지만, 은현은 계속해서 자신을 흘겨보고 있는 여신의 시선에 움찔 몸을 떨었다.
“설마, 아이가 정말로 나를 두고 다른 여자와….”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오해에요.”
베르단디가 방금의 상황을 보고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은현은 베르단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말을 부정했다.
이윽고 작업반장의 딸이 급히 은현을 원호했다.
“이곳부터는 저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했어요.”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
작업반장의 딸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는 은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자신의 원호에 대해 최선의 답은 ‘아, 그렇습니까. 그럼 안녕히. 내일 뵙죠.’였다.
여기서 아내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것은 도리어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듯 보였다.
작업반장의 딸은 처음으로 은현이라는 남자의 단점을 알아차렸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하지만 최대한 그 생각을 표정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럼요. 저희 집은 이곳에서 가까워요. 그럼 내일 광산에서 봬요.”
작업반장의 딸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자, 어두운 밤길에는 은현과 베르단디만이 남았다.
“…….”
“…….”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 침묵에 더 무거움을 느낀 쪽은 은현이었다.
“저어, 베르단디님. 저 진짜로 다른 생각….”
“후우. 알고 있다.”
베르단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은현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쯤은 여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남편 간수를 잘하라는, 다른 아낙네들이 했었던 소리에 홀려 잠깐 은현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의 한심함을 두고 내쉰 한숨이었다.
“나도 참…. 바보였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이곳까지 혼자서 멀리 나온 건 처음이라 다리가 조금 아프구나.”
“업어드릴까요?”
“안아줘라.”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내심 즐기고 있던 베르단디는 이제는 당당하게 스킨십을 요구하고 있었다.
은현은 살짝 기분이 풀어진 베르단디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여신을 안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은현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미리 길러둔 물로 몸을 닦았다.
초가집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매일 밤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욕실에서 몸을 씻고 있을 때, 베르단디가 벌컥 문을 열고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베르단디님?”
인간의 몸에 불과한 지금의 여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상태였다.
“오늘 빨래를 하러 갔는데, 마을의 아낙네들이 그러더구나. 남편이라는 것들은 모두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르니 아내들이 잘 간수해야한다고.”
“…예?”
은현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당황했다.
“나는 지금 아이의 아내이지 않느냐? 그러니….”
베르단디의 가느다란 손이 은현의 몸을 어루만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 손길은 굉장히 끈적하고 관능적이어서, 당황한 은현이 무심코 대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오늘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그 필요성을 실감했다.”
베르단디의 부드러운 맨살이 은현의 피부와 맞닿아 겹쳐졌다.
“아무래도 아이는 내가 잘 간수해야 할 것 같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