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6화 〉 656. 연구자의 비애
* * *
상선을 기다렸고, 흑랑단이 수집했던 ‘청해의 눈물’을 직접 확인해본 결과.
그 정보는 허위라는 것이 드러났다.
티르니스령으로 정박한 상선이 싣고 있던 ‘청해의 눈물’은 모조품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두 사람은 곧바로 별 수확 없이 집으로 복귀했다.
“정말 아쉽다…. 괜찮아. 현아?”
“뭐,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의 눈물’은 마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현자의 돌’처럼, 마법사들이나 연금술사들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환장하는 최상위의 마법 소재다.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번에 티르니스령에 남은 이유는 여유를 좀 가져보려고 남았던 거니까.”
에린과 함께 시간을 가지면서 휴식을 즐기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만큼, 그것은 달성했다.
“좋았어?”
“응! 아주 좋았어!”
에린은 배시시 웃으며 은현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복귀하는 두 사람의 손에는 쇼핑으로 인한 결과물들이 가득 쥐어져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인벤토리에도 티르니스령에서 구매한 선물들이 가득했다.
신기하게도 여성들이 좋아하는 귀금속이나 값비싼 아티팩트들이 하나도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들은 이미 아르미타스 공작령에도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임산부인 일리아나를 위해 구매한 약재나 식자재들이 대부분으로 티르니스령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물로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장어를 20인분이나 산 건 좀 너무했어.”
“어, 그래? 릴리 언니나 엘레노아님은 엄청나게 좋아하실 것 같은데.”
“…….”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그럴 것이다.
그 장어를 먹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며, 두 아내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도 자신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집으로 복귀했다.
“오셨군요.”
은현과 에린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집 안의 청소를 진행하고 있던 릴리였다.
“언니! 다녀왔어!”
에린은 릴리에게 달려들 듯 안기며 자신의 방문을 요란하게 알렸다.
“응. 어서 와. 잘 쉬다 온 거야?”
사전에 티르니스령에서 이틀 밤 정도를 묵고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릴리의 얼굴에는 여동생을 다루는 인자한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응! 잘 놀다 왔어! 언니한테도 줄 선물 가지고 왔어. 한번 봐봐!”
이윽고 에린이 인벤토리 안에 정리해둔 선물들을 꺼내며 릴리에게 자랑했다.
“어머나.”
릴리는 작게 감탄했다.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식재료와 약재들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양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릴리의 호기심을 이끈 것은 냉동으로 보관되어 있는 커다란 상자다.
“이건 뭐니?”
“히히. 장어! 오랜만에 이거 먹고 싶어서 사 왔어!”
처음 맛본 장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에린은 벌써 잔뜩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물론 맛만으로 장어를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들을 가져온 것은 아니리라.
하나 같이 원기의 회복 효과가 탁월한 것들로 그 의도가 뻔히 보였다.
“후후.”
그것이 제법 싫지 않았던 릴리도 작게 웃으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힘내셔야겠어요.”
“…그럴 것 같네.”
그 말뜻을 이해한 은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언니. 지금 집안에 언니 혼자야?”
에린의 기감에는 현재 릴리의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아야 영지의 운영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집이 아니라 공작 저택에서 지내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일리아나가 없는 것은 이상했다.
현재 만삭으로 언제 아기를 출산할지 모르는 그녀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엘레노아와 릴리의 시중을 받아야지만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두 분 모두 당분간 공작 저택에서 생활하시게 됐어. 그곳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일리아나님의 시중을 들어드릴 하인이 더 많으니까.”
“아아.”
“그렇겠네.”
은현과 에린은 동시에 납득한 반응을 보였다.
에밀리아를 비롯한 인형들과 엘레노아, 릴리만으로는 일리아나의 케어는 조금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들 모두에게 임산부를 케어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에 제대로 대응할 수도 없다는 불안이 있었으니까.
한 차례 테레지아를 돌보았던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한 번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
그래서 엘레노아는 일리아나에게 당분간 공작 저택에서 지낼 것을 권했고, 일리아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두 분이 안 계시는 동안, 저는 밀린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인형들과 함께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던 차.
“도와줄까? 얼마나 남았어?”
“괜찮아. 거의 다 끝났으니까. 아 이 해산물들하고 식재료들은 모두 냉장고에 넣어줄래? 일리아나님께 드릴 저녁 분은 따로 빼두고.”
“알았어!”
에린은 곧바로 냉동박스를 들고 냉장고가 있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식사는 하셨나요?”
“느긋하게 먹고 싶기는 하지만, 먼저 드워프들 쪽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쉬었던 만큼 해야 할 일이 밀려있는 상황인지라, 느긋이 있을 수는 없었다.
먼저 에린과 함께 집에 들른 것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일리아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으나, 현재 집이 아니라 공작 저택에 있다는 것은 약간 아쉬웠다.
“그러시면 안 되죠. 아무리 바쁘셔도 끼니는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제가 샌드위치라도 싸드릴 테니까 꼭 드세요. 아시겠죠?”
“고마워.”
언제나 바쁜 자신을 챙겨주는 아내의 잔소리는 이상하게도 지겹기는커녕 기분이 좋았다.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끝으로 주방으로 갔던 릴리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건네준 바구니 안에는 대여섯 개의 큼지막한 샌드위치가 담겨있었다.
식빵에 신선한 채소들과 치즈, 햄이 끼워져 있는 간단한 메뉴였지만,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꼭 드셔야 해요.”
“알았어. 먹을게.”
재차 강조하는 릴리의 말에 답하고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아내는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마치 다섯 살 된 아이에게 밥을 꼭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에게는 저녁에 공작 저택으로 찾아갈게.”
“알겠어요. 저도 청소를 마치고 에린이랑 바로 저택으로 갈게요.”
은현은 앞으로의 일정을 간단히 말해두고 집을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있는 드워프들의 대장간이다.
대장간으로 들어오자마자 망치를 두들기는 금속의 울림으로 귀가 시끄러운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오셨소!? 야장!”
“야장이시어! 부디 이 검을 한번 봐줄 수 있겠소!?”
은현을 발견하자마자 많은 드워프들이 그에게 인사를 함과 동시에, 자신의 야금술을 평가받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으로 은현에게 달려왔다.
땀 냄새가 가득한 굵은 팔뚝과 짧은 체구의 난쟁이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익숙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대단하여 만족할 때까지 망치를 내려놓지 않는 집념의 종족들.
즉 자신이 원하는 해답과 만족을 얻을 때까지 은현을 놓아주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드워프들에게 약 2시간 정도를 시달리고 위의 연구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세실리아.”
“…오랜만에 뵙네요.”
은현에게 인사하는 세실리아의 반응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눈 밑까지 내려온 짙은 다크 서클과 생기가 없는 얼굴은 현재 그녀가 얼마나 피로에 찌들어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게다가 잔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도대체 얼마나 잠을 자지 못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연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어떻게 되고 있냐고요?”
“네.”
“후, 후후…. 후후후….”
느닷없이 세실리아가 웃음을 흘렸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기운 없는 웃음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혹시 아직도 진척이 아예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세실리아의 표정을 관찰했다.
하지만 피로에 찌들어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아직 살아있었다.
은현은 직감했다.
‘성공했나.’
“이걸 봐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세실리아의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묘하게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이윽고 세실리아가 테이블 위에 기다란 상자를 올려두고 개봉했다.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하나의 금속 주괴이다.
“호오.”
은현은 감탄했다.
상자 안에 담겨있던 금속 주괴는 일반적인 철이 아니라, 내부에 마력을 포함하고 있는 특수한 금속이었다.
마치 철 안에 마력을 포함하고 있는 미스릴이라는 특수한 금속처럼.
이 금속의 존재는 말 그대로 일반적인 금속이지만, 미스릴과 같은 특성을 지니도록 인공적으로 개조한 특수 금속이다.
즉 사람의 기술력으로 ‘미스릴’과 같은 특성을 가진 합금속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시작점을 만들어낸 세실리아는 현재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만만해 있었던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노곤해도, 그 노력이 결실을 맺고 이렇게 실질적으로 성과를 만들어냈으니,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직은 시제품 단계라 양산을 불가능해요. 하지만…. 방법을 모색하면 이걸 양산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죠.”
이내 세실리아는 흘끗 은현의 눈치를 봤다.
재료의 조달부터 가공, 제작의 시간까지 지금은 그 불편한 점을 천천히 개선해나가야 하는 단계.
당연히 이 과정에서 드는 비용은 지금까지 들었던 것보다도 배는 필요할 것이다.
비용은 모두 이 프로젝트의 후원자인 은현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는 이상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시작은 은현과 드워프들이 먼저 했지만, 지금의 세실리아는 한 명의 연구자로서 이 연구를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은현은 눈치를 보고 있던 세실리아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파악했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릴리가 챙겨주었던 샌드위치가 든 바구니를 올리고 안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건…?”
“아내가 싸준 샌드위치입니다. 요즘 바빠서 끼니를 잘 챙겨 먹지 못하는 것 같다고 챙겨줬거든요.”
“…하.”
세실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빠진 한숨을 늘어놓았다.
지금 누구는 밤낮을 새워가면서 연구에 목을 매며 생활을 하고 있는데, 눈앞의 이 양반은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자랑하며 염장질을 하고 있단 말인가.
자연스레 세실리아의 주먹이 꽉 쥐어지고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하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은현은 이 연구를 지원하는 유일한 후원자였으니까, 심기를 거스를 수 없는 상사이기도 했다.
“아, 죄송한데 드리진 않을 겁니다. 한 개도요.”
“됐거든요! 권유해도 안 먹을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높아졌다.
약간의 장난을 쳤던 은현이 피식 웃으면서 인벤토리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세실리아의 앞에 놓았다.
“이건…? 뭔가…헉!?”
조심스레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하던 세실리아가 숨을 삼키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은 백금화였다.
그것도 수십 개도 아니고 수백 개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의 백금화.
“이, 이 돈은 도대체…?”
“연구비로 쓰시죠.”
“…….”
이 정도라면 현재 공작 가문의 몇 개월 치 운영 예산에 필적할 정도.
그 액수를 확인한 세실리아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만간 계약서 하나를 작성하시죠.”
“계약서요? 아….”
세실리아는 무엇을 위한 계약서인지를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아마도 이 연구에 대한 특허권을 얌전히 포기하라는 등의 계약서일 것이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래야만 이 연구를 후원한 은현이 큰돈을 만질 수 있으니까.
“이 금속을 제작 및 판매함으로서 발생하는 이윤의 3%를 세실리아님께 지급해드리겠습니다.”
“…네?”
하지만 세실리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다.
“모자르신가요? 그러면 4%로….”
“아, 아뇨! 저는 틀림없이 이 연구에 대한 특허를 포기하라는 등의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
“그런 양아치 같은 짓거리는 안 합니다. 게다가 돈이 목적도 아니고요.”
돈이라면 이미 평생을 놀고먹을 정도로 차고 넘친다.
세실리아와 은현 사이의 인식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가 틀리기 때문이다.
세실리아가 연구의 완성과 이로 인해서 발생할 이익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은현이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은 페르니아스 왕국 전력의 전체적인 향상과 강화다.
은현에게 이 ‘양산형 미스릴 개발’연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큰돈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왕국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투자였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세실리아와 이 연구에 참여했던 드워프들에게 제대로 그 이윤이 돌아가도록 비율을 배분했다.
다른 드워프들에게 돌아가는 이윤이 1~2% 정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연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세실리아에게 가장 큰 비율이 배분되는 것은 당연하다.
“…….”
세실리아의 머릿속에 수 많은 숫자들이 나돌아다니며 앞으로 자신이 얻게 될 이익을 계산했다.
이 연구만 완성할 수만 있다면 순식간에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레 의욕과 욕심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 가문 출신 자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가문이 가지고 있는 재력이 상당할 뿐이지, 그녀가 개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금전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즉 이것은 그녀에게도 큰 기회였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세실리아는 피곤에 찌들어 다크서클이 가득한 두 눈에 생기가 깃들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평생 따라가겠습니다! 사장님!”
그 태도는 아까까지만 해도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염장 지랄을 떤다고 속으로 욕했던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에게 배분될 막대한 액수의 금화와 연구를 완성했다는 명예를 거머쥐게 될 나중을 생각하자니 세실리아의 마음속에는 바닥을 기고 있던 애사심이 마구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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