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8화 〉 648. 영웅의 성장(4)
* * *
“자. 아~해.”
“아~!”
활짝 웃으며 입을 벌리는 에린의 입안에 은현이 스푼으로 케이크를 떠다가 먹여주었다.
입으로 들어오는 달콤한 생크림과 푹신한 빵의 식감이 어우러져 그 맛을 더욱 강조했다.
“히히.”
웃음꽃을 피우며 케이크를 먹고 있는 에린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가득 차 있었다.
“맛있어?”
“맛있어! 현이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 더 먹여줘!”
게다가 직접 먹여주는 디저트라니, 에린의 입장에서는 그 맛만큼이나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는 것과 같다.
그것이 두 사람의 집에서 행해지는 부부간의 애정행각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둘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이곳은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마련된 시에테의 새로운 집 안이다.
“…….”
현 영주 대행인 엘레노아의 지시로 특별히 건축된 이 주택은 그동안 모그라프령에서 숙소를 잡아 머물고 있었던 시에테를 위해서 건축된 집.
은현과 에린은 그녀의 이사를 돕기 위해서 이 집을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사라고는 해도 그렇게 거창할 건 없었다.
시에테는 에린의 힘으로 그저 육체만이 부활했을 뿐이기 때문에 이렇다 할 짐 같은 건 없었다.
가지고 있던 것은 은현이 선물했던 ‘겨우살이’라는 검 한 자루.
시에테에게는 그것이 전부였으며 다른 것은 딱히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은현의 생각은 달랐다.
스승님의 집인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은현은 에린과 함께 귀찮다고 한사코 버티고 있는 시에테를 끌고 나와 공작령 안의 상점가를 걸었다.
필요한 가구들과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상점가를 걷고 있으면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정확히는 이 공작령 안에서 명성이 자자한 은현과 에린에게 쏠린 관심이 대부분이었다.
공작령의 영주 대행인 엘레노아의 남편인 은현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영향력이 커져만 갔고, 에린은 예쁘장한 외모와 더불어 모험가 길드 안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모험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면서, 은현은 시에테의 집안에 들일 가구들과 생필품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골랐다.
가격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최고급품들로 최고의 효율을 중시하는 세팅을 마치고, 은현과 에린은 시에테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이따가 리오드가 시에테의 집을 찾아왔다.
사전에 소식을 듣고 집들이의 선물로 고급 와인을 가져오자 애주가인 그녀는 리오드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선물만을 받고 제자의 친구를 문전박대할 정도로 시에테의 인성은 글러 먹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커피와 케이크를 먹게 된 것이 지금의 시점.
시에테는 그렇게 남의 집에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부부를 아무런 말도 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
“히히. 더 먹을래!”
하지만 두 부부는 그런 집주인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짜증 나는 것들.’
결국, 자리를 뜬 것은 시에테 쪽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정말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거냐? 이사 온 첫날부터 내 집의 분위기를 망치는 너희들 때문에 도저히 술맛을 즐길 수가 없다.”
잔과 와인을 통째로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에테는 테이블에서 몸을 홱 돌려 은현을 뒤로하고 마당이 훤하게 개방된 베란다의 마루에 걸터앉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와인을 들이키니 고급스러운 풍미가 입안에 맴돌았다.
평소라면 그 맛에 웃으면서 기분 좋게 취기를 즐겼겠지만, 오늘따라 먹는 와인이 굉장히 썼다.
“못난 놈…. 스승보다 그 핏덩이같은 어린 아내가 먼저더냐….”
평소였다면 절대로 내뱉지 않았을, 취기 어린 무의식이 본심이 흘러나왔다.
시에테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와인을 홀짝이고 있을 때, 시에테는 자신의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음?”
“따라드리겠습니다.”
지금 마시고 있는 고급 와인을 집들이 선물로 사들고 온 리오드였다.
“네 친구인 그 못난 놈은 어쩌고?”
“…저도 그 분위기는 견디지 못하겠더군요.”
리오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에테의 물음에 답했다.
아무리 생사고락을 함께 해오면서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라고는 하지만, 테레지아와도 하지 않았던 저런 애정행각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역이었다.
“…흠.”
시에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드의 합석을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의사표시다.
가져온 자신의 잔을 옆에 내려놓고, 리오드가 시에테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해라.”
“…….”
시에테가 곧바로 본론을 언급했다.
사전에 은현에게서 자신의 이사 소식을 들었다고는 하나, 리오드가 페르니아스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것쯤은 아직 정세가 어두운 시에테도 알고 있는 사실.
그런 그가 직접 발걸음을 옮겨 혼자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집들이라는 것이 그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간단히 추측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도 시에테는 이런 일에 익숙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사.
멋대로 붙여진 검성이라는 칭호와 명예를 동경하고, 어떻게든 이득을 취하려는 흑심과 수작질을 마음속에 숨기고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에테는 리오드 또한 집들이를 핑계로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어떠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을 알면서 매몰차게 그를 거절하고 내쫓지 않았던 것은 그가 은현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 녀석처럼 강해질 수 있는 건지.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
시에테는 침묵했다.
생전에도, 생후인 지금에도 처음 받아본 질문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제일 많이 받아보았던 질문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다.
하지만 지금 리오드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당신의 제자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였다.
그는 지금 시에테를 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시에테가 없었다.
동경해 마지않으며 꼭 따라잡고 싶은 존재가 목표로 있는 남자의 얼굴.
그 신선한 질문이 어딘가 재미있다고 느껴진 시에테는 헛웃음을 흘렸다.
‘못난 녀석이 인복만 많아서는.’
어쩌면 은현이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딛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났던 인연들이 큰 결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평소였다면 매몰차게 거절했겠지만, 리오드의 질문을 들은 시에테는 썩 나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의 질문이 제법 신선했기 때문이다.
시에테는 손에 쥔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마루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키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마당의 한쪽에 거치된 목검 한 자루를 쥐고 리오드를 향해 던졌다.
리오드는 당황하지 않고 그녀가 던진 목검을 받아냈다.
“목검을 쥐고 자세를 잡아라. 한 수 가르쳐 주지.”
“…….”
“네가 내 못난 제자 녀석의 옆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재목을 가졌는지 아닌지, 판단해주마.”
“…영광입니다.”
리오드는 목검을 쥐고 시에테와 대치했다.
◆ ◆ ◆
짧은 시간 동안 경험했던 시에테와의 대련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내 제자 녀석처럼 되는 것은 너에겐 무리다.
너와 내 제자 녀석은 검을 사용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육체의 완성도부터, 검을 쥐는 방법, 선호하는 검의 무게, 길이, 날의 정도, 검술의 특성까지 무엇 하나가 맞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오드가 은현을 따라잡기 위해, 그처럼 되기 위해 그를 모방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또한 한정되어 있지.
내심 알고는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하긴 했지만, 그 사실을 시에테에게 직접 귀로 들었을 때는 조금 쓰렸다.
애초에 내 제자 녀석은 나에게서 배워간 것도 기초 중의 기초와 몇 개의 기술들이 전부지. 그 녀석은 그것을 기반으로 스스로에게 맞는 형태로 뜯어고치고 조율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400년이라는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유피테르의 세 번째 시련 속에서, 은현은 처음으로 자신이 완성해낸 시에테의 검술로 그녀를 뛰어넘었다.
내 제자 녀석은 이미 인간으로서 제한되어 있는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 한계는 이미 400년 전에 찾아왔던 것.
하지만 은현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해왔으며 꿋꿋이 검술의 수련을 이어나간 끝에 성장해왔다.
남들보다 몇 배가, 몇십 배나 느린 속도라도,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길 열망하면서.
그 노력과 시간의 따라잡는 것은 리오드에게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리오드는 은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그 녀석의 뒤를 쫓아갈 수 있냐 없냐는 별개의 문제지.
네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이냐. 가장 자신이 있는 것은 무엇이냐. 너는 뭘 할 수 있지? 그것을 생각해라.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네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바로 너 자신을 가장 잘 알아야 한다.
가장 원초적이면서 기본적인 이야기.
하지만 리오드는 자신의 방식으로는 더는 강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육체는 인간의 한계까지 다다라 더는 성장할 곳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의 검술은 최적화된 형태로 완성에 가깝다고 자부하고 있던 차.
스스로의 검술이 완성되었다고 자부하다니. 그것은 오만이다.
검술의 완성을 인생의 목표로 두고 있는 시에테의 입장에서 리오드의 생각은 가소롭기 짝이 없는 오만.
그렇기에 리오드는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나의 장점.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곧바로 떠올린 것은 오랜 단련을 통해서 만들어낸 강인한 육체.
그리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막대한 마력.
그 두 가지를 통해서 만들어낸, 검기를 이용한 검격은 공격 범위에 들어온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리오드는 곧바로 자신의 마력을 이용하여 검기를 만들어냈다.
칼날에 깃든 검기는 극한까지 담긴 마력으로 요동친다.
평소였다면 응축된 마력을 해방하여 폭발적인 파괴력을 만들어내는 검기를 날렸겠지만, 리오드는 그러지 않았다.
‘흘리지 않는다. 단 한줌도.’
칼날에 담긴 마력은 거칠게 요동치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리오드는 이를 꽉 깨물며 힘을 제어했다.
“그 팔다리를 자르고 목숨을 구걸하게 해주마!”
필사적으로 제어하여 검기를 유지하고 있던 리오드의 칼날과 악마의 손톱이 다시 한번 충돌했다.
[올리비온 검술]
[태산(太山)]
서걱
하지만 강렬한 충돌에서 발생한 굉음이 아닌, 무언가가 허무하게 썰려 나가는 공허한 소리가 뒤늦게 퍼졌다.
“크…윽!?”
리오드의 검격을 몇 번이나 받아내고도 여유로웠던 자신의 손톱이 허무하게 잘려나갔다는 것을 깨달은 악마가 경악했다.
* * *