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0화 〉 660. 장기 휴가(4)
* * *
아침이 밝아오자 농부들이 하나둘씩 농장으로 모여 오늘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매일이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상의 시작이었다.
늘 그렇듯이 밭을 갈고 작물을 심으며 아침을 맞이하고 시간은 빠르게 점심시간이 되었다.
새참으로 준비된 음식은 역시나 딱딱한 빵과 감자, 그리고 그릇에 담긴 스프였다.
정말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점심이었지만, 중소규모의 농장지대인 영주의 땅을 빌려 소작농을 하는 농부들에게는 이것이 일상이나 다름이 없는 식단이다.
한 농부가 새참으로 배급받은 딱딱한 빵을 씹으면서 주위를 흘끗 둘러보았다.
“그 청년은 또 벌써 가버린 겐가?”
“그렇지. 뭐.”
“허, 거참 신기한 청년일세. 역시 젊음이 좋긴 좋은가?”
농부들 사이에서 대화 주제로 올라온 남성은 은현이었다.
“자네는 젊었을 적에 그렇게 일할 수 있었나?”
“…없었지.”
그가 농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이유는 굉장히 다양했다.
그중 하나로 대표적인 것은 일을 잘해도 너무 잘한다는 것이다.
쟁기를 하나 쥐여주면 아침부터 점심까지 쉬지 않고 꼬박 밭을 갈아야 일을 마칠 수 있는 크기를 점심도 되지 않은 몇 시간 만에 끝내버리지를 않나.
더욱 경이로웠던 것은 거기에서 지치지도 않고 다른 일까지 도맡아 하면서 몇 사람분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의 양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몇 배나 되고 그러면서도 자신들보다도 빠르게 끝마친다.
당연히 챙겨가는 품삯의 양도 엄청날 터.
허나 농부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품삯을 받는 은현을 전혀 질투하거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 도저히 그처럼 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현의 신체 능력은 이제 농부들에게는 부러움과 존경보다는 경이로움과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듣기로는 오전에는 이쪽 밭일을 마치고 오후부터는 광산에 가서 철을 캐기로 했다던데?”
“허. 진짜로 뭐 하는 청년이지?”
농부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반응을 보였다.
원래 남자는 젊었을 때부터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이다.
저것은 성실하다거나 재능이 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보는듯한 광기가 서려 있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그 돈을 다 벌어서 어디에다가 쓴다는데?”
“듣기로는 살고 있던 마을이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서 간신히 도망쳐왔다고들 하더군. 그래서 이곳에 빨리 정착하려 집을 살 돈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지.”
은현이 보여주고 있는 행보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인지, 그와 그의 아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도 자연스레 소문으로 퍼지고 있었다.
“…대단하군.”
농부들은 은현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으며 새참을 먹었고 휴식 시간이 끝나자 다시 반복된 노동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 ◆ ◆
까앙!
철광과 곡괭이가 부딪치는 쇳소리가 광산 안을 가득 채웠다.
까앙! 까앙! 까앙!
두 귀가 먹먹해지다 못해 얼얼해질 정도의 강렬한 소음은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봐!”
은현은 계속해서 곡괭이를 휘둘러 쉴 새 없이 광물을 캤다.
마치 기계적으로 광물을 캐는 자동인형처럼, 일정한 속도와 힘을 실어 규칙적으로 곡괭이를 휘둘렀다.
은현의 주위에는 이미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광부라는 직업은 하나의 광산에 열댓 명의 조원들을 다수 투입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다른 광부들은 은현이 광물을 캐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게다가 귀를 찢어지게 만드는 이 소음을 버티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이리라.
은현은 조금이라도 빨리 광물을 캐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광물을 캤다.
그렇게 계속 광물을 캐던 도중, 은현은 또다시 더는 광물을 캘 수가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벌써 다 찼나.”
캔 광물들을 담아둔 지게에서는 미처 다 담지 못한 광물들이 흘러넘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혼자서 캐는 광물의 양은 일반적인 광부들의 양과 비교했을 때 약 세배 정도의 차이가 났다.
그것은 캔 광물을 담는 지게의 수용량이 더 빨리 찬다는 것을 의미하며, 저장고가 있는 밖까지 왕복하는 주기가 남들에 비해 굉장히 빠르다는 것을 뜻했다.
한참 집중하고 있던 차, 다시 집중력이 깨져버리자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광물이 가득한 지게를 어깨에 짊어졌다.
광산을 나가 저장소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은현은 곡괭이를 휘둘러 광물을 캐고 있던 광부들과 또 한 번 마주쳤다.
그와 같은 조에 배정되어 있던 광부들이었다.
“…또?”
“워매…. 진짜 돌았네….”
“사람 맞어?”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홀로 광물을 캐고, 지게에 가득 담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본 것만 대여섯 번이었다.
다른 광부들은 지게에 담긴 광물의 무게에 짓눌려 한두 번을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어깨에 통증을 호소하고 죽을상을 짓는데, 도대체 이 백은발의 남자는 지친 기색 한번을 보이지 않았다.
은현과 마주친 광부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보는 표정이 아닌,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일에 집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이미 할당량은 채우다 못해 차고 넘칠 정도다.
추가 수당이 꽤 적지 않은 금액이라 평소보다 힘을 좀 쓴 탓인지, 은현은 예상외로 몸에 노곤함을 느꼈다.
“고생했다!”
광산에서 광부들을 관리하는 작업반장이 저장소에 쌓인 엄청난 양의 철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꽉꽉 눌러 담은 철광석의 양을 보니 작업반장은 실실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노가다에 특화된 일꾼이 왔는지 완전 복덩이가 따로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은현에게 말을 걸었다.
“은현! 이후에 뭐하나!? 끝나고 한잔하고 가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호탕한 웃음을 짓는 작업반장의 권유도 벌써 네 번째였다.
할당량을 채우면서 하루 일과를 마친 광부들은 일제히 주점으로 가서 술과 음식으로 노곤한 몸의 피로를 풀고 위로하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은현은 당연하게도 이 회식 자리에 참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집에 아내가 기다려서….”
광부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 작업반장의 권유도 네 번이었던 것과 동시에, 은현이 그의 권유를 매번 똑같은 이유로 거절한 것도 네 번이었다.
“어허! 자네의 아내도 하루쯤이면 이해해주겠지! 오늘은 빼지 말고 따라오게!”
아무래도 은현은 작업반장의 마음에 들어도 너무 쏙 들어가 버린 마음이었다.
“…….”
무력하게 목덜미를 붙잡힌 은현은 고민했다.
거절하려 한다면 강하게 거절할 수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고 호의를 보이는 권유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비록 이곳이 여신의 힘으로 구현된 가상 세계일지라도, 눈앞의 이 세계와 세계의 구성원들을 가짜라고 치부하고 연결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매정한 인간도 아니다.
은현은 자신에게 보이는 작업반장의 호의와 감정들을 가짜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하! 그래야지!”
은현은 어쩔 수 없이 작업반장의 회식 권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 권유를 거절했던 은현이 마침내 승낙의 의사를 밝히자, 작업반장의 얼굴이 더더욱 밝아졌다.
“대신 일찍 보내주십시오. 갑자기 집에 너무 늦게 들어가게 되면 아내가 걱정할 겁니다.”
“나 원 참. 알았다! 알았어! 누구는 마누라가 없나!”
작게 투덜거리는 작업반장은 그렇게 서운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은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의 초가집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집에 혼자 있을 베르단디가 혼자서 저녁을 잘 챙겨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 가상 세계에서 생활하게 된 지 약 1주일의 시간이 지났지만, 인간의 몸이 익숙지 않은 베르단디는 아직 혼자서 저녁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나마 가사 일을 배우면서 빨래나 청소를 혼자서 해보기 시작한 정도.
‘…눈치 좀 보다가 적당히 먹고 빠져서 집에 가야지.’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하나둘씩 나오는 광부들과 함께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 ◆ ◆
해가 지고 저녁 시간대가 한참 지났다.
어둑해진 집안을 밝히는 것은 등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촛불 하나가 전부.
베르단디는 아직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구나.”
아무리 늦더라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와 자신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었던 은현이, 오늘은 해가 진지 한참이 지나 잘 시간이 되었음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이가 이렇게 늦게 들어왔던 적이 없었는데…. 차라리 찾으러 갈 수만 있다면…. 하아….”
이곳이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자신이 인간의 몸이라는 제약이 아니라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영체화의 상태로 은현의 위치를 추적하여 상황을 살피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베르단디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역시 제약을 너무 크게 걸어버린 것인가….”
불행한 사건 사고는 일절 일어나지 않도록, 운명의 흐름이 보정되도록 강제한 여파.
이 가상 세계를 구현한 베르단디는 현재 그 페널티를 고스란히 받는 상태였다.
베르단디는 상황이 이렇게 되어보니 살짝 후회하고 있었다.
은현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이 상황은 몹시 외롭고 그립다.
그것은 인간이 되어버린 베르단디의 몸이 그리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여신의 마음 자체가 그것을 느끼는 것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두워진 시간대에 밖으로 나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에는 몹시 답답한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베르단디의 머릿속에 낮에 함께 빨래했던 아낙네들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뭐? 그 집 남편이 바람을?
그렇대도. 최근 들어서 집에 늦게 들어오는가 싶더니. 술집 여자랑 바람이 났었데. 결국, 그 인간 죽도록 얻어터졌다나 봐.
권태기가 찾아온 한 가정집에서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술에 취해 떡이 돼서 집에 들어온 남편이 웬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이름을 언급하며 술주정을 부렸던 것이 화근.
아내는 이상함을 느끼고 수소문을 해본 결과, 자신의 남편이 술집 여자와 물고 빠는 저속한 관계로 전락하여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결말은 뻔했다.
바람난 남편이 아내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면서 두 손을 싹싹 빌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빌었다는 것을 끝으로 아낙네들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아가씨도 남편 간수 잘해. 남자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까.
아, 아이는…. 내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진심 어린 아낙네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베르단디는 그 조언을 자세히 귀담아듣지 않았다.
설마 이 세계에서 은현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라리 이곳이 가상 세계가 아닌 하계의 현실이며, 은현의 곁에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릴리나 에린이 곁에 있었다면.
베르단디는 이 정도로 불안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가 진 늦은 시간까지 은현이 돌아오지 않고 있자 베르단디의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망상이 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이는 그런 나쁜 아이가 아니다…!”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초가집에서 홀로 소리친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빨래하는 동안, 자신에게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은 아낙네들에게 한 말이었을 수도 있고, 불안한 의심의 싹을 틔운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을 수도 있다.
“아, 안 되겠다. 아이를, 아이를 찾으러 나가야겠다.”
결국, 참지 못한 베르단디는 몸에 담요를 두르고 집을 나왔다.
쌀쌀한 밤바람을 직접 맞자, 베르단디가 몸을 살짝 떨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