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50화 (633/730)

〈 650화 〉 650. 영웅의 성장(6)

* * *

최종적으로 악마의 완전한 소멸을 하고 나서야, 리오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작게 신음했다.

“크….”

전투가 끝나자마자 풀리는 긴장은 그대로 전신의 피로를 자각하게 만든다.

리오드는 급격히 무거워지는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일어서지 못했다.

다리뿐만이 아니다.

검을 쥐고 있던 손도, 팔마저도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한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간절히 애원해오는 리오드는 육체는 한계에 다다라 휴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로….”

리오드는 분한 표정을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자신은 분명히 성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따라잡고자 하는 목표인 은현과 비교를 해본다면 아직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할 터.

아직도 걸어가야 할 길은 너무도 멀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던 것에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길이 제시되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필요한 노력과 시간을 생각하자니 너무도 까마득해서 막막하기까지 하다.

결국, 리오드는 개미굴의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조금만…. 쉬도록 할까.”

보통은 리오드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작스레 마수의 기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 행동은 많은 기사들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기사단장으로서는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일.

평소였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을 나태한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전신에 누적된 피로와 극심한 정신의 탈력감은 그 강철같던 리오드의 의지를 꺾고 타협하도록 만들었다.

“후우….”

개미굴 내부의 텁텁한 공기는 굉장히 맛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것조차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해냈다.”

리오드는 지금 자신의 성장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자신이 목표로 생각하고 있는 은현의 뒤를 쫓을 수 있는 걸음마 단계에 진입한 것에 불과하지만, 리오드는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성장’이라는 것에 새삼 새로운 감회에 젖어 있었다.

약 20년 동안 계속 노력해오면서 누구보다도 강한 최고의 기사라는 칭호와 자리를 가졌고 명성을 쌓았다.

내심 더는 올라갈 경지가 없다는 것에 막막함과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을 때, 더욱 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으로 발을 들이밀 수 있게 된 이 성취감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젊었을 적에 느꼈던 감각.

뿌듯하고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이 기쁜 감정을 계속 즐기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땅바닥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개미굴 쪽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괜찮냐?”

리오드의 안부를 물어오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는 은현이었다.

“물론이다.”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당당하게 거짓말을 즉답으로 내놓자, 은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리오드를 흘겨보았다.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를 받은 리오드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왜 왔지?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이럴 것 같아서 와봤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은현의 태도가 리오드는 어쩐지 언짢았다.

“…괜찮다고 했는데.”

은현에게 자신은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못 미더웠던 걸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지금 네 꼴을 봐라.”

“…….”

리오드는 할 말이 없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는 자신이 이길 수 있었지만, 그 여파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이 상태는 확실히 위태롭기 짝이 없다.

“여기서 무작정 널 믿기엔 나도 좀 부담스럽거든.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테레지아나 에이라의 얼굴은 어떻게 보라고.”

은현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리오드가 뒤늦게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성장을 만끽하고 있던 그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으나 은현의 잔소리를 듣게 되니 굉장히 성가셨다.

게다가 그것이 또 맞는 말인지라 더더욱 할 말이 없다.

바닥에 널브러지듯 대자로 누워있는 리오드에게 가까이 다가온 은현은 쉬지도 않고 잔소리를 퍼부으면서 리오드의 몸을 어깨에 들쳐 맸다.

“…뭐하는 짓이냐.”

“뭐하긴 일단 이곳을 나가야지.”

“내려놔라. 내 발로 걸을 수 있다.”

“방금까지 다 죽어가는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으면서 허세는.”

아직 회복이 덜되었을진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리오드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모습을 자신의 단원들에게 보였다가는 위엄이 서지 않는다.

이 원정이 은현과 에린, 자신으로만 이루어진 극소수 규모의 파티였다면 수치스러우면서도 그의 도움에 의지했을 테지만, 지금 이 원정대는 적지 않은 숫자로 자신의 기사단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기사단장으로서 항상 굳건하고 강인해야만 한다.

“포션을 써라. 아직 남아있을 텐데.”

“…너 임마. 이거 내 아내가 나 위험하면 쓰라고 만들어준 거야.”

당당하게 포션을 요구하는 리오드의 태도에 은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은현은 포션을 꺼내어 리오드에게 먹였다.

리오드가 은현에게 무언가를 받고도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을 몰상식한 인간도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치 덕에 적잖게 이득을 보고 있는 이상, 아무리 엘레노아가 특별히 신성을 부여해준 포션이라도 아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엘레노아의 신성력이 담겨 있는 포션은 한계까지 누적된 피로로 가득한 리오드의 전신을 말끔하게 복구시키는 최상위계의 포션.

“…후우.”

신체의 피로뿐만이 아니라, 극심한 탈력감을 만들어내고 있던 마력과 정신력까지 회복되는 것을 느낀 리오드는 작게 숨을 고르게 내쉬며 몸 상태를 갈무리했다.

“고맙다.”

“돌아가면 엘레노아한테 꼭 보답해라.”

“그러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리오드는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물었다.

“다음은 어떻게 할 거지?”

대외적으로는 이 원정대의 지휘관이자 책임자는 리오드였지만, 둘만이 떨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보다 은현의 의견을 더욱 중시했다.

“…….”

은현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기사단과 합류를 하거나, 이 개미굴 내부에 곳곳이 퍼져 있는 산란장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

“합류부터 하자.”

당연히 지휘관인 리오드의 통제하에 이 개미굴 전체를 공략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게다가 현재 저 대규모의 산란장을 만들어낸 원흉인 고대 마수는 이미 은현이 처리한 상태다.

더군다나 멘탈이 강하게 흔들렸다는 에린의 상태도 걱정이었던 타산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러지.”

리오드는 은현의 제안을 받아들여 위로 향했다.

“어?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에린을 통해서 리오드의 명령으로 약 8명에서 12명 사이로 조를 편성하여 활동하고 있던 도중이 한창.

임무를 수행 중이던 기사들이 리오드와 은현을 발견하고 두 사람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상황은?”

리오드는 곧바로 조의 상황을 물었다.

부상자나 사망자는 있는지, 산란장을 파괴하는데 지장이 되는 사항은 있는지 등을 보고를 올리는 아르티아의 기사들은 얼굴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사망자는 없지만, 티르가 어깨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망설이던 기사는 흘끗 배가 불룩한 여성들의 시체가 쌓여있는 곳을 응시했다.

시체들은 타살의 흔적이 없었고 깨끗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기사들이 죽인 게 아니라, 배속에 괴물을 수태하고 있던 여성들의 생명이 꺼지면서 자연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리오드 또한 그 광경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죄 없는 무고한 여성들을 자신들이 죽여야만 했다는 끔찍한 경험을 겪게 하지 않았다는 안도와 정말로 이 상황에 안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

그 모순이 이성을 어지럽히고 감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리오드는 물론 기사들 또한 알고 있을 터.

“가지.”

“…예.”

이 개미굴 내부에 퍼져 있는 산란장 전체를 파괴하는 임무를 기사들은 굳게 결심한 얼굴로 받아들였다.

◆ ◆ ◆

나뉘어져 있던 리오드와 기사단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단원들은 리오드의 건재함을 직접 확인하면서 사기가 급격히 위로 치솟았고, 동시에 개미굴 내부의 끔찍한 광경에 적잖게 동요했다.

하지만 산란장 내부를 파괴하는 임무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공략 원정대의 임무는 뿔뿔이 흩어져 개미굴 내부를 정리하고 있던 기사단원들과 한두 조씩 합류하면서 조금씩 정상 궤도에 올라와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현아!”

공략이 진행된 지 3일째 되던 날, 에린은 마침내 은현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다다닥 뛰어온 그녀는 피곤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의 품에 안겼다.

“괜찮아?”

“안 괜찮아. 진짜로 보고 싶었어어….”

에린은 품에 안긴 은현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그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텁텁한 개미굴 내부의 공기와 악취가 가득한 흙냄새를 지워내듯 적극적으로 얼굴을 비비던 그녀는 뒤늦게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남편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보다, 재빨리 그와 입을 맞춰둬야 했음을 깨달았다.

“혀, 현아…. 있잖아….”

“꽤 늦었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시에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에린의 몸이 움찔 떨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은현도 이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스, 스승님이 어떻…!”

“현아! 현아!”

에린이 다급히 은현을 붙잡아 제지했다.

만약 여기서 은현이 크게 당황하여 시에테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은현이 시켜서 시에테를 이곳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에린의 거짓말이 다 들통나게 된다.

그러면 얼마나 큰 보복이 돌아올지, 에린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제발! 제발 눈치채줘!’

부부의 연을 맺었기 때문일까.

에린의 눈빛을 본 은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

식은땀을 흘리며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좌우로 젓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은현은 뒤늦게 에린이 무엇을 하였는지 눈치챘다.

급박했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백귀들을 소환함과 동시에, 시에테를 함께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멋대로 행동한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 내린 명령이었다는 핑계까지.

무언가 일을 할 때면 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는 에린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에 파악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쉬웠다.

문제는 에린의 거짓말은 몹시 허술했으며 시에테는 이미 그것을 눈치채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은현은 시에테의 일을 수습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정했다.

“제 뻔뻔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공략 원정대도 큰 피해 없이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흐음.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냐. 재미가 없구나.”

시에테는 뻔한 은현의 반응에 피식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은현에게나, 에린에게나 나쁘지 않은 호재다.

“혹시 원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없지는 않지. 일이 마무리되면 혼자서 날 찾아와라.”

은현에게 요구할 내용은 며칠 동안 자신에게 할애할 시간을 만들라는 것으로 이미 정해두었지만, 이것을 바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야기한다면 어쩌면 또 에린이 귀찮은 껌딱지처럼 은현을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네.”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테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그로서는 또 무슨 무리한 요구와 꼬장을 부리려는 것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귀찮다.

“애송이. 이리 와라.”

“네, 네에….”

에린은 은현의 품에서 몸을 움찔 떨면서도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에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시에테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제자 녀석 때문에 넘어가 주마.”

“…넵.”

형식상으로는 백귀인 시에테는 에린의 부하나 다름이 없었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위압감이나 은현의 스승이자 자신의 대스승이라는 위치가 에린을 위축시킨다.

“…스승님. 에린을 너무 혼내지 말아 주세요.”

“흥, 너는 이 핏덩이에게 너무 무르다.”

코웃음을 치던 시에테는 그렇게 은현을 비웃어주고는 역소환되어 사라졌다.

정비를 마치고 있던 기사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위치에는 은현과 에린만이 있었다.

“…….”

제 잘못을 알고 있는지, 에린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에린이 무방비한 태세를 드러내고 있는 찰나, 은현의 손바닥이 에린의 몸을 찰싹 때렸다.

짜악!

“히앗!?”

순간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에린이 화들짝 놀라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원정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에린과 은현에게 집중되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고, 에린이 찌릿하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깜짝 놀랐잖아!”

“잘못해놓고 큰소리치는 거야?”

“그, 그건…. 미안해….”

에린은 다시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확실히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 최고 전력인 시에테를 부른 것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판단으로 모두가 무사한 결과로 이어졌다면 불평을 늘어놓기는 해도 시에테도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에린을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가 됐던 것은 혼나는 게 두려워서 은현의 이름을 멋대로 팔고 스승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거짓말은 못 쓰지. 집에 가면 벌을 줄 거야. 알았지?”

“으, 응….”

에린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면서 은현이 찰싹 때린 자신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은현이 한 말을 다시금 속으로 곱씹었다.

‘벌….’

어떤 벌을 받게 될까.

머릿속으로 상상하게 된다.

은현의 손바닥 열기라도 남아있는지, 엉덩이는 아직도 얼얼하고 화끈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맞았을 때는 마치 전류가 흐른 것처럼 찌릿한 느낌에 엉덩이와 허리 부근이 떨렸다.

아픈 것보다도, 좋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현아. 있잖아….”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에린은 그 기묘한 기분을 한 번만 더 맛보고 싶은 마음에 은현에게 한 번만 더 엉덩이를 때려달라고 부탁하려 했지만, 보는 눈과 귀가 많은 이곳에서는 차마 그런 부탁을 할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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