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4화 〉 654. 마녀와 검성(1)
* * *
“흐으으! 하암.”
잠에서 깨어난 에린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이라기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이제 막 일어난 에린에게는 아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몸을 섞고 신나게 즐기면서 체력을 소진한 에린은 다시 잠에 빠졌고 하루가 지난 것도 모자라 점심이 되고 나서야 깨어났다.
“으…. 허리는 아직 얼얼하네. 그래도…. 히히.”
에린은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헤벌쭉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배속에 가득 차 있는 따뜻한 기운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전신에 행복감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현이는…. 나갔나?”
지금 시간이 점심 시간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지런한 은현의 성격상 이미 밖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거나 에린이 일어날 시간에 맞춰 점심 식사를 가지러 갔을 것이다.
“하아…. 좋다. 얼마 만에 맛보는 휴식이야.”
에린은 다시 침대 위에 몸을 드러눕고 풀어진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기본 단련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성실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침잠이 몹시 많은 에린은 몹시 게으른 성격이다.
곁에 은현이 있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정말로 최고가 아닌가.
공략 원정이 끝나고 맛보게 되는 달콤한 휴식에 취해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타이밍에 맞추어 은현이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어?”
“응.”
에린은 배시시 웃으며 남편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가 들고 들어온 음식이 담겨 있는 그릇으로 향했다.
방금 막 끓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프와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된 스테이크가 쟁반에 담겨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테이크의 양이었다.
총 다섯 접시가 준비된 양은 누가 봐도 1인분이 아니라 5인분에 필적할 양.
“방금 일어났으니까 가볍게 빵하고 스프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에린은 이쪽이 더 취향일 것 같아서. 괜찮아?”
“헤헤. 당연히 괜찮지!”
육식을 굉장히 좋아하는 에린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대식가 쪽의 반열에 들어와 있는 만큼 먹는 양 또한 또래의 여성들에 비해 굉장히 많다.
기본적으로 잘 단련되고 활동량이 많아 열량의 소모가 많은 만큼 먹어야 하는 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은현은 작게 웃고는 테이블에 식사를 세팅했다.
“잘 먹겠습니다!”
에린이 실실거리며 은현이 준비해준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능수능란하게 스테이크를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입안에 넣는 에린은 부드럽게 녹는 식감과 입안에 가득 퍼지는 풍미에 입가가 풀어졌다.
풀어진 입가에서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소스가 흘러내린다.
엘레노아에게 스파르타식으로 교육받은 식사예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은현은 그저 웃으며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연인이 되고 초창기에는 적게 먹는 척을 하거나 연약한 모습을 어필하려 하면서 나름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지금의 에린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가식이나 내숭을 떨지 않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오드님이나 기사단은?”
아주 늦은 첫 끼를 먹기 시작한 에린이 은현에게 물었다.
“리오드는 페르닌으로 복귀했어.”
“어? 진짜로?”
스테이크를 찍던 포크를 멈칫하고 에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오늘 아침에 아르티아 기사단원들과 함께.”
리오드는 바쁘다.
공략원정에서 조우했던 새로운 고대 마수와 그 괴물이 둥지를 트고 있었던 개미굴에 대한 보고서도 써야 하며 궁정 회의에도 올려질 안건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업무들이 있으니 언제까지고 티르니스령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에린은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에이라 언니랑 인사도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서만 잠만 자지 말고 에이라를 만날 걸 그랬다며 작게 후회했다.
“에이라랑 무슨 일이 있었어?”
“응? 아니. 왜?”
“흐음….”
은현은 에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페르닌으로 복귀하려던 당시, 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던 에이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치 이상한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민망해서 도저히 은현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는 숫처녀 같은 반응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은현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에린의 상태를 물었다.
“너 괜찮냐고 물어보던데?”
“언니가?”
“어.”
“…왜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에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언니 만나러 저택에 가봐야지. 그것보다….”
이내 고민을 해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제쳐두고, 에린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우리 이제 뭐해?”
“흐음. 당분간 좀 놀까?”
“…어? 진짜?”
에린이 리오드와 아르티아 기사단이 먼저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크게 놀랐다.
은현의 입에서 논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다.
“…괜찮아? 안 바빠?”
에린은 조심스레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항상 바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하는 검술의 수행을 거르는 걸 본 적이 없고, 그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으로 여기저기에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구할 게 있거든.”
“구할 거?”
“임산부한테 좋은 약재나 식재들을 사가려고.”
“아하.”
에린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두 사람이 있는 이 티르니스령은 대규모의 상선들이 정박하는 커다란 항구도시.
당연히 수많은 물건이 들어오는 만큼 진귀한 약재나 식재료들까지 많은 것들을 보고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따로 구하고 싶은 것도 있고.”
“그게 뭔데?”
“청해의 눈물.”
“……?”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다시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한 에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지 이름만을 듣고 추측해보았을 때,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소재라는 짐작만을 할 뿐이었다.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야?”
“맞아.”
청해의 눈물은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신비한 보석에 붙여진 이름이며, 바다에서 생업을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한 물건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많은 마력을 내포하고 있고 대기중에 존재하는 마나를 흡수하여 정갈하게 갈무리하고 저장하는 효능을 가진 청해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영구적으로 마력을 만들어내는 보석이다.
연금학을 다루는 학자들이나,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분석해보고 싶은 신의 소재이기도 했다.
“…대단하네.”
설명을 들은 에린도 먹고 있던 스테이크를 꿀꺽 삼키고 감탄할 정도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청해의 눈물이라는 걸 어디에 쓸지 짐작도 갔다.
“그 친구분인 인형님을 부활시킨다고 했었지? 거기에 쓰려고?”
“맞아.”
에밀리아와 다른 인형들을 만들어낸 유일한 인형사.
아르키스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극존칭을 붙이는 것이 어쩐지 우스워서 은현은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현아. 그런 걸 어떻게 구하게?”
딱히 자신이나 은현의 능력을 낮게 본 것은 아니다.
모험가의 경력으로나, 무력과 재력으로도 다양한 방면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은현에게 불가능한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단지 모험가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유적이나 유물, 아티팩트들을 보아왔던 에린이지만, 청해의 눈물이라는 소재나 그에 준하는 효과를 지닌 소재에 대한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든 의문이다.
“흑랑단을 시켜서 미리 정보를 모았지. 내일 저녁에 그 청해의 눈물을 실은 상선이 이 티르티스 항구로 정박해올 거야.”
수집해온 그 정보가 진짜일지 가짜일지는 은현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소문이 퍼졌을 리도 없고, 적어도 소문의 진위를 확인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은현은 남았다.
“만약 돌아가고 싶으면 먼저 돌아가도 돼.”
“흥, 현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현이만 두고 집으로 갈 리가 없잖아.”
에린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은현에게 말했다.
“일리아나님이 나한테 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는걸.”
자신만 믿으라며 자부하는 어린 아내의 모습에 은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침대 위에서 자신에게 깔려 앙앙거리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어제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에린을 리오드나 기사단과 함께 복귀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애정과 책임감으로 자신과 함께 있으려는 그녀의 행동을 은현은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그러면 내일 상선이 도착하기 전까지, 오랜만에 쇼핑하면서 데이트나 좀 할까?”
“좋아! 이거 빨리 먹고 준비한 다음에 나가자!”
에린은 의욕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과 함께 보낼 시간을 잔뜩 기대함과 동시에, 일리아나에게 필요한 것이 뭐가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에린은 스테이크를 먹었다.
◆ ◆ ◆
“릴리! 이번에 좋은 고기가 들어왔는데! 싸게 줄 테니까 사가!”
“릴리님! 저번에 도와주셨던 건, 영주님에게 감사하다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이번에 들어온 사과가 정말 싱싱해! 좀 담아줄 테니까 가서 먹어!”
상점가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하나같이 릴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무언가 대가를 바라는 흑심 같은 것이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호의였다.
“고맙습니다.”
릴리는 노점의 상인이 바구니에 담아준 사과들을 고맙게 받아들며 미소지었다.
이런 호의를 빌미로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면 일절 받지 않았겠지만, 이 영지에 거주하고 있는 영지민들이 보인 호의는 정말로 존경과 고마움에서 비롯된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릴리도 거절할 수 없었다.
“…흐음.”
릴리의 뒤를 따르고 있는 시에테는 그 광경을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만 보았다.
릴리와 이 공작령의 주인이나 다름이 없는 엘레노아,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은현이 이 공작령 안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광경이었다.
영주 대행이라는 영지 운영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엘레노아.
그리고 현재 가장 큰 현금의 흐름을 꽉 쥐고 있는 지스 상회의 뒷배인 은현의 존재는, 영지민들 사이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눈 밖에 난다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불안에 휩싸여 눈치를 보는 을의 입장인 영지민들이 쳐다도 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위치한 갑의 입장인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영지를 풍족하고 윤택하게 만들어 발전시키는 것도 모자라 깨끗한 치안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는 이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영지민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보기 드물게 영주와 귀족들을 존경하고 동경할 줄 아는 영지민들이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곳에서 인권이라는 것을 보장하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주는 공작 가문의 정책은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를 정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의식은 외부에서 유입된 영지민일수록 더 빠르고 강하게 스며들었다.
다른 영지의 시설과 정책 환경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살면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걱정도 없다.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으며 사람처럼 살 수가 있다.
그런 장소가 있으며 이곳에서 거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지민들은 이 장소를 만들어준 영주에게 감사해하고 존경하고 있다.
그 공작 가문의 관계자인 릴리에게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영지민들이 호의를 보내오는 것은 당연했다.
“…….”
시에테는 공작령 안에서, 어쩌면 이 페르니아스 왕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릴리를 보며 복잡한 감정을 품었다.
이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 다름 아닌 은현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소식이 끊긴 탓에 아주 오랜만에 만나게 된 아들이 자수성가한 모습을, 그가 일궈낸 것을 보는 것 같은 기분.
제자의 성공은 당연히 기뻐해야 할 것이 틀림없지만, 시에테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의 성장과 성공에 자신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따져본다면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도움 없이도 많은 것을 이뤄냈구나.’
시에테는 감상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그에게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검술뿐.
그 이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은현에게 가르쳤던 것은 그의 삶을 생각해본다면 정말로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만약 자신이 그때 죽지 않고 은현과 함께 했다면, 더 많은 것을 가르치지는 못했더라도 곁에 있을 수 있었다면, 이런 뿌듯한 광경을 좀 더 일찍 옆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신가요?”
릴리는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는 시에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이윽고 시에테는 릴리의 안내를 받아 이 공작령의 주인이 있는 곳인 공작 저택에 당도했다.
“오셨습니까.”
경비를 서고 있던 문지기들은 릴리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엘레노아를 뒤에서 보좌하면서 경비들 사이에서도 이미 알려진 릴리는 자연스럽게 문지기들을 지나쳤다.
“가시죠. 큰 마님과 작은 마님이 시에테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어째서인지 보기 드물게 긴장한 시에테가 릴리의 안내를 받아 공작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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