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9화 〉 659. 장기 휴가(3)
* * *
“…흐윽.”
“아, 아니…. 울지 마쇼! 괜히 내가 미안해지잖수!”
큰 충격적인 말을 들은 베르단디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음을 참아내자 농부가 횡설수설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했다.
그야 다 큰 처자가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농사일 20년의 경력상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내면서도 훌쩍이고 있는 한심한 모습일진대, 그 외모가 아주 아름다워서인지 순간 마음이 혹했다.
농부가 자신도 모르게 베르단디를 위로하기 위하여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
“무슨 일인가요?”
백은발의 남자, 은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댁은 뉘쇼?”
“이 사람의 남편입니다.”
은현은 싱긋 웃어 보이며 베르단디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힘을 실어 자신 쪽으로 당겨오자, 훌쩍이고 있던 베르단디의 몸이 자연스레 은현 쪽으로 끌어 당겨져 안겼다.
“아, 아이야…?”
느닷없이 은현이 등장하자 베르단디는 적잖게 당황했다.
게다가 남편이라니.
갑자기 자신의 관계를 부부라고 소개하는 돌발 행동에 베르단디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이미 부부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그 이상도 다 해왔던 사이이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해오니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이런…. 남편이 있으셨군. 이거 실례했수다.”
농부는 하마터면 남편이 있는 유부녀의 몸을 만질 뻔했다는 것에 식은땀을 흘렸다.
비록 위로를 위해서 어깨를 토닥여줄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은현은 진심으로 멋쩍어하는 농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것보다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니. 제 아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아, 아이야!?”
베르단디는 자신이 첫날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 농부와의 대화를 은현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뒤늦게 몰려와 얼굴이 새빨개졌다.
은현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자세한 사정을 들어야 했던 은현은 농부를 계속 쳐다보면서 그가 사정을 설명하기를 계속 기다렸다.
농부는 슬쩍 은현의 품에 안겨있는 베르단디의 표정을 쓱 살펴봤다.
“……!”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로 젓는 베르단디의 행동에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깔려있었다.
“…하아.”
이걸 말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계속 고민한 농부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댁의 아내가 뭔가를 딱히 잘못한 건 없수다. 그냥 밭일을 너무 못했을 뿐이지.”
“제 아내가 이번에 밭일을 해보는 게 처음이라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다른 일을 권유할 정도였습니까?”
“그야 뭐 심각할 정도였지.”
농부는 베르단디의 눈치를 보는 것이 어색해하면서도 즉답했다.
원래 농사일은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하는 고된 일이다.
그만큼 소모되는 체력의 양도 적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일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성실하고 노력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그게 20분을 버티지를 못하니….”
베르단디는 허약한 신체 능력을 가진 탓에 농사일에 적합하지 않았다.
“몸을 쓰는 농사일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추천을 드린 거요. 그리고…. 우리도 우리 일이 있는 거니깐.”
누군가가 제한된 시간 안에 할당된 일을 모두 마치지 못한다면, 그 일을 모두 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들이다.
효율의 문제에서도 베르단디는 여러모로 농사일에 적합하지 않았다.
해고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적성에 맞는 다른 일을 해보라는 농부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나자 베르단디가 창피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
농부는 어째서 자신이 새로 들어온 이 부부의 눈치를 보면서 이런 해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없이 진지한 은현의 얼굴에서 강한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후우…. 그런 이야기였군요.”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 아내에게 할당된 분의 일. 계속 유지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건 좀 힘들겠는데.”
은현의 부탁을 들은 농부가 난색을 보였다.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한 것에 대하여 미안한 감정을 품고는 있었지만, 일적으로는 베르단디에게 계속 일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은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무리하게 제 아내에게 일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내일부터는 제가 나오겠습니다.”
“…댁이?”
농부는 의외라는 듯이 은현을 쳐다보았고 곧바로 그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흙과 먼지로 뒤덮여 더럽혀져 있는 작업복은 그 또한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뜻.
이윽고 농부가 인상을 찡그리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힘들 텐데.”
본인에게 할당된 하루 치의 일과 이외에도 베르단디에게 할당된 일과도 함께 처리하겠다는 건, 혼자서 두 명분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과는 계산 자체가 다르다.
노동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람의 몸은 쉽게 지치고 피로가 쌓이며 망가지기 쉽다.
게다가 은현의 외관은 체격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힘을 잘 쓰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아니다.
아무리 건장해 보이는 젊은 남자라도 쉽지 않을진대 두 명분의 농사일을 은현이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럭저럭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농부의 경험상, 이런 남자는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그냥 아내에게 강인하고 자신의 건장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허영심이 가득한 어리석은 경우.
또는 그 정도로 절박해서 스스로 몸을 망치려는 경우.
아니면 진짜로 살인적인 업무량을 소화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냥 미친놈이다.
“일단은 하루만 더 지켜보고 판단해주시죠. 그 이후에 결정을 내려주셔도 괜찮습니다.”
은현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냥 미친놈인가.’
농부는 호언장담하는 은현을 유심히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뵙겠수다.”
그렇게 농기구를 들고 은현과 베르단디에게서 등을 돌린 농부는 본인의 집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농부가 떠나자 은현과 베르단디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밭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추태를 낱낱이 까발려졌다는 사실에 베르단디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저희도 이제 그만 갈까요?”
“…그래.”
베르단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순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는지 베르단디가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은현이 베르단디의 허리를 붙잡아 단단히 고정하지 않았다면 분명 넘어졌으리라.
“괜찮으세요?”
“괘, 괜찮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베르단디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약한 저질 체력이 모두 소진되어버렸다는 것을 간파한 은현이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아….”
“그러니까 굳이 일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베르단디에게 말했다.
사실 은현은 밭일을 나가기 전 아침에, 베르단디에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신을 설득했었다.
인간의 육체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몸을 쓰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베르단디는 한사코 자신도 일을 하면서 도움이 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밭일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
베르단디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은현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창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거기에 자신을 위로해주기는커녕 부채질해대는 은현의 말에 토라져 버린 것이다.
처음 보는 여신의 태도가 제법 사랑스러우면서도 재미있었지만, 은현은 빨리 베르단디의 기분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도리어 자신이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난민에 불과한 신분이었지만 형편이 좋게도 비어있는 초가집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아마도 베르단디가 강제한 운명의 흐름이 형편 좋게 흘러간 결과라고 은현은 짐작했다.
베르단디를 안아 들고 초가집에 도착한 은현은 곧바로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여신의 다리를 주무르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마사지를 시작했다.
“응….”
다리를 적당히 지압해주는 손의 힘이 제법 기분이 좋았는지, 베르단디가 교성을 흘렸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미리 길러온 물을 담은 통을 가져왔고 거기에 베르단디의 퉁퉁 부어오른 발을 담갔다.
몸을 쓰는 일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가녀린 발을 씻겨내고 정성스레 지압하며 마사지를 이어나가자, 베르단디가 몸을 움찔 떨었다.
“흐으….”
“기분 좋으세요?”
“좋…구나.”
베르단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미안하다. 나는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구나.”
“도움이 안 되다뇨.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은현에게 휴식을 취하게 해주기 위하여 막대한 신력을 소모하면서 이 세계를 구현시켰건만, 정작 은현을 쉬지 못하고 귀찮게 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에, 베르단디가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은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는 마음에 들어요. 이 세계.”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이곳은 평화롭다.
인간들을 잡아먹는 악마라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부정부패의 비리를 저지르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덕 영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은 중소규모 영지의 농장지대에서는 많은 영지민들이 힘을 합하여 서로를 돕고 있었고 제법 화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불합리한 일로 사람의 생명이 짓밟히고 사라지는, 재앙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계.
이곳에서 은현은 짊어져야 할 사명도, 책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살면서 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베르단디님.”
“…….”
진심으로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은현의 얼굴을 보고, 베르단디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 얼굴과 표정을 보기 위해서 한 일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뿌듯함을 느꼈다.
“아이가 기뻐해 주니…. 나도 좋구나.”
은현은 계속해서 베르단디의 가녀린 발과 다리를 지압하면서 씼겼다.
킥킥대면서 간지럽다고 호소하는 그녀의 작은 투정을 받아넘기면서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밤을 보냈다.
◆ ◆ ◆
다음 날 아침.
은현은 동이 트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옷을 갈아입던 차, 기척을 느낀 베르단디가 눈을 비비며 은현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야. 벌써부터 나가려는 것이냐?”
“네. 잠자리는 좀 괜찮았나요?”
비어있는 초가집을 받기는 했지만, 내부의 가구는 이렇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은현과 베르단디가 함께 잠을 잤던 이부자리조차도 볏짚을 가득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둔 것에 불과한 것으로 현실의 집과 비교를 해보면 굉장히 열악했지만, 이것이 이 세계의 평범한 수준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후후, 나는 괜찮다.”
베르단디는 작게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직 어제의 밭일로 몸의 피로와 근육통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 움직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점심에는 잠깐 돌아올게요.”
“미안하구나…. 나의 일까지 아이에게 떠넘겨버리게 되었으니….”
“괜찮다니깐요.”
은현은 작게 웃으며 초가집을 나왔다.
“자, 그럼….”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은현은 앞으로의 계획들을 세웠다.
‘베르단디님은 이 세계가 약 2년 정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셨지.’
기왕 얻게 된 휴가의 기간은 정말로 예상외로 길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은현의 역량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
은현의 계획 중 가장 굵은 줄기를 가진 것은 총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검술의 연마.
그리고 두 번째는 베르단디와 최대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일단은 돈부터 모으고 보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