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8화 〉 658. 장기 휴가(2)
* * *
베르단디는 자신이 구현한 가상세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 신의 힘으로 구현된 가상세계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지고는 한다.
어떤 신에게는 더욱 강력한 신위를 갖추기 위한 시련을 위해서.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신에게는 단순히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
그 이외에도 각자가 자신만의 다양한 이유와 목표를 가지고 가상세계를 구현하고는 한다.
실제로 은현 또한 유피테르에게서 반신(半?)으로서 신격을 갖추기 위해 뛰어넘지 못했던 과거의 업을 재현한 가상세계에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신격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존재 격을 더욱 높은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행했던 시련의 일종이었다면.
지금 베르단디가 구현해내어 은현을 데려온 이 가상세계는 단순한 유희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은 평화롭다.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은현은 어째서 그런 인과 관계가 존재하는 세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졌다.
그것을 물어보자 베르단디가 웃으며 답했다.
“내가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답은 굉장히 간단했다.
이 세계를 구현해낸 여신이 그것을 바랬고, 그러한 인과 관계가 일어나지 않도록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놀란 표정을 지은 은현은 새삼 베르단디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여신이라는 것을 재차 실감했다.
“후후.”
존경과 놀람이 섞여 있는 은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베르단디는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나 정말 대단하지?’라는 것을 표정으로 다 드러나고 있는 게 여신답지 않으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어째서 베르단디가 그런 설정을 이 가상세계에 부여했는지, 은현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날 배려해주신 건가.’
적어도 휴식의 시간을 가지는 이곳에서만큼은 분쟁이나 갈등에 엮이지 않고 편하게 휴식을 취했으면 하는 여신의 배려가 느껴졌다.
은현은 그 배려를 깨닫고 쓰게 웃으며 속으로 자조했다.
옆에서 보기에 자신의 마음 상태는 그 정도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베르단디님이 지금 인간의 상태로 머물러 계신 것과 관계가 있나요?”
“그건….”
베르단디는 핵심을 찔린 듯 살짝 몸을 떨었다.
조금 전 복부에서 적나라하게 꼬르륵 소리가 들렸던 걸 상기시키고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은현의 물음에 답했다.
“이 가상세계의 규율을 너무 강하게 적용시키는 바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신력을 모두 사용해버렸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나의 힘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
악(?)의 인과 관계를 아예 없애버리는 규율을 강제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소비하는 듯했다.
그야 그럴 것이다.
특정 운명의 흐름을 아예 틀어막아 버리고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강제하는 것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흐음.”
은현은 혹시나 싶은 생각에 내부의 힘을 끌어올려 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의 출력이 올라오지 않았다.
‘마력이나 신력의 양이 급격히 줄었어.’
그것은 이 가상세계에 베르단디가 적용한 규율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은현은 추측했다.
악(?)의 인과 관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도록 설정된 것이 어떠한 작용으로 이렇게 된 것인지 원리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원인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애매하지만, 은현의 감이나 본능이 강한 확신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경우마다 틀리구나.’
은현은 이전에 유피테르가 자신에게 부여했던 세 가지의 시련과 이 세계를 비교해보았다.
그 세 가지의 시련들은 모두 은현의 경험들을 기반으로 재현된 과거의 업(?).
거기에는 강제되었던 규율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이 상황은 오직 은현에게만 유리한 흐름을 강제하기 위해서 베르단디가 무리하게 힘을 사용한 결과.
지금의 베르단디는 여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다.
“…그거 괜찮으신 거 맞나요?”
은현은 베르단디의 상태가 걱정되어 물었지만, 베르단디는 그의 걱정이 기쁜지 웃어 보이며 물음에 답했다.
“후후. 괜찮다. 일시적으로 무리하게 신력을 사용한 것뿐이니. 조만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이 세계는 언제까지 있을 수 있는 건가요?”
“아이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나갈 수는 있지만, 하계의 시간 흐름이라는 걸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아마 2년 정도의 시간은 유지할 수 있다. 혹시…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조심스레 묻는 베르단디의 물음에는 약간의 긴장이 서려 있었다.
베르단디는 자신이 정말로 싫다면 강제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애써 공을 들여 만든 이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여신은 내색하지 않아도 서운해할 것이 틀림없다.
은현은 작게 웃으며 베르단디를 꼭 끌어안았다.
“아뇨. 좋아서 그래요.”
“아….”
상냥하게 끌어안으며 상체를 밀착시키자 풍만한 가슴의 너머에 있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직접 느껴보니 새삼 자신이 모시는 여신이 정말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렇게 베르단디님과 단둘이 있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잖아요.”
“아이와 단둘이…. 후후. 그렇지.”
베르단디도 기쁜 웃음을 지으며 은현을 꼭 끌어안았다.
“이곳은 어떤 갈등이나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계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흘러가지. 그러니 아이는 이곳에서 편안하게 푹 쉬다가 하계로 복귀하면 된다.”
“그렇군요.”
베르단디의 설명을 들은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차,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계와 다른 독립된 시간으로 흐르는 이 공간이라면, 어쩌면 검술의 수련에 더욱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아.”
이제는 은현의 얼굴만 봐도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베르단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와서도 수련을 할 생각인 것이냐?”
살짝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 베르단디의 시선을 절대로 곱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라고 이 세계를 만들어주었는데 이곳에서도 수련하려는 그의 생각이 기가 막혔다.
그리고 함께하고 있는 자신을 두고도 혼자서 검술을 연마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 눈총을 받은 은현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요. 그냥 드는 생각이에요.”
꼬르륵
이윽고 또다시 베르단디의 복부가 눈치 없게 공복의 알람을 울렸다.
“아, 아이야. 이건 그게….”
“괜찮아요. 저도 마침 배가 고팠으니까요.”
지금의 베르단디는 평범한 인간 여성의 육체나 마찬가지.
이 세계는 여신의 힘으로 구현된 허구의 세계였지만, 기본적인 베이스는 은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하계를 기반으로 재현된 곳.
인간의 육체로는 그에 맞는 섭리가 강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엔 그녀 또한 이 가상세계에서는 음식을 먹고 숙면을 취하며 인간에게 맞는 생활 패턴을 몸에 익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은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베르단디를 배려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은현은 베르단디와 함께 이동을 시작했다.
현재 가장 급한 문제는 당장 배를 채우기 위한 식량과 잠자리, 그리고 베르단디의 체력이다.
“하아, 하아, 하아….”
약 20분 정도.
걷기 편한 들판의 초원을 그리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베르단디는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한계를 맞이했다.
아무리 하계에 직접 인간 여성의 육체를 만들어 현현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활동해온 적이 없었던 베르단디는 인간의 육체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다.
순수한 체력만 따지고 본다면, 베르단디는 은현의 아내들 중 가장 허약한 체력을 가진 일리아나보다 더욱 저질 체력을 가졌다.
먼저 앞장을 서서 베르단디의 보폭에 맞춰 걷고 있었던 은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던 베르단디를 안아 들어 올렸다.
“아, 아이야. 괜찮다. 걸을 수….”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은현은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올려 자신의 신체를 강화했다.
비록 규율을 강제당하여 약해지기는 했어도, 마력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체력에 자신이 있었던 것도 있고 베르단디 한 명을 안고 걷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빨리 식량과 잠자리를 찾아야 하는 이 상황에서는 베르단디를 안고 자신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걷기를 약 1시간 정도가 지났다.
들판의 초원을 지나면서 나타난 숲길은 점점 험해져 갔지만, 은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풀이 무성한 숲길을 헤치며 전진했다.
“아이야…. 힘들지 않으냐? 조금 쉬었다가 가는 게….”
“혹시 계속 안겨 있으신 게 불편하신가요?”
“나, 나는 괜찮다.”
베르단디가 은현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상체를 강하게 밀착시켰다.
여신의 풍만한 가슴이 상체에 맞닿는 감촉에 은현이 순간 발걸음을 멈칫했다.
“…….”
“왜 그러느냐?”
“아뇨. 아무것도.”
아무래도 은현이 모시고 있는 여신께서는 그녀의 가슴이 얼마나 위험한 공격력을 가졌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현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천천히 숲을 헤치고 걸어 나갔다.
그렇게 숲길을 헤치고 나온 지 약 1시간이 더 지나서야, 은현과 베르단디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영지를 발견했다.
영지의 크기는 그렇게 작지 않았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중소규모의 영지였다.
“베르단디님.”
“알았다. 여기서부턴 내가 직접 걸으마.”
은현은 품에 안아 들고 있던 베르단디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여신의 한쪽 손을 잡고, 여신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영지의 성문 앞까지 걸어갔다.
마침내 성문 앞까지 도달한 은현과 베르단디는 경비를 서고 있던 위병들에게 검문을 받았다.
짐가방 하나도 짊어지지 않고 맨몸으로 걸어오는 두 남녀의 행색은 위병들의 입장에서는 기묘했다.
위병들은 은현과 베르단디의 행색을 한번 훑어보고는 물었다.
“여행객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누구쇼?”
“…….”
베르단디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면서 은현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성문을 향해 걸어올 때부터 흐린 낯빛으로 연기를 하고 있던 은현이 위병의 질문에 답했다.
“살고 있던 마을이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래서…미처 재산이나 짐을 챙겨올 여유가 없었죠.”
피로가 가득한 표정을 연기하면서 음울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늘어놓는 은현은 속으로 이것이 과연 통할지 반신반의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너무 허술한 거짓말이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이나 재산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신력의 힘조차 사용을 제한당했으니 쓸 수 있는 수단이 적어도 너무 적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외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저런….”
“어서 들어가쇼. 그런 안타까운 사연이.”
“…….”
위병들은 이 허술한 거짓말을 의심하지 않고 은현과 베르단디를 영지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은현은 흘끗 베르단디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냥 저 위병들이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악’의 인과 관계가 제거된 운명의 흐름이 보정해준 효과 덕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은현의 시선을 눈치챈 베르단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위병소에서 하룻밤을 보내쇼. 간단하게 끼니를 채울 빵과 스프라도 갖다 드리리라.”
이런 허술한 거짓말이 통용되는 것은 역시나 은현의 예상대로 운명의 흐름이 보정 효과를 가져오면서 은현에게 형편 좋은 전개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은현과 베르단디는 위병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바닥은 딱딱하고 불편했지만, 적어도 쌀쌀한 밤바람을 피하고 담요를 덮고 잘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다음날 은현과 베르단디는 위병들의 소개를 받아 간단한 일거리를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영지 안에 있는 대규모의 농장지대에서 농사일을 돕는 일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집까지 제공 받았다.
비록 평민 중에서도 하층민에 속하는 이들이 사는 허름한 초가집에 불과했지만, 은현과 베르단디에게는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니 정말로 형편이 좋은 전개나 다름이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이 편해지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들은 은현과 베르단디를 반겼다.
하지만 아무리 형편 좋은 전개의 연속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는 존재했다.
“후우….”
“수고했소. 형씨!”
농사일을 시작한 첫날, 할당된 하루 치의 밭일을 모두 마친 은현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다른 농부들과 인사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젊은이가 싹싹하고 일도 잘하니 아주 좋구만!”
이 농장에서 가장 고참 격에 해당하는 농부가 호탕하게 웃으며 은현을 칭찬했다.
평소에도 단련을 꾸준히 했으니 체력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뛰어났고, 미약하지만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기까지 했으니 밭을 가는 일쯤은 은현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일 또 봅세! 형씨!”
“예. 내일 뵙겠습니다.”
은현은 웃으면서 다른 농부들과 인사를 마쳤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밭에서 일하고 있을 베르단디를 데리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베르단디를 발견한 은현이 반갑게 자신의 여신을 부르려 할 때.
은현은 베르단디와 다른 농부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베르단디에게 하는 농부의 말이 은현의 귀에도 들렸다.
“그…. 아가씨는 다른 일을 알아보쇼. 밭일에는 영 소질이 없구려.”
“…….”
베르단디는 농사일을 시작한 첫날부터 잘렸다.
아무리 운명의 보정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베르단디의 저질 체력만큼은 보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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