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7화 〉 657. 장기 휴가(1)
* * *
드워프 대장간의 연구실에서 간단한 성과 보고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회의를 마치자, 시간은 어느새 해가 진 저녁이 되어 있었다.
은현은 곧바로 아르미타스 공작 저택을 향했다.
“오셨습니까.”
저택의 앞에 오자마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은현에게 깍듯이 경례를 해왔다.
이제는 완전히 아르미타스령의 영주나 다름이 없는 엘레노아의 남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은현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들어가십시오.”
병사들은 곧바로 문을 열어주며 내부로 향하는 길을 터주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경비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 한차례 인사를 건넨 은현은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은현의 존재를 느끼고 먼저 저택의 1층 홀로 마중 나온 것은 릴리와 에린이었다.
“점심은 제대로 챙겨 드셨나요?”
“응. 맛있었어. 고마워.”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빈 바구니를 릴리에게 건넸다.
담아주었던 샌드위치를 모두 먹었다는 것을 확인한 릴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기뻐요.”
“가자. 현아! 일리아나님이랑 엘레노아님이 기다리셔!”
은현의 손을 붙잡고 빨리 가자고 이끄는 에린의 행동이 굉장히 급해 보였다.
마치 굉장히 들뜬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에 릴리가 작게 웃으며 에린에게 주의를 줬다.
“에린. 여기는 집이 아니니까, 그렇게 복도에서 뛰면 안 되지.”
이곳은 귀족 가문의 저택이며 저택 안에서 일을 하는 하인들의 숫자만 백 명이 넘는다.
경거망동하게 구는 행동은 공작 가문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엘레노아나 은현의 평판에 흠집을 내는 행동.
활발한 성격이 에린의 매력 중 하나이며 그 모습이 제법 좋아하기 때문에 예법과 품위를 중시하는 엘레노아도 집에서는 그녀에게 주의를 주지는 않는다.
보는 눈도 없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다녀도 그저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이곳은 그럴 수 없는 곳이었다.
“아, 그렇지.”
뒤늦게 그 차이를 자각한 에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단정한 발걸음을 유지하며 걸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음이 급해 보이는 것이 다 티가 났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은현과 릴리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는 에린의 뒤를 따랐다.
“그래. 가자.”
은현은 두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공작 저택 안을 걸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저택 안에서 일하는 하인이 하나둘씩 인사를 해왔다.
알렉스가 현재 왕가에서 여왕이 된 유리아의 호위 임무를 전담하게 되면서, 부모인 아브로스와 르네스를 제외한다면 이 공작 저택 안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은 엘레노아다.
그런 그녀의 남편이 은현이니, 깍듯이 대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방안에서는 이미 저녁 식사가 테이블에 차려져 있었다.
식당에서 먹지 않고 이렇게 일리아나를 위해 마련된 방에 전용 테이블을 마련해 준 것은 거동이 불편한 그녀를 배려하기 위한 엘레노아의 생각일 것이다.
“왔어?”
일리아나가 은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응. 아직 안 먹고 있었어?”
“너 기다리고 있었지.”
릴리에게서 저녁 시간에 맞추어 은현이 오리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인지, 일리아나를 비롯한 아내들은 모두 은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맛있는 저녁을 먹는 걸 아주 좋아하는 에린이 군침을 흘리면서도 꾹 참고 있었던 건 자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다.
“주인님. 자리에 앉아주세요.”
“고마워.”
릴리가 정성스레 의자를 빼주어 은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은현이 자리에 앉고 다른 아내들도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개시했다.
“몸은 좀 어때?”
“글쎄. 그냥 평소랑 비슷하네. 좀 배가 무거운 것만 빼면 그렇게 힘들지도 않아. 오히려 꽤 즐거워.”
“즐거워?”
“응. 가끔가다가 아기가 내 배를 차는 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
처음에는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었지만, 막상 익숙해지고 보니 이제는 오히려 기대되었다.
배 속의 아기가 발길질을 할 정도로 건강하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아빠를 닮은 잘생기고 건강한 아들이 태어날지, 아니면 누굴 닮았는지 모를 말괄량이 같은 딸이 태어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고 있었다.
자신이 육아를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아기를 만나보고 싶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런 것 같아.”
출산일은 점점 더 가까워져 가고 있다.
다가올 그 날을 기대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아내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는 제법 즐거웠다.
이런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현아.”
저녁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가지는 동안, 일리아나가 은현을 불렀다.
“응?”
“좀 쉴래?”
“뭐?”
은현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느닷없는 권유는 너무도 뜬금이 없어서, 맥락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했잖아. 이번에 좀 쉬어.”
“나 이번에 쉬고 왔잖아.”
에린과 함께 티르니스령에서 약 이틀간 휴식을 취하다가 왔는데, 또 쉬라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야. 이틀만으로는 부족해. 한 몇 년은 쉬다가 와.”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말도 안 되는 권유다.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라고 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하계는 은현이 쉬는 것을 도저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숨어 있는 악마들이 모략을 펼치며 하계와 마계를 잇는 통로를 열어젖히려고 수를 모색하고 있고, 하계의 인간들을 모조리 몰살시키기 위해서 전 동료였던 레이넌이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평행 세계의 차원에서 넘어왔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일리아나의 끔찍한 흔적들이 계속해서 보이는데, 자신이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괜찮아. 방법은 이미 다 생각해두신 것 같으니까.”
“…뭐?”
그 말투는 마치 은현에게 휴식을 취하게 해주기 위해서 마련한 어떤 ‘방법’이 일리아나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니라는 듯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를 마친 테이블에 한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계에 육체를 현현 시킨 베르단디였다.
“…베르단디님?”
무언가 준비할 것이 있다면서 신계로 올라가면서 한 사흘 동안 소식이 뜸했던 베르단디가 어째서 이 타이밍에 나타나는 것인지, 은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흘끗 베르단디를 바라본 일리아나가 웃으며 여신에게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베르단디님.”
“알았다. 마녀 아이에게는 항상 감사하게 되는구나. 이해해줘서 정말로 고맙다.”
“아니에요. 현이를 위한 일인걸요.”
“…….”
도대체 여신과 마녀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간 것인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은현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윽고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엘레노아나 릴리, 에린에게로 시선을 옮겨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다른 아내들도 그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푹 쉬다가 와! 현아!”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설명은 나주에 해주마. 아이야. 가자.]
은현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베르단디가 은현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이윽고 몸이 나른해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저항할 수도 없는 그 감각은 몹시 익숙했다.
은현은 그것이 육체에 결속되어 있던 영혼이 이탈하면서 베르단디에게 이끌려 신계로 향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각이라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그렇게 은현은 의식을 잃었다.
◆ ◆ ◆
산뜻한 바람이 피부를 간질이면서 정신을 잃었던 은현의 의식이 수면 위로 떠 오르듯 천천히 각성했다.
은현은 누워있는 자신의 머리가 부드러운 무언가에 받쳐져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무거운 눈꺼풀을 열고 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은현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풍만한 가슴이었다.
“…….”
“일어났느냐?”
상냥하게 물어오는 인자한 목소리는 지금 은현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는 베르단디의 목소리였다.
“…베르단디님?”
은현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면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이내 미처 반응하지 못한 베르단디의 가슴과 은현의 얼굴이 부딪쳤다.
마시멜로와도 같은 물컹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몇 번이고 느껴보아도 중독되게 만드는 마성의 감촉으로 은현의 몸을 움찔 떨게 만들었다.
“아, 괜찮으세요?”
“후후, 뭘 가슴을 만진 것 정도로. 이미 더한 것도 한 사이인데.”
“…….”
요염하게 웃음을 짓는 베르단디의 반응은 생각보다 대담했다.
예전에는 제법 순진한 면모가 득했었는데, 은현과 특별한 관계가 되고 자주 몸을 섞었던 이후로는 순진했던 여신보다는 대담한 여자의 모습이 더 강해졌다.
그런 여신의 대담한 반응을 뒤로하고, 은현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현과 베르단디가 있는 것은 무성한 녹색의 풀이 가득한 들판으로 이루어진 초원이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이곳은 아이가 있던 곳과는 다른 세계다.”
“…다른 세계요?”
“정확히는 아이가 있던 곳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지.”
가상의 세계.
은현은 그것을 몇 번인가 경험을 해보았던 적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도데카테온의 신인 유피테르가 내렸던 세 가지의 시련이 그러했다.
그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련은 은현이 겪었던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낸 가상의 공간.
그 공간을 나가기 위해서는 유피테르가 설정해둔 시련을 클리어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은현은 지금 베르단디와 자신이 있는 이곳이 그 시련으로 재현된 가상의 공간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시련입니까?”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만들어낸 원리는 비슷하지만, 이 공간은 아이에게 시련을 부여할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
“…그러면요?”
“아이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내가 만든 공간이지.”
“…베르단디님. 저는 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티르니스령에서 저는 충분히 쉬다가 왔어요.”
자신을 걱정해주는 여신의 배려는 매우 고마웠지만, 지금 은현에게는 이렇게 느긋이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나는 그 지하의 개미굴이라는 곳에서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리를 하는 것을 보았다.”
괴물의 씨를 배속에 수태한 죄 없는 여성들을 죽일 때, 죄악감을 가슴속에 새기면서도 그것을 필요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행동했던 은현의 모습은 정말로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에는 고대 마수와 교전을 벌일 때, 분노한 은현은 자기 신체의 일부가 녹아내리고 자칫 잘못하면 불구가 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다.
아무리 ‘시간 역행’으로 신체의 결손을 복구할 수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몸을 막 쓰는 것은 베르단디의 입장에서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개미굴에서 있었던 은현의 심리 변화는 베르단디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 문제를 일리아나를 비롯한 다른 아내들과 상의해본 결과, 나온 방법이 이것이었다.
하계와 달리 독립된 시간의 흐름 법칙이 적용되는 신계로 은현을 불러와 당분간 이곳에서 상처 입은 은현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
“…이거였군요.”
은현은 일리아나가 했던 말이 이것을 의미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신계에서의 생활은 확실히 하계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하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을 놓고 편하게 쉴 수 있다.
은현은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듯이 풀밭의 초원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은현이 초원의 산들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꼬르륵
어째서인지 공복의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 은현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배에서 나온 소리라는 걸 감추기 위해서 복부를 감싼 베르단디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은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은현은 뒤늦게 이 가상의 공간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를 깨달았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진 공간.
자연스레 인간의 생리현상도 고스란히 재현된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열량을 섭취하고 숙면을 취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은현의 머릿속에 무언가 불길한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베르단디님.”
“왜, 왜 그러느냐.”
“혹시 영체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시는 건가요?”
“…….”
베르단디는 계속 고개를 돌린 상태로 대답을 회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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