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5화 〉 655. 마녀와 검성(2)
* * *
릴리의 안내를 받아 공작 저택의 내부를 걷던 시에테는 마침내 어떤 방 앞에 도달했다.
똑똑
“마님. 시에테님을 모셔왔습니다.”
릴리가 정중한 노크와 함께 시에테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응. 보내줘.”
온화한 목소리로 입실의 허가가 떨어지자, 릴리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시에테에게로 몸을 돌려 방안으로 손짓하여 정중히 안내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
시에테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의 입실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두 명의 여성이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에테님.”
먼저 시에테에게 인사를 건넨 것은 두 사람 중 면식이 있는 엘레노아였다.
싱긋 웃어 보이며 직접 테이블의 의자를 빼면서 시에테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행동은 엉덩이가 무거운 귀족들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분과 지위를 떠나서 시에테를 대하는 엘레노아의 태도는 자신보다 윗사람을 공경하듯 한없이 정중하다.
“…그래.”
시에테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엘레노아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올곧게 다른 여성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엘레노아와 마찬가지로 은현의 아내중 한 명인 일리아나다.
“이렇게 얼굴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현이의 아내인 일리아나 케니퍼라고 합니다.”
일리아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에테에게 스스로를 소개했다.
“…시에테 로페즈라고 한다. 그 녀석에게…검을 가르친 스승이지.”
“알고 있습니다.”
일리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금 몸이 불편해서 시에테님을 이렇게 직접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시에테를 대하는 태도는 엘레노아 뿐만이 아니라, 그녀만큼이나 깍듯하고 정중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다름 아닌 은현을 가르친 스승이며,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술의 수준 또한 한때 검성이라는 명예와 칭호를 거머쥐었을 정도로 아득히 높다.
비록 검을 잡아본 적이 없는 일리아나일지라도, 은현이 얼마나 시에테를 깍듯이 모시고 있는지를 아는데, 그녀에게까지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일 생각이 없었다.
그녀와 은현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의 주인인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가에게조차 오만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마녀는 굉장히 온화한 태도로 시에테를 윗사람 모시듯 대했다.
“…아니. 상관없다.”
시에테는 만삭으로 부풀어 있는 일리아나의 복부를 한차례 응시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저 배속에는 은현의 아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시에테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한 감정을 품었다.
애써 그 복잡함을
“그 몸으로는 어쩔 수 없었겠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있는 일리아나의 정중한 사과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보다 시에테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일리아나가 자신을 찾은 이유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시에테가 지금까지 만나본 은현의 아내들은 네 명 중 두 명이 전부로 엘레노아와 에린뿐이다.
처음 얼굴을 대면한 일리아나의 첫인상은 철이 없어 무례한 에린과 달리 정중하고 기품이 넘쳐 성숙미가 돋보였던 엘레노아에 가까웠다.
그런 일리아나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리 없었을 터.
“시에테님을 만나 뵙고 한 가지 도움을 청하고 싶었습니다.”
“…도움이라.”
시에테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설마 은현과의 연줄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시키려고 할 줄이야.
조금 실망이었다.
결국, 눈앞의 이 온화해 보이는 여자도, 마녀도 자신의 힘을 이용하려고 드는 높은 지위를 가진 상위 권력층과 비슷한 것일까.
“난 부탁을 받았다고 해서 검을 휘두르는 그런 값싼 인간이 아니다.”
시에테가 검을 휘두르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자신이 노력과 시간으로 쌓아 올린 검술의 끝을 보는 것.
즉 검술의 완성이다.
하지만 시에테의 비웃음 섞인 거절을 듣고도 일리아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웃음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은 이미 예상했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시에테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검사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를 이미 은현에게서 들은 일리아나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흠?”
시에테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하려는 부탁은 자신이 가진 검술을 이용하여 어떠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제가 몸이 좀 많이 불편하지만, 저도 어디 가서는 그렇게 약하지 않은 여자입니다.”
“…….”
작게 웃으며 자신감을 내보이는 일리아나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로 전력을 발휘한다면 도시 하나쯤은 간단하게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여자다.
힘이 필요하다면 스스로가 나서서 그 힘을 발휘하면 했지, 구태여 번거롭게 남의 손을 빌릴 필요까지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자신감은 그 시에테 또한 살짝 감탄하게 만들 정도다.
제 아내. 한번 화나면 진짜로 무섭거든요.
‘그 말이 성정이 아니라 실제 힘을 말한 거였다니.’
작게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던 은현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내 시에테는 실망스러웠던 눈빛을 거둬들이고 일리아나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일까.
새삼 그것이 궁금해져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리자 일리아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현이의 보호에요.”
“…보호?”
시에테는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의 내용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호’라는 것도 그렇지만,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보호’의 대상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인 은현을 보호해달라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시에테는 은현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우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가르쳤던 검술의 기초를 기반으로 스스로 성장해온 은현은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최고의 기사로 소문난 리오드조차도 넘볼 수 없는 경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죠.”
즉 일리아나는 그런 은현이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상황은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눈앞의 그녀는 도대체 어떤 상황을 예견하고 그리고 있는 것인지, 시에테는 새삼 궁금해졌다.
“자세히 설명해라.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녀석을 도울 수 있도록.”
“네.”
일리아나는 앞으로 언젠가 나타날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자신과 그녀가 은현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저 자신을 상대하는 건 제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현이를 습격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것은 그 돌발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다.
“…….”
그녀가 시에테에게 하고자 하는 부탁은 시에테로서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누군가를 죽여달라, 검을 이용하여 괴물을 토벌해달라, 왕국의 기사가 되어 나라의 검이 되어달라는 등의 시답잖은 부탁이었다면 시에테도 단칼에 거절했으리라.
하지만 은현과 관련된, 그의 안위가 연루된 문제라면 시에테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리아나는 작게 고개를 숙여 정중한 부탁을 해왔다.
고개만을 숙이고 허리를 굽힐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복부에 있는 태아에게 부담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해라.”
시에테는 앞으로의 전개를 예상하는 일리아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리아나가 입으로 직접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말도 안 되는,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
하지만 거기에 대응하는 계획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시에테에게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는 일리아나나 엘레노아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 녀석 하나를 위해서, 이 대륙의 모든 인간을 몰살시킨다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한 명의 개인에게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수많은 악마들이 이 하계로 넘어오고, 몇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전쟁이 이어지고 나서야 지구는 멸망했다.
그런데 또다시 그런 결과를 이끌어 내는 원흉이, 이번엔 고작 마법사 한 명.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에테는 절대로 단호했다.
마치 그런 사건이 발생한 ‘미래’를 정확히 보고 온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저는 현이가 모시고 있는 여신에게서 특별한 힘을 부여받았으니까요.”
에린이 은현과 사도의 권속 계약을 맺으면서, 베르단디의 자매여신인 우르드에게서 과거의 업을 불러오는 권능의 일부를 부여받은 것처럼.
일리아나는 에린보다 더 이전에 스쿨드에게서 이어받은 권능의 일부가 있었다.
그 효과는 머릿속 사고의 확장으로 인해 고위 자릿수의 마법들을 통상보다 수십 배나 빠른 속도로 펑펑 써댈 수 있는 막대한 연산 작업 능력을 얻었다.
그 수준은 엘프들의 수백 수천 명분의 마력을 조작하여 세계수를 부활시킬 수 있는 수준.
하지만 그것은 일리아나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저는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수천, 수만 가지의 가능성과 변수들을 검토하고 계산하여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예상한다.
내일이라는 짧은 시간의 미래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나 그 이상의 미래까지.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염두에 둬야 하는 가능성과 변수들은 점점 늘어나고 연산 작업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불어나는 엄청난 작업.
그렇게 그녀가 예언에 가까운 예측으로 도달한 ‘미래’에서는 은현의 앞에 또 다른 자신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뭐지?”
“저라도 현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
일리아나는 은현이 살아있는 다른 평행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반드시 행동을 옮겼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설령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목표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계획을 밝히는 일리아나를 보며, 시에테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생각하는 사고의 방식 자체가 평범한 인간들과는 틀리다.
마치 특정의 윤리관이나 가치관, 감정 등이 메말라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 이외에는 어떻게 되던 전혀 상관이 없다는 무관심함에 가깝다.
은현을 노리고 있다는 또 다른 일리아나나, 은현을 지키려는 눈앞의 일리아나나, 그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
“너도…. 최후의 수단으로는 그런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
“아니요. 저는 그럴 생각은 없어요.”
일리아나는 시에테가 그 질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걸 예상한 듯 즉답했다.
“저는 말이죠. 현이가 되살아나서 저를 찾아왔을 때, 처음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믿게 되었어요. 그리고 걔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됐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죠.”
베르단디라는 여신의 존재와 은현이 짊어지고 있는 사명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은현이 부활하고 나서였다.
“부부가 되고, 여신들의 중재를 통해서 현이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 있을 수 있는 동반자가 될 자격을 얻었어요. 그리고 그 대가로 현이의 사명을 함께 짊어지게 됐죠.”
이제는 은현이 하고 있는 일이 일리아나의 일이기도 하고, 일리아나가 하고 있는 일이 은현의 일이기도 했다.
“걔가 지키려고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는데,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도록 할 수는 없잖아요.”
일리아나는 흘끗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엘레노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은현이 정치적으로, 대외적으로 활동하기 편하도록 그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은현은 아르미타스 공작령 안에서 대외적으로는 엘레노아 다음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권력자가 되었다.
“릴리와 에린은 제법 심성도 곱고 각자가 현이에게 마음도 있었으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요.”
그렇게 완성된 지금의 가정이, 일리아나는 제법 싫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행복했다.
그래서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리아나 또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다.
“…….”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 녀석이 무사한지 알 것 같군.’
시에테는 처음에 은현의 가정사를 들었을 때는 어떻게 무사한 건지 의문을 가졌었다.
일부다처의 가족관계로 아내가 네다섯이 있는 가정은 지구에 있을 때도 존재했었지만, 그 결말은 하나같이 좋지 못한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은현의 경우에는 다르다.
아내들 사이의 관계가 굉장히 양호하고 갈등이 없어 하나의 목표로 단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일리아나다.
그것은 단지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현이는 말이죠. 굉장히 고집이 세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요.”
“…알지.”
시에테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의 고집은 일리아나뿐만이 아니라 시에테 또한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검술에 대한 열망이 없었음에도, 피나는 노력을 동반한 수행을 통해서 검술을 연마해왔던 이유는 그것이 여신의 사도로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목표로 두고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아니면 이미 따라잡은 경지에 올라와 있다.
은현의 고집은 어떤 의미로 한 가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광기와도 같은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일리아나는 끝에 은현의 마음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때 무리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때를 대비하여, 그의 마음에 제동을 걸어줄 수단은 하나라도 더 만들어두는 것이 최선의 준비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시에테님. 만약 그때가 오면…. 현이를 지키는데 꼭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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